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정권을 장악한 채, 형식적인 선거행위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시기를 지나왔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런 시민들의 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하지만 사람은 당장 자신이 겪은 고생이 아니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어느 새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민주화”라는 단어가 조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역겨운 짓도 일어나고 있고, 민주주의를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폄훼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있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모른다는 데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책의 1부는 크게 보면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조망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어떻게 민주주의가 발전해 왔는가를 서술하는 식은 아니고,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역사를 익힐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그 마지막에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의 근원에 관한 질문도 담고 있고.
2부는 미래의 민주주의에 관한 고민들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내용. 최근 각종 지표에서 우리의 민주화 수준이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은 분명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주권자’로서의 민중의 각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총 열 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는데, 솔직히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긴장도가 조금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내용도 현실에 천착해있기 보다는 조금은 이상적인 내용,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기우는 듯도 하고. 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모음집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려나.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그냥 저절로 작동하거나, 어떤 역사의 큰 물결이 최종적으로 이르는 상태 따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뜯어보면 이 제도는 굉장히 불안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고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도 있다. 이는 최근 트럼프를 비롯한 다양한 독재적 통치자들이 세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이들은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망가뜨릴 수 있다.
기술의 발달로 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카센터에 맡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자동차를 고쳐줄 공업사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모르는 새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민주주의의 종말이라는 디스토피아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공부를 위한 시작으로 손에 들어볼 만한 책.
언젠가 우리 몸이 부서지고 우리 이름이 지워졌을 때,
예수께서는 혈루증 앓는 여인과 죽은 소녀에게
보여 주신 것과 같은 힘과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 레베카 맥클러플린, 『여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 중에서
“벌은 너무 끔찍한 일이라서
늘 즐거운 상상만 하는 제게는 맞지 않아요.
세상은 이미 더 나쁜 일을 상상해 낼 필요가 없을 만큼
나쁜 일이 많으니까요.”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중에서
재미있는 기획의 소설이다.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가 취미삼아 지인들과 일본식 짧은 시인 ‘하이쿠’를 짓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에서 나온 하이쿠를 가지고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애초에 채 스무 자가 안 되는 짧은 시구 안에 심상을 담아야 하는지라, 상상력을 동원하도록 만드는 게 관건인데, 작가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물론 각 하이쿠를 지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았다는데, 재미있는 건 하이쿠를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원래의 시를 지은 사람들의 의도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는 점.
장르도 굉장히 다양하다. 모든 이야기는 현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한 이야기에서는 가까운 미래의 새로운 의학기술이 보이기도 하고(SF), 심령현상이 있는 이야기도 있다. 조금은 동화 같은 신기한 열매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한 명의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쓰기도 하는구나 싶은 느낌이 확 든다. 물론 단편들이긴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나름의 매력도 있고, 짜임새도 결코 단순하지 않아서 금새 빠져 들어간다.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면(모든 이야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남자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부인의 등골을 빼먹으며 허송세월하다가 이젠 바람까지 피우는 모습을 장모에게 들킨다거나, 의심병이 도져 새로 사귄 애인에게 집착과 스토킹, 학대까지 일삼는 사이코,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애인을 납치해 강제로 업소에서 일하도록 만들려는 악질 등등.
책 후반에 실려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보니, 보통은 역사물을 쓰던 작가가 현대 이야기를 쓰려다 보니 자연히 매일 뉴스에서 보던 이야기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런 뉴스들이 매일처럼 보이는 일본이라는 사회는 얼마나 지옥 같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는 일이기도 하니 피장파장이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책은 이전에 겨우 한 권 읽어봤을 뿐이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가끔씩 쉬어가는 독서를 위해 선택해 보기에 충분한 작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