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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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히틀러의 독일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만행은 역시 6백 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집단학살한 인종청소였다. 결국 나치독일은 패망했고,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부역자들 역시 비슷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해외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몇몇 나라에서는(이를 테면 아르헨티나 같은) 이들 도피한 나치 부역자들에게 관대한 대응을 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아이히만이었다.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로 일을 시작했던 그는 곧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을 인정받았고, 점차 중요한 임무들을 맡게 된다. 그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이어질)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담당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국된 현대 이스라엘은 이런 악랄한 나치 범죄자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도피해 심지어 자서전까지 쓰고 있던 아이히만을 납치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재판에 관한 관찰 기록이다.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1930년대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기에 처음에는 프랑스로, 나중에 독일이 프랑스까지 점령하면서 1941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쯤 되면 아렌트가 재판에 참관하면서 아이히만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지지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책에 실린 내용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주장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의 고위직에 속한 적이 없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했던 아이히만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었다는 말이다. 정말로 그가 단지 중간관리자였을 뿐이라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전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할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점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행했을 뿐이며, 당시 그 명령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던 정당한 것이었으므로, 그에 따른 행위를 수행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 아이히만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목으로 처벌을 하는 건 정당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가진 가장 큰 악덕은 허풍이었다고 말하면서, 그가 말했던 많은 범죄행위들은 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던 과장이었다고 말한다. 다만 이런 내용이 아이히만의 죄를 줄여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것이 그를 단죄하려 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졌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비판은, 애초에 이 재판 자체에 대한 정당성 문제였다. 아이히만을 납치해서 재판에 출석시킨 것부터가 절차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아이히만이 행위를 했을 당시에는 없었던 법을 근거로 그의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느냐 하는 형식론적 반론에 저자는 강하게 동조한다. 또, (비록 이스라엘 자신이 전승국은 아니었지만) 전승국에 의한 재판이라는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사건을 국제재판소에서 다루는 것이 옳았다는 내용도 보이고.


물론 형식적으로는 충분히 지적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나치가 저질렀던 그 만행을 제한하는 법이 없었던 것은, 하나의 국가나 정부가 그 정도로 엄청난 범죄행위를 저지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기 때문이거나, 당연히 그와 같은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굳이 따로 법제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았을까?


예컨대 우리는 얼마 전 소위 부패방지기구라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대통령의 부인이 고가의 사치품을 뇌물로 받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기에, 실제로 발생한 ‘그 사건’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코미디를 목격했다. 전형적인 형식논리에 치우친 궤변인데, 물론 절차와 형식은 중요하다. 그런 것이 없다면 사법체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형식론에만 매몰되면 우리는 거악을 스스로 놓아주는 멍청한 짓을 하게 되고, 이는 두고두고 그 사회의 질서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최근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20년 전 밀양 사건처럼.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가 나치의 패망 이후였기에, 이스라엘의 법률에 근거해 나치 전범들과 그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모두 소급적용이다. 그러나 이 소급적용이 부당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건 “정당”할까? 그것은 “책임” 있는 비판일까? 어쩌면 스스로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던 한나 아렌트의 교묘한 논점 흐리기는 아니었을까? 또 그녀가 불륜관계를 맺었던 하이데거가 나치 찬양자였다는 점도 예사롭게 넘어가지지는 않는 부분이고. 실제로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나치부역 혐의를 벗는 데 중요한 법정(허위?)증언을 하기도 했다.





보통 이 책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멋진 문구로 유명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른 채로 거대한 악에 종사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난 그냥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는 식의 변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쏠쏠하게 사용되고 있으니 좋은 지적이다. 개인의 윤리와 집단의 윤리가 다를 수 있고, 개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인간도 악한 조직의 일원이 되면 어떻게 저열하고 추잡한 짓을 하는지 우리는 날마다 확인할 수 있다.


이 세기의 재판을 관찰하면서 뭐라도 하나 남기고자 했다면 그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다만 정말로 아이히만의 사례가 여기에 들어맞는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결국 이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나치 치하에서 온갖 범죄와 인종말살에 동참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이 또한 형식논리에 집착하느라 현실의 악에 어떤 식으로든 서사를 부여하려는 학자연하며 행동을 한없이 미루는 모습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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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김정일 지음 / 지식공작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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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쇼킹하다. 도서관에 갔다가 바로 눈에 들어왔던.. 여기에 저자의 이름까지 심상치 않다. 김정일. ㅋ 책은 시작부터 분당 칼부림 사건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지를 지적한다. 특히 강남에서 정신과 의원을 열고 있는 저자는 대한민국의 온갖 욕망이 집중되는 강남 속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책에서 언급되는 문제 상황은 다양하다. 우선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부모의 과도한 집착과 압박), 성격, 혹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상대와의 결혼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사기(저자는 왜 이렇게 사기를 자주 당했는가!)로 이어지는 관계 등등. 여기에 마약이나 도박, 술 같은 중독물질의 문제들(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은근 이런 게 많다고 한다)도 있고.


책의 후반으로 가면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적 병증이 메인 주제로 떠오른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 그리고 어떻게 증상을 완화, 혹은 해결할 수 있을지에 관한 조언들(어차피 약물 치료는 꼭 필요하다).





