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인 : 최후의 결사단 - Bodyguards and Assasi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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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1. 줄거리 。。。。。。。

 

     중국 청조 말, 중국의 격동기. 이미 조정의 부패와 무능력은 대륙을 적절하게 통제할 능력을 상실해버렸고, 남쪽에서는 인민들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위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혁명의 핵심 기획자였던 손문은 전국적인 거사 계획을 위해 홍콩을 방문하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암살단을 파견한다.

 

     손문을 대신할 가짜 손문을 만들어 암살단의 주의를 끌기로 결정한 혁명가. 하지만 너무 일찍 죽어버리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에, 손문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다양한 이유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과 그들을 뚫고 손문을 죽이려는 암살자들 사이의 한 시간 동안의 추격전..

 


 

2. 감상평 。。。。。。。

 

     단순히 액션 영화로 봐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영화이다. 19세기 말 이미 영국에게 할양되어 국제적인 도시였던 홍콩의 동서양을 아우르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름 꽤나 하는 무협 배우들이 과감한 와이어 액션을 펼치니 볼만은 하다. 다만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인물들은 짧은 상영 시간 동안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 결과는 인물 사이의 관계나 갈등은 잘 보이지 않고 날아다니는 배우들만 보이는 완성도 떨어지는 작품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청조 말 중화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홍콩을 찾은 중산 선생은 중화민국을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손문을 가리킨다. 손문은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활동을 폈는데, 그래서 그런지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립한 국가인 대만에서 국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언뜻 그러면 공식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는 당연히 배척해야 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국공합작과 같이 정파적 이해보다는 중국 국민 전체의 힘을 결집시키려 노력했고, 그 중심에 인민, 혹은 국민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는 양쪽 모두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견될만한 인물로 누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김구나 여운형 정도가 떠오른다. 모두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남과 북으로 나뉘는 것을 찬성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던 그 때, 활발하게 남북을 오가며 좌우합작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이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아쉬움으로 오늘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아직도 자기와 다른 소리를 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하며 마녀사냥 하듯 몰아가는 작자들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린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인 중국만도 못한 유치한 사회적, 정치적 수준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들은 이런 속 좁은 민족이 품기에는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이야기들은 영화를 보고 좀 멀리까지 사유의 흐름을 따라 나섰을 때나 떠오르는 것들이고, 영화 자체는 뭐.. 그냥 그렇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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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었던 학생 때가 좋았다.
 
졸업을 하고 나니 공부해야 할 것의 한계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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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막 출판사에서 책 그냥 보내준다. ^^

 
간밤에 처음으로 당직을 해 보고 돌아오닌 책 세 권이 도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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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뭐 이런 쓸 데 없는 질문을 하느냐고,
친절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화내고 싸우는 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를 내지 않는 것과 친절한 것은 다르다.
전자가 매우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적극적이면서 능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과 친절을 베푸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수월할 지를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논의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이유로 친절에는 대가가 따른다.
대개 친절에는 ‘양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종종 ‘희생’이라는 덕목까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히지 않는 선까지는 친절하더라도
그것이 양보를 넘어 희생까지 요구하게 되면
쉽게 친절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디까지 친절해 봤는가?
이래도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친절이란,
단지 무조건 잘 해주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친절한 사람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잘 돌려서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친절해야 한다고 해서
마음에 안드는 남자의 대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친절보다는 우유부단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시간을
딱히 중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수다로 보내자는 요구는
거절하는 것이 옳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니까.

요점은 거절의 기술에 있다.
상대를 덜 아프게 하면서 거절을 하는 방식.
(전혀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거절이란 주사바늘처럼 늘 아픈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무시’라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이 방법은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멜리 노통브는 무시를 인격적인 살인이라고까지 말한다.)
거절은 조금 더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좋다.
좀 더 부드럽고, 덜 직접적이어서
상대가 거절을 당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라면,
혹은 후에 알게 되었더라도
씁쓸한 미소를 짓고 넘어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당신은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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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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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과학자인 형이 비운의 죽음을 맞게 되어 그 대신 판도라로 날아오게 된 제이크. 전직 해병인 그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사용할 수 없는 두 다리를 고칠 수 있는 막대한 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말에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수락한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기지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원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쿼리치와 이에 반대하며 대화와 설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레이스 박사의 의견이 충돌되고 있었던 것. 자신에게 협조하면 금방 다리를 고쳐 주겠다고 약속하는 쿼리치의 제안을 받아들인 제이크는 나비족들 사이로 들어가지만, 나비족 처녀인 네이티리를 만나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어 버린 미래의 어느 날. 인간들은 ‘판도라’라는 이름의 새로운 행성에 엄청난 에너지 자원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자원을 탐사하고 채굴할 사람들을 파견한다. 하지만 이미 그 행성에는 ‘나비족’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그곳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에 사람들은 나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를 섞어서 일종의 복제인간(아바타)을 만들어 낸다. 이 복제 나비족에게 유전자를 빌려준 인간은 특수한 장치에 들어가 아바타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나비족처럼 살 수 있게 된다.

 



 

2. 감상평 。。。。。。。

 

     이 엄청난 흥행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는 참 단순한 해석코드를 제시한다. 사람에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며 자신의 관심에 맞는 문제를 얼마든지 해설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북미나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하는 미국이나 중국의 폭력성을 떠올릴 수도 있고(도둑이 제발 저린지,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 영화가 상영중지 되었다나..), 이 땅의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작년 겨울 도시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에 희생된 어떤 철거민들의 모습을 대입할 수도 있다. 불교계에서는 최근 단체 관람을 한 후 영화 속 세계관이 이원론적 세계관이나 기독교 세계관과는 달리 모든 것은 서로 통한다는 불교의 일원론적 관점과 유사하다는 감상평을 내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비족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이 된다는 설정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오래된 ‘성육신’이라는 메시지의 21세기 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린이 관객들에게는 그냥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면, 영화의 흥행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보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단순한 짜깁기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지만, 원래 이야기(내러티브)라는 것이 그 구조를 분석하면 사실 몇 개 되지 않는 법이다.(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아직 못 만들어 낸 걸 보면, 말하는 것과 실제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대박 흥행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라는 구조가 좀처럼 깨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 힘을 의지하며 원하는 것을 더 가지려고 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영화 속 나비족처럼 활같은 ‘원시적인 무기’밖에 들고 나올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니까. 사람들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자신들의 매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영화 속에 투영하고, 나비족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한 편으로 ‘연대’의 힘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죽어가는 그레이스 박사를 앞에 두고 나비족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몸에 손을 댄 채 거대한 하나의 파도를 만들어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온전한 연대를 이루어낸다. 비록 그레이스 박사를 되살리는 것은 실패했지만, 나비족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모두를 살리는 진정한 연대’가 단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함의는 단지 영화의 메시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3D에 이어 4D로도 상영되기 시작한 이 영화의 상영방식은 영화 속 소재와 더불어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어떤 것이 진짜로 사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담아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 한 스님이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이런 차원을 엿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기술이 발전하면 영적인 차원이 퇴색할 것이라는 단편적인 예상은 지난 200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앞으로도 빗나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기술이 철학과 종교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도록 만드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번쯤 볼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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