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두 번째 날..

화천은 눈으로 덮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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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한나라당이 주도한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론이 오늘 발표되었다.

 

힘과 숫자로 밀어부치고

대리투표까지 횡횡한 것 자체는 위법하지만,

그렇게 해서 가결된 법률안 자체는 무효가 되지 않는단다.

 

말하자면

때려서 돈을 뺏은 행위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이미 뺏은 돈은 안 돌려줘도 된다는 아름다운 설명.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같은 나라에서 산다는 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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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권리를 말한다 - 살아가면서 읽는 사회 교과서
전대원 지음 / 뜨인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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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소유하면 할수록 인권 감수성은 점차 둔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1. 요약 。。。。。。。

      사회 선생님이 쓴 법과 권리에 관한 이야기.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자는 우리나라 헌법이 모든 국민에 대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들에 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교사라는 저자의 직업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저자는 주제와 관련된 시사적인 질문을 툭 던져놓고, 그것을 고리로 말하고자 하는 기본권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읽어갈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였으면서도 그 내용은 가볍지 않다.


2. 감상평 。。。。。。。

     터번처럼 생긴 이상한 모자를 뒤집어 쓴 수염자국이 선명한 아저씨와 교복인 것 같은 옷을 입은 채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여자 아이, 그리고 자기 얼굴만 한 돋보기를 들고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있는 아주머니, 이 모든 그림이 범상치 않은 그림체로 그려져 있는 표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저 주황색 바지에 체크무늬 조끼를 받쳐 입고 이상한 터번까지 쓴 키치 패션의 사나이는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이 책은 뭐란 말인가.

     이런 와 닿지 않는 표지 디자인은 책을 읽기도 전에 기대감을 접게 만드는 데, 이러한 생각은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금새 사라져버린다. 저자는 친한 사람에게 하듯 편하게 말을 걸고 있고, 그의 질문에 마음속으로 대답을 해 나가는 순간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 들어간다. 썩 괜찮은 책이다.

 


 

 

     책의 부제가 ‘살아가면서 읽는 사회 교과서’인데 참 잘 지었다. ‘교과서’란 꼭 배워야 할 무엇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의미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살아가면서 읽는’이라는 수식어는 그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학술적인 방식보다는 실제적인 예와 경험을 통해 전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제처럼 책의 내용 또한 그러했다. 

     책의 논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좀 더 논지가 강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도 어린 학생들을 1차 독자로 상정하고 썼기 때문일 것이라는 느낌이 맞다면 이 정도만 되도 충분히 좋아 보인다.

     책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들을 다루고 있다. 모든 법의 최상위의 법이라는 헌법이지만, 그 성격상 선언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어서 일상생활에 직접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그 선언적 의미를 일상에 적용하면 어떤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지를 보여줌으로써 헌법을 살아있는 법으로 복원시킬 경우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유익할 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언젠가 알고 지내던 한 법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목표가 ‘헌법 정신이 구현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헌법 정신만 제대로 구현되더라도 사람을 존중하는 따뜻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소박한 기대였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 ‘소박한 기대’를 ‘지나친 기대’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손에 넣은 이들이 그렇게 헌법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일반 국민 전체가 헌법에 대해 명확한 이해도, 제대로 된 교육도, 온전한 실현에 대한 경험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데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한 첫 걸음은 사람들에게 헌법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교육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교육은 어렵지 않게,편하게 접근을 해야 할 텐데 이 책은 충분히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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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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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 세력과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던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최고 실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얻게 된 권력을 바탕으로 로마에 새로운 정체(政體)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일인자에 의한 의사결정이 합법화 된 국가, 즉 제정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저 나에게 힘이 있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식이라면 위험하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암살이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전히 공화정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비록 그들에게 힘이 없다고는 하지만 암살이라는 도구는 약자라고 하더라도 성공의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방식인 법이다.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모두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을 진행한다. 마치 거대한 직소퍼즐의 조각을 서로 연결되지 않게 띄엄띄엄 늘어놓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는 식이었다. 일흔 일곱 해라는 시간은 그렇게 해도 로마의 제정으로의 전환을 안정적으로 이뤄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 감상평 。。。。。。。


3권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중해 전역의 패권을 쥐게 된 로마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의 이익만을 극대화 하면 그만인 국가가 아니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원로원 의원들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는 이런 상황에서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에 쥔 기득권을 놓지 않고자 했기에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나마 마리우스나 술라 등의 비근본적인 개혁이 문제가 터져 나오는 상황을 잠시 미뤘을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권력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사람이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체제로 인해 국가 전체의 이익이 저해 된다면 체제 자체를 바꾸어 버려야 한다는 명료한 태도.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카이사르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충분한 인내심과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는 새로운 국가로 재건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렇게 세워진 국가가 든든히 서기 위해 필수적인, 보통은 2대나 3대 째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로마로서는 제 때 제대로 사람을 만났다.


