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1~6권 세트 - 전6권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다른 스승 신들이 노여워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그게 진화의 방향이 아니냐?> 하고 말이다.

단단한 것이 무른 것을 이긴다. 파괴하는 자가 도피하는 자를 이긴다.

그러니까 경쟁자들을 없애 버리는 자는 싸움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1. 요약 。。。。。。。

 

     영계(靈溪)를 탐사하다가(『타나토노트』) 죽어 천사가 된 후(『천사들의 제국』), 마침내 신 후보생이 된 미카엘 팽송. 그는 다른 143명의 신 후보생과 함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스승으로 삼아 새로운 지구를 탄생시키고 자신이 맡은 부족을 승리자로 만드는 거대한 게임에 참여한다. 하지만 타고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그는 다른 후보생들과 함께 게임이 벌어지는 ‘아에덴’을 벗어나 그 ‘위’에 누가 있는 지를 찾아 나서고, 그러는 중에도 게임은 지속되면서 하나 둘 탈락자들이 늘어간다. 게임의 결말이 가까워지면서 신 후보생들 간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팽송은 마침내 ‘9’에 이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전..

  

 

2. 감상평 。。。。。。。

 

     사후세계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마침내 신들의 세계까지 올라갔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無)까지 이른다.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은 이제까지 그 ‘신들’을 우려먹으며 많은 책을 팔았던 저자의 이야기치고는 썩 특별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 마무리였다. 최악이라고 까진 못하더라도 고심 끝에 차악(次惡)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이 함께 고민했던 수많은 문제들과 질문들은 결론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개미』를 처음 손에 든 지 10년 만에 느끼는 저자의 상상력 고갈의 징조였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작품들과 더불어 마침내 작가의 사후 세계에 대한 탐구가 드디어 끝이 났다는 점이 이 작품을 읽고 든 가장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사후 세계에서, 천사들의 세계, 나아가 신 후보생과 신 자체의 세계까지 나아갔으니 구조만 보면 단테의 「신곡」의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패러디의 수준이 원래의 그것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점이 아쉽다.

     기발한 상상력들이 담긴 단편집 『나무』라는 작품에서 이미 ‘어린 신 후보생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던 적이 있었던 걸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에 관한 착상은 꽤나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문제는 판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다는 점이다. 대충 단편으로 끝났을 때는 여운이나마 남을 여지가 있었지만, 여섯 권이나 될 정도로 꽉 찬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지는 느낌이 강해졌고, 결말은 허무했다.

     가장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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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 Dear Joh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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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1. 줄거리 。。。。。。。

 

     현역 군인인 존은 휴가를 나와 있는 동안 우연히 만난 사바나에게 호감을 느낀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매일같이 만나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던 그들은 방학과 휴가가 끝나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가던 기다림의 시간은 존의 전역이 예정된 1년 후면 끝날 것 같았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테러와 그로 인한 복무연장 결정은 적어도 둘 사이에 있어서만큼은 큰 시련이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계속되던 편지교환은 어느 날 도착한 사바나의 편지 한 통으로 중단되고 만다. 

 


 

2. 감상평 。。。。。。。

 

     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느껴야만 영화표 값에 대한 아쉬움을 누를 수 있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딱히 없다. ‘2주간의 찬란한 사랑, 7년간의 가슴 벅찬 기다림’이라는 카피문구는 두 문장 사이에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었고, 그 빠진 한 줄은 이야기의 내용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감독이나 홍보담당자는 적어도 이야기의 ‘분위기’는 그대로라고 강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글쎄다..

     배우들의 연기력, 특히 사바나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맘마이야 때보다 확실히 나아지긴 했다. 채닝 테이텀은 여전히 약간은 무뚝뚝한 맛이 있었고. 하지만 영화관에 가는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이유가 단지 배우를 보기 위해서는 아닌 나 같은 관객에게는 그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하는데, 이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영화의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인 ‘편지’는 기다림은 기쁨을 배가시킨다는 교훈을 스스로 체득하게 만드는 매체다. 그것은 즉각적인 전송으로 인해 조급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는 현대인들은 쉽게 느끼지 못하는 긴장과 떨림을 주었었다. 기다릴 줄 모르는 현대인들, 무엇이든 느끼는 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김을 받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기술의 빠른 진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 ‘일단 해 보고 나서 생각하자’는 식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을 조장하는 면이 크다. 사실 오늘날 많은 문제는 그렇게 생각 없이 눈앞의 것만 보며 저지른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닌가. 당장에 모든 단문전송메시지(SMS)와 휴대폰과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메신저를 내던져버리고 편지로 돌아가자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겠지만,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지를 통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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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김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에요.