책을 읽는 내내 자주 만나게 되는 생각은 저자가 인간들 사이의 만남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면 고립되고, 고립이 되면 점차 정신적인 문제도 발생한다. 예컨대 저자는 소위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을 “사람을 안 만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된다고 안 만나면, 점차 다른 이들을 경계하고 되고 그 경계가 도를 지나치면 선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연습, 훈련이 필요하다. 오로지 공부에만 매몰되어 다른 걸 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결국 부모 걸, 부모 보이가 되어버린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부모에게 의존적이 되어버려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미성숙한 이들이 결혼을 하면 당연히 그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아니, 이전에 연애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일을 하라는 권고다. 일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의 뇌에 이전과는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하고 나서부터 급격히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소위 파이어족이 유행처럼 번지는 세상에서 곱씹어 들어야 할 조언이 아닌가 싶다.





꽤나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작한 책이지만, 그리고 일부 내용들은 성급한 일반화가 아닌가 싶은 데도 있지만, 막상 읽어보면 저자가 자신의 상담실과 실제 삶에서 경험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임상의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나누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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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변형시켜 새로운 세대에 적합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 이야기, 개념을 이용하여

기독교 신앙의 다채로운 비전을 풀어내고 펼쳐내는 것이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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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해 믿음 첫 단추 1
정석원 지음 / 홍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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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제목부터가 좀 말랑말랑하다. 책은 (1) 청소년들을 주 독자층으로 두고 (2) 기독교 세계관의 큰 틀 안에서 (3) 다양한 신앙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담으려고 애썼다.


(1) 설명하는 방식도 꽤 부드럽다. 건조한 설명과 어려운 신학용어 대신, 가능하면 십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사용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인다. 애초에 교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로 기획되었기에, 각 장의 말미에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질문도 더해져 있다.


어차피 교회 교육부서의 교육은 연중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인지라, 이런 종류의 책 한 권이 정규적인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일종의 특별 기획처럼 중간에 시간을 내 한 번쯤 넣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수련회 같은 데서 사용해 봄직도 하고.





(2)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 한동안 많은 관심이 있었다. 주로는 이론적 틀을 잘 세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여러 권의 책들을 봤고, 지금도 책장의 한 칸은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된 책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읽고 나면 이게 단순한 이론적 틀을 기억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그 틀을 우리 삶의 온갖 영역에 적용하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다양한 영역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비춰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항목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이름으로 풀려나온다. 기독교적 정치관, 기독교적 경제관 같은. (이젠 어느 책장 한곳에만 모아놓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 책은 확실히 기초적인 작업이다 보니, 기독교 세계관의 틀을 세우는 단계다. 구성도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되어 있고. 다만 앞서도 말했듯 이론적인 내용보다는 실제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나름의 정리를 한다. 쉬운 접근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덕분에 이론적 틀을 확실히 정리하는 데는 살짝 부족할 것 같기도 하다.





(3) 역시 뭔가를 가르치려고 할 때는, 혼자 말하기보다는 대화가 좀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실시간 대화가 이루어지는 어렵다. 그 대안으로 대화체로 구성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멀리는 플라톤까지는 올라가는 방식이니 꽤 전통이 있는 형식이다.


하지만 결국 글이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리기 위한 형태가 될 수밖에 없는지라, 저자의 신학적 배경이 묻어나온다. 전체적으로는 복음주의적이면서 분명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뭐 이 부분에서는 저자와 동문인 나 역시 비슷한 입장인 터라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전반적으로 아주 깊숙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애초 목표를 생각해 본다면(청소년이라든지, 새신자를 대상으로 한) 이 정도의 시작이면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관심이 생긴다면 추천해 줄 책은 얼마든지 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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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도 -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께 드린 성자의 기도
마크 존스 지음, 오현미 옮김 / 죠이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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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관해 어떤 정보도 읽기 전, 리뷰를 쓰려고 앉았을 때 처음으로 떠오른 단어가 ‘청교도’였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라든지, 문장에서 딱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물론 본문 중에 존 오웬 같은 유명한 청교도의 글이 인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리뷰를 쓰려고 찾아보니 저자 소개에 ‘청교도 사상 전문가’라는 문구가 보인다. 역시나.


책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조금은 집요하다는 느낌으로 분석해 나간다. 모두 스물여섯 개의 장으로 기도의 유형을 분류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청교도의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일반론적으로, 이런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하는 글쓰기 방식은 두 가지 면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다루고 있는 주제에 관한 거의 모든 내용을 검토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금은 억지스러운, 세부적인 부분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특히나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성경이 쓰일 당시의 용법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경우를 낳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이 책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예를 들며나 25장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는 복음서의 구절을 바탕으로 “크게 소리 질러 하는 기도”라는 포인트를 잡아냈고, 여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대속을 위해) 버림받으신 예수라는 주제를 이끌어 낸다. 물론 곱씹어 보면 아주 무리한 적용은 아니긴 하지만, 이게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기도하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는 걸까 싶기도 하다.





책은 예수의 “기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그 기도를 바탕으로 결국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기독론적 주제를 제시하는 데 좀 더 집중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어떻게 보면 기도라는 주제는 일종의 도입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하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나름 기독론에 관한 좋은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서문에 실려 있는, 삼위일체적 관계 안에서의 예수의 정체에 관한 간략한 설명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짧은 글인데도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는데다가, 정교한 설명이 읽는 맛이 있다. 어떻게 보면 본문은 이 서문에서 제시한 예수의 정체에 관한 부연설명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또 썩 나쁘지 않은 구성일 수도 있겠다.


예스러운 느낌의 글을 좋아한다면 읽어볼 만하다. 사실 굳이 기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서문에 실려 있는 삼위일체적 논의를 좀 더 확장해 풀어주는 책이었다면 내 취향에 훨씬 더 맞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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