문제는 앞서의 서평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체제의 전환 자체가 문제를 자연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인에 의한 지배는 의사결정의 신속함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문제를 보지 못하는, 혹은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 일인자에 오를 경우 이전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이전의 정체(政體)에서는 그저 실각을 시키면 되지만, 일인자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특히나 혈연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점은 장차 큰 불안요소로 다가오게 된다. 전제군주정의 최대의 약점인 능력 없는 이들의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익을 나누기를 거부하는 강한 기득권 세력에 의한 개혁의 좌절.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다. 로마의 경우 결국 기득권 고수에만 급급했던 이들을 완전히 권력에서 배제시켜버리는 방식으로 결론이 지어졌다면, 이 땅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게 될까. 모든 관직을 평민들에게도 개방함으로써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로마의 귀족들은, 더 이상 권한을 나누기를 거부함으로써 독점적 권한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을 이 나라의 ‘귀족’들은 제대로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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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독설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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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언제부터인지 ‘축복’, ‘천당’ 운운하는 이런 신앙이나 서로 얘기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복권추첨일 기다리듯 보내왔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절대권력의 추구자가 되어버렸다.


 

1. 요약 。。。。。。。

     예수를 모든 종류의 일상적 권위에 대항해 적대적인 운동을 벌인 인물로 설정하고, 그 관점 아래 복음서의 여러 사건들을 재조명한 책이다. ‘역사적 예수 운동’의 한 지류이자 그 한국적 적응 모델 중 하나인 ‘민중신학’에 신학적 기원을 두고 있는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기존 교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연히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2. 감상평 。。。。。。。

     자유주의 신학이란 한 마디로 이성 중심의 신학, 모든 것이 이성적 사유 과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만들어진 신학이다. 이성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데,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발생된 것으로, 이런 면에서 이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 운동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생각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고, 자연히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적인 일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 나아가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꾸며 넣은 것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예수 운동’은 그렇게 성경 편집자가 꾸며 넣은 것들을 배제하고 원래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추론해 보자는 나름 건실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에 관한 정보는 사실상 현재 남아 있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나아가 그것을 보존해 온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서 밖에 알 수 없는데, ‘교회의 예수’ 말고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필경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남겨둔다는 선별작업이 필요하지만, 이 선별작업 역시 그 때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 기준에 근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의 생각에 맞는 모습만 남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ex. ‘캘리포니아의 예수’)

     민중신학도 그런 역사적 예수 찾기 운동의 한 지류로, (마치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6, 70년 대 한국의 독재 시대에 맞는 예수상(像)을 찾는 데서 만들어진 신학 조류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 운동’이 갖고 있었던 문제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진짜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를 찾기 보다는 오늘날 연구자의 상황에 맞는 예수의 모습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민중신학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현대인의 눈으로 읽어낸 성경(혹은 예수)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강변이다. 오히려 그런 해석만이 진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읽는 올바른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심하게 말하면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저자는 결국 이 책을 통해 현대인의 눈에’만‘ 맞는 예수를 창조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그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민중신학도 한국 교회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 안에는 권위와 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억압당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며,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해 잊지 않도록 해 주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힘’에 대한 동경 아닌가.


     나아가 성경 텍스트에 관한 극단적 관점에서의 재단은 요셉을 혁명전사로 만들고, 마리아를 로마 군인에 의해 사생아를 갖게 된 여인으로 전락시키는 정도다. 말로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재구현 하겠다지만, 그 기본적인 사료가 되어야 할 복음서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증거는 거의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기초로 역사적 예수를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경 텍스트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오늘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예수의 모습밖에 남는 것이 없다.

     저자는 민중을 압제하고 폭압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을 향한 예수의 독설을 쓰고자 했으나, 결국 나온 것은 (그나마 무엇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고 여기는) 예수의 입을 빌린 저자의 독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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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밖에서 예수를 못 찾는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어디서 예수탐구에 대해 몇 마디 좀 주워듣고선 이런 글이나 쓰는지.

2017-10-28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의 다양성이 합의점이 없음을 말하는게 아님.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는 차이들을 과장하지 마시길.

2017-10-2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학자들중 일부나 복음서를 역사문서로 취급함. 중립적인 종교학의 경우에는 그런 주장은 처음부터 먹히지도 않고. 그런걸 감안하지도 않으면서 뭐가 어쩌니 저쩌니.

2017-10-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민중신학 자체를 비판하면 모르겠는데, 역사연구 자체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니 이건 뭐 봐주기도 힘듬.

2017-10-2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맛에 맞는대로? 자연과학 정도를 빼면, 입맞에 안 맞는 연구가 어디있는데? 보수기독교인들도 지들 입맛에 맞는 소리만 하잖아. 결국 차이는 입맛이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이냐 차이임. 보수 신학자들은 그걸 못함.

2017-10-2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진짜 예수상이 뭔지는 몰라도, 전통적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예수 모델은 현존하는 다른 어떤 모델들보다 설명력이 떨어짐. 즉,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최소한
교회 모델을 받아들이는 입장보다 합리적임.

2017-10-2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양비론이 왜 역겨운 입장이냐면, 현실적인 대안 제시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편도 선택을 못하기 때문임. 교회의 예수론은 끝났고 다른 대안들만 남았음. 그 대안들을 비판한다고 죽은 옛날 예수론이 돌아오진 않음. (역사연구를 포기하고 지금 가진 자료로는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말하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