앞에서 지적한 섬김과 치유와 쉼이 없는 교회의 모습도

모든 것이 교회 안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닌 것도 큰 문제로 부각되고,

그러다 보면 갈등과 싸움이 많아지는 것이에요.

지금 말씀처럼 세상에 나가서 복음과 진리로 싸우면

교회 안에서 섬김과 치유와 쉼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다 보면

안에서는 서로 위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게 생길 테니까요.

 

1. 요약 。。。。。。。

 

     ‘왜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100분 토론 형식으로 꾸며낸 책이다. 교회와 예수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다소 소모적인 논쟁(1장)으로 이야기의 불을 붙이는 전략을 사용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2장으로 들어가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알맹이 빠진 모습(저자는 이를 ‘붕어빵 기독교’라는 용어로 표현한다)이라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그 결과 나타나고 있는 파열음들을 들려준다. 7장부터는 결론부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올바로 회복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있다.

 


2. 감상평 。。。。。。。

 

     이 독특한 방식의 책의 구조는 여러모로 저자에게 잘 맞았던 것 같다. 우선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변증과 발전적 제안을 한다는 책의 기본 방향에 잘 어울린다. 일반적인 서술로 진행했다면 자주 반복되는 구조로 인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토론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중간중간 저자와 독자 모두의 생각과 어긋나는 발언 삽입함으로써 이런 위험에서 벗어났다. 또 이런 형식에는 일반적인 유리점도 있는데, 먼저 각각의 인물이 짧은 시간동안 발언을 해야 하기에 일부러 길게 저자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만 툭툭 던져도 된다는 것(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서술상의 편리함인지 모두 알 것이다)과, 등장인물이 많기 때문에 혹여나 어떤 독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주장이 나와 항의를 받더라도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소’라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서술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약점도 있는데, 한 명의 저자가 성격이 다른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자에서 발언을 꾸미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등장인물들의 발언만 놓고 보면 서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저자가 하고 싶은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여유가 사라진다고 할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미있는 시도이긴 했다.

 

     저자가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은 대부분의 신자와 비신자들이 공유하는 문제일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은 3장에 잘 나와 있는데, 성경해독력의 저하와 구원의 의미에 대한 축소, 제자도에 대한 외면, 맘몬주의 등이 그것이다.(76-77)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비교적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총신대와 가장 진보적 신앙을 천명하는 한신대 양쪽에서 모두 공부했던 저자의 독특한 이력의 영향도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양쪽의 신학이 적어도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용상에서도 저자는 여섯 명의 인물들의 입장을 자유로이 오가고 있다.

     문제는 그 해결방향. 책 속에도 언뜻 언급되었듯이 쉼과 적극적인 섬김은 서로 어디쯤에서 조화를 시킬 수 있을지 그 경계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큰애 젖을 물리면 둘째가 칭얼대고, 둘째를 안으면 셋째가 울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애정 없이 파상공세를 취하는 것은 늘 쉬운 법이다. 그리고 각각의 공세를 각각의 방식으로 막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모델이 나올 수 있는가 인데, 책은 이 점에 대해서는 놓쳐버리고 있다.

     또 저자가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믿음을 구별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문제다. 이는 초반부의 소모적 논쟁 중 하나인 예수와 교회를 분리할 수 있는가 와도 연결되는 문제인데,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나아가 교회가 보존해 온 문서들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딱히 구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굳이 두 가지를 나누어 구분하려는 것은 ‘원시적인’ 신앙을 가졌던 고대 신자들에 비해 자신들이 좀 더 사실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분명 오늘날 현실 기독교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를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에 대한 공격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천박한 문화에 휩쓸려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볍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는 이 책은,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민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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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 - Parallel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줄거리 。。。。。。。

 

     최연소 부장판사가 된 김석현. 바쁜 나날들을 보내던 그에게 어느 날 아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아내의 살인범을 찾아 나선 그의 앞에 나타난 한 신문사 여기자는 30년 전 그와 너무나 닮은 삶을 살았던 한 판사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름하야 평행이론. 일정한 시차를 두고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동일한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시답잖은 이야기로 치부했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3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면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건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은폐되어 있고, 석현은 살해위협을 받는데..



