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저 인간들의 착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인간은 사랑의 힘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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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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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천체물리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이해하는 과학과 종교의 공존에 관해 1985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린 기퍼드 강연의 강사로 나와 했던 강연을 책으로 엮었다. 광대한 우주 이야기로 시작한 저자는 그에 반해 인류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에 관해 지적하면서, 우주가 마치 인류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하는 종교에 관해 가볍게 빈정거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서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서의 과학의 우월함을 한껏 추켜올린 다음 종교란 그저 인류의 오랜 경험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정형화된 신념 체계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당연히 그런 ‘종교’에는 여러 인습적인(그래서 이제는 버려야 하는) 요소들이 잔뜩 들어 있어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하지만, 예의 바른 저자는 청중들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건지, 그래도 다 버릴 필요까지는 없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어도 괜찮다는 입장을 취한다. 마지막 강연은 그 ‘어떤 부분’에 관한 내용인데, 인류가 자기 파괴적 행동 - 이를테면 핵전쟁 같은 -을 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데 종교가 일정부분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 같다. 

 

 

 

2. 감상평 。。。。。。。               

 

     사실 자연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과학에 대한 종교의 굴복, 혹은 예속을 전제하는 시도다.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통로로서의 과학이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종교)을 재구성하겠다는 시도는, 잘 해야 과학의 호의에 기생하는 비자립적 종교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런 자리에 칼 세이건 같은 강연자를 초청했으니 칼 자신은 꽤나 반색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이 강연(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모든 논리는 바로 그 자연신학의 표준에 가깝다.

 

     여느 물리학자들처럼 칼 세이건도 역시 가장 작은 세계부터 광대한 우주 전체까지를 단일한 논리로 설명해 낼 수 있는 ‘대통합이론’의 신봉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라는 부제로 살짝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그저 우주의 물리법칙의 총합이라는 견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언뜻 만약 신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와 같은 일신론 종교의 말이 옳다면, 그 신이 굳이 자신이 만든 세계의 질서에 의해 측정되고, 혹은 제한되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이런 부분은 잘 인식되지 않는 것 같다.

 

 

     책 속에는 소위 유신 논증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저자가 하나씩 그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깨뜨리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사실 인간이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 역시 비슷한 과학주의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십억 년의 시간이 흐르면 그저 당연하게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물과 인간, 문명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간다거나, 막연히 현재의 과학으로 입증되지 못한 부분들도 언젠가는 완전히 설명될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설명되는 것만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은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판단인데, 저자는 이것을 판단이 아닌 일종의 공리처럼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이비 종교나, 외계인 괴담과 같은 것들을 모두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늘 회의(懷疑)하고, 타당한지 과학적인 도구를 사용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 삶의 의미를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로 인류가 그저 우주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면, 굳이 인류의 존속을 위해 애써야 할 이유는 또 뭔가. 이런 마당에 책 뒤편에 ‘종교가 과학 앞에서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어쭙잖은 제목을 붙인 옮긴이 후기가 좀 생뚱맞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 책을 엮은 앤 드루얀이나 이 책의 추천자들 중 상당수가 칼 세이건을 상당히 ‘종교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이 책이 말하는 그것(물리법칙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비난하는 그것(일종의 ‘신비’가 더해지고 존경이나 경의가 필요한)으로서 이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인데, 오늘날 ‘종교’라는 단어가 가진 색깔이 얼마나 옅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그를 그렇게 칭송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인데, 이건 마치 남이 와서 ‘너희는 지금까지 가족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어. 사실 가족이란 건 이런 것인데, 이 사람도 너희 가족이야’라고 말하면서 모르는 아저씨를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식이다. 왜 어떤 사람이 우리 가족인지를 남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건 일본인들이 인정을 하고 말고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어떤 사람이 종교인, 혹은 종교적인지는 종교에 속한 이들이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연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에 속한 사람들은 꽤나 호의적으로 볼 수 있겠다. 또, 자신들이 허용해주어야 종교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당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과학주의자들도 좋아라 할지 모르겠다. 참, 오해하지 말자. 나는 저자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적어도 이 책에 나온 저자의 모습은 도킨스나 히친스와는 달리 상당히 신사적이다. 반대하더라도 예의는 지키는 게 맞는데, 요샌 이걸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저자의 주장이 완벽한 것인가 묻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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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1-09-1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도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도킨스나 종교 근본주의의 시각이 아닌 또 다른 합리적인 종교에 대한 시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노란가방 2011-09-16 11:55   좋아요 0 | URL
네. 계획 중인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꼭 읽어보겠습니다. ^^
아.. 찾아보니 오강남 교수님이 감수를 하셨네요?
제가 그분의 범신론을 딱히 좋아라 하지 않긴 합니다만..ㅎㅎ

