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가득해서 프로야구까지 취소되었던 날.

근데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건

저 앞에 걸어가며 담배펴대며 사방으로 연기를 뿜는 아저씨.

 

특히 아침부터 그런 길빵족들 만나면....

남들에게 피해 주면서도 그냥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야고보를 찾아서 - 신약성경이 숨긴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줄거리 。。。。。。。

     책은 사도행전 5장의 한 재판으로 시작한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여기서 만약 사도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대로 풀려났을 리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신이 아닌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고 주장했을 분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면 예수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어디서 왔는가? 작가는 이 신앙이 철저히 바울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과감한(하지만 낡고 확실한 근거는 없는) 주장을 한다. 갈라디아서에 나온 할례 논쟁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은 사도들과 전혀 상관이 없이 직접 신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주장하려 했고, 그렇게 자신의 신학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사도들을 철저히 깎아내리려 했다고, 아니 그게 갈라디아서를 쓴 목적이라고까지 중하니 말 다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가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을 에비온주의로 단정 짓는 무모함마저 보인다.

 

     ​이후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리기 위한 요한복음의 무리수(?)와 성만찬 전례 속 예수의 발언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그를 신성화하기 위해 나중에 쓴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세례 요한이 예수의 정치적 동지, 혹은 선배였고, 요셉은 반로마 혁명가였으며 마리아는 요셉의 동생과 계대결혼을 했고, 그래서 예수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야고보는 실은 마리아와 요셉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내용 등이 뒤로 이어진다.

 

 

2. 감상평 。。。。。。。

     이 작가가 쓴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세 권을 인상 깊게 봤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비판했지만, 나름 고민과 독서를 충분히 해서 쓴 책이라고 느꼈다. 특히 시리즈 두 번째 책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는 아주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낸 작가는 이제 거의 댄 브라운 식의 팩션작가가 다 되어버린 것 같다.

 

 

     작가의 첫 번째 주장부터 생각해 보자. 그는 제자들이 산헤드린에서 풀려났다는 이유로 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그저 정치적 메시아로 주장했다는 것) 사도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변호했던 가말리엘이 예로든 인물들이 정치적 투쟁을 벌였던 이들이라는 점도 한 근거로 사용된다.

 

     ​우선 이 주장은 사도행전의 기록 중 상당부분을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고 해야 하는 문제를 가진다.(이게 문제인 이유는 저자의 주장의 바탕이 사도행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진짜이고, 어떤 것은 거짓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사도행전의 주장대로는 정말 말이 안 되는 걸까? 사도행전에 따르면 본문의 재판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이미 그 소문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꽤 퍼져나갔음을 전제한다. 사도들이 풀려난 것은 그들이 백성들의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거나(5:26), 본문에 실려 있지 않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작가는 갈라디아서의 일부 기록을 전적으로 임의로 재구성해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마치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훗날의 에비온주의자들(에비온주의는 초기 기독교회 공동체로부터 일찌감치 이단으로 정죄된 일파다)과 같았다는 과감한 주장까지 나아가는데, 안타깝게도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는 않는다.(당연하다. 그런 자료는 애초부터 없으니까) 이 둘의 유사점이란 모두 유대 지역에 있었다는 것뿐인데, 이건 뭐 박근혜와 문재인이 같은 집무실을 사용했으니 둘이 같은 주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요한복음의 유월절 예비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 날짜가 금요일로, 요한복음은 목요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예비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스케우에]는 그냥 금요일이라는 의미도 있다.(현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금요일로 사용된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기록을 유월절 기간의 금요일로 해석했다면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감춘 것따위는 존재할 자리가 사라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을 기정사실로 단정 짓고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예컨대 103페이지에서 작가는 나는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가 요한복음에서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서의 기록 상당 부분을 거짓이나 조작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냥 저자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뿐이다. 요셉의 반란군설이나 마리아의 계대결혼설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내가 이해가 안 되니 마태복음의 저자도 이해가 됐을 리 없다는 어이없는 주장까지 나온다.(215) 그냥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법적,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좀 더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의 창시자라는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미 이런 주장은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고, 지금까지 확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도그마에 재갈이 물렸다고 비아냥거리는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가볍게 동조하며 날뛰지 않는 무게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착각한 듯하다. 작가 자신은 뭔가 대단한 비밀을 풀어냈다고 자신만만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애초부터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책 서문에서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이 대단한 사실로 인해 기성교회나 신자들로부터 뭔가 대단한 핍박이나 공격이라도 받을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다. 일종의 순교자 프레임을 짜고 있는 것.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옥성호라는 인물은 옥한흠이라는 거대한 후견인과 분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옥한흠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처음부터 이런저런 책들을 써 낼 수 있었을까? 요컨대 그는 처음부터 핍박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물의 배경 아래서 편하게 책을 써 왔던 인물이다. 이제 와서 순교자, 핍박받는 사람 이미지를 내세우는 건 좀 낯간지럽다.

 

     얼마든지 이보다 더 한 책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다만 겨우 이 정도의 내용으로 뭘 주장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 페이크 다큐 같은 건가? 작가는 이제 완전히 전업 작가로 나서려나 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8-04-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레발.ㅋㅋ
옥한음이 아니라 흠인데...

이책에 대한 평점이 높긴한데
노란가방님 리뷰도 일리는 있어보이네요.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도 없지는 않겠죠?
그래도 그 나이에 적지않은 책을 낸 걸 보면
나름 꽤 똑똑한 사람인 것 같긴한데
전 <서초 교회 잔혹사> 읽으면서 은근 걱정되더라구요.
아버님이 말년에 아들 목사되길 많이 바라셨다고 하던데
아버지와 다른 길을 길을 갈거라서 그런 순교자 프레임의 설레발이
필요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뭐하며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술 활동만 하고 있을까요?

노란가방 2018-04-07 15:31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이름이 틀렸..ㅋ
(어제 늦은 시간에 막 휘갈겨 쓴 글이라 체크를 못했네요. 감사)
아무래도 그쪽 교회 일이라면 저보다 스텔라님이 더 잘 아실..

저도 가끔 알라딘에서 이름을 발견할 때나 접하곤 했는데
계속 책을 내고는 있는 것 같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똑똑한 건 분명한데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느낌도 들고 그러네요.
 

 

 

3월에도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줄거리 。。。。。。。

     강 허리를 막아 만든 댐과 호수, 그리고 그 안에 수몰된 마을이라는 뭔가 묘한 느낌을 주는 배경 위에서 벌어진 사건.

     댐의 새 관리팀장으로 부임하게 된 최현수(류승룡)는