2. 감상평 。。。。。。。

 

     링컨과 케네디의 닮은꼴의 삶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광고했던 영화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두 명의 젊은 부장판사의 아내가 살해당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남편, 사건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 등 영화를 재미있게 꾸밀만한 소품들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감독의 연출력과 이를 실제로 구현할 배우들의 연기력만 뒷받침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연을 맡은 지진희는 이름값에 못 미치는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의 스릴러 장르 영화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비밀을 추적해 들어가는 주인공에게 몰입이 되기 마련. 그렇다면 주인공은 관객이 충분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지를 확인하며 연기를 진행해야 하지만, 영화 속 김석현은 누가 따라오든 말든 무조건 앞으로 달리고, 지나치게 좌충우돌한다. 이 영화가 사실상 주인공 혼자서 이끌어가는 내용이라고 할 때 지진희의 과도한 폭주는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감독의 연출이 한 목 했는데, 평행이론이라는 주요 소재는 그저 운명처럼 던져진 것일 뿐 누구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주인공이 판사라는 소위 인텔리인데도 말이다. 감독은 주인공은 너무나 쉽게 평행이론을 인정하도록 내버려둔다. 이론에 대한 최소한의 지적인 접근조차 이루어지지 않으니, 당연히 배우들은 시종일관 뛰어다닐 수밖에 없고, 계속 몸으로만 뛰다보니 영화의 중심도 치밀한 추적과 같은 지적인 자극보다는 그저 물리적인 장치들을 동원해 자주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 머물러 있다.


     스릴은 단지 관객이나 독자를 깜짝깜짝 놀래킨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침을 맞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더 진전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놀라는 것은 정신을 따끔거리게 하는 일종의 고통인데, 관객들이 이를 참는 이유는 그것들을 통해 더 진전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도 노력을 해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역부족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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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미래 - 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필립 젠킨스 지음, 김신권 외 옮김 / 도마의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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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세 기독교에 대해 현대인이 가지는 이미지는 

대개의 경우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유대교나 이단에 대해 가혹했던

성직자들의 세속 지배, 신정국가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중세의 상당한 기간에 세계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 통치자들 아래에서 소수파로 살아야 했다.

 ……

중세에 자주 나타났듯이, 기독교인은 세련된 도시인이라기보다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었다.

 

1. 요약 。。。。。。。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점차 쇠퇴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쇠퇴할 종교이다. 하지만 저자는 각종 통계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지구 남반부 전역(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에 걸쳐 기독교 인구의 대대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향후 세계 기독교에 관한 고전적 이미지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주류’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흐름’이라고 정의할 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주류’ 기독교는 남반구의 강렬한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열정적인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흐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충돌들’에 대해 설명한다. 남반부의 교회들은 그들의 오랜 신앙들(이를 테면 정령신앙과 같은)의 여러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미 등지에서는 교회가 매우 강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모습들을 세속화되고 학문화된 서구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기독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반부에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급격한 증가는 단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또 다른 주요 종교로서 이슬람교도 있다. 특별히 높은 인구증가율을 가진 국가들에 있어서 이 두 종교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서구의 예측과는 다르게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기보다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때문에 저자는 미래 사회의 중요한 분쟁들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아울러 지적한다. 


2. 감상평 。。。。。。。

 

 

     이 인구통계학에 근거한 학술적인 책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전세계의 종교인구의 추이에 대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서구와 유럽인의 종교, 제국주의적 종교라고 적대시하는 어떤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기독교는 그 태동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적이었으며,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 자체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이 맞닿는 지역이기에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만, 사실 그동안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점이기도 하다. 초기부터 기독교의 중심지는 안티오크였고, 알렉산드리아였으며, 바빌로니아에도 제법 큰 교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세계적으로 기독교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는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인구증가율이 매우 높은 나라들이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럽 등지의 기독교인은 줄어들겠지만 대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기독교의 중심이 더 이상 유럽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책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늘어나고 있는 남반구의 신생 교회들의 성격은 기존의 교회들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도 가벼이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아 대부분의 공동체를 포괄시키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좀 더 작은 이유로 분열되기도 하고, 사실 생각이라는 것에 금을 긋는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엄청난 변화에 대한 이 책의 지적은 비단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만이 아니라, 종교적, 영적 차원에 무관심한 이들도 함께 귀담아 들을 만 한 내용이다. 이 책의 지적이 옳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미래는 종교를 무시하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던져줄 것이다. 우리는 이 ‘신의 미래’에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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