2011-09-16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11-09-16 12:26   좋아요 0 | URL
아 예... 그런 걸 알아내셨군요!! ^^;;
평점은 책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거니까요.
동의를 하고, 하지 않고는 감상으로 남기면 되는거구요.
(물론 감상도 어느 정도 들어가긴 합니다만..ㅋ)
미니홈피에는 평점 7/10점을 줬는데 알라딘에선 표기방식이 달라 좀 깎였네요.
 

 

만일 학생들로 하여금 회의를 갖도록 할 수 없다면,

교사는 학생들을 결국 지식과 도덕에 예속되는

노예로 만드는 셈이다.

진정한 교육이란 권위자들이 말하는 것을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심하고 배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W. 사이드,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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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 중 한 장면

 

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 『운명이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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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쫓는 아이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줄거리 。。。。。。。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간호원으로 일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아스나. 아버지가 남겨주신 광석을 이용한 라디오로 신비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예의 그 라디오를 듣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던 중 거대한 괴물을 만나지만, 갑자기 나타난 슌이라는 소년에 의해 구조된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십대 소녀의 첫 사랑을 경험하게 된 아스나. 며칠 뒤 어머니로부터 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만났던 곳으로 달려가지만, 그곳에는 슌과 꼭 닮은 그의 동생 신만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무장한 사람들의 위협으로 아스나는 신과 함께 지하 세계의 입구까지 도착하게 되고,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추격해 온 모리사키와 함께 지하세계 아가르타로 들어가게 된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그곳을 향해 계획에 없던 여행을 떠나게 된 아스나 일행. 그 여행의 끝에서 그들은 뭘 만나게 됐을까. 

 

 


 

 

2. 감상평 。。。。。。。                  

 

     이번 주 기준으로 전국에서 딱 세 번만 상영하는 영화.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건국대학교 안에 있는 KU 시네마테크로 향했다. 일곱 번 영화를 보면 한 번은 무료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멋진 서비스에 혹했지만, 주로 독립영화를 개봉하는 이곳을, 한국에 있는 동안 내가 몇 번이나 찾게 될까 싶은 생각도 약간...;; 하지만 뭐 1년 뒤 내가 어디에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아무튼 꽤나 기대감을 가지고 보러 간 영화였다. ‘마루 밑 아리에티’ 이후로 처음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으니까.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뭔가 느껴졌다고 달아 놓은 댓글들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잘 만들어진 영화 같지는 않았다. 영화는 누구를 위로하는 것도, 그렇다고 희망을 주거나 교훈을 하고 있지도 않다. 물론 ‘뭔가’를 느낀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 -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전원적 분위기나,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정서 같은 -로부터 종종 가슴 뭉클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그게 어떤 거냐고 물으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만큼 영화는 두루뭉술한 뭔가에 기대있다.

 

 


↑ 이 분이 그 중 가장 선명한 행동을 보여주는 모리사키 선생

 

 

     말 그대로 영화에서 분명하거나 선명한 것이 많지 않다. 오직 죽은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십 수 년 동안 아크 엔젤이라는 기관에서 일하며 때를 노려왔던 모리사키를 제외하면 어떤 인물도 그들의 행동에 분명한 동인이 보이지 않는다. 아, 이유는 있지만 왜 그렇게 필사적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주인공인 아스나가 왜 그렇게 맹목적으로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부터가 분명치 않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슌에 대한 애틋함 때문인지.. 쉽게 말해 뭔가 이야기는 들었는데, 기억할 수 있는 줄거리가 없지 장면들만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지루한 건 아니다. 두 시간 정도 되는 영화는 뭔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계속 진행된다. 문제는 궁금증에 대해 답이 부족하다는 거지 다른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나름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또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든다.(영화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잔뜩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뭘 이해하긴 했는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는 아직 약간 부족한 느낌이다. 이 정도 판타지를 써 낸 작가들은 여전히 많다. 딱히 나쁘다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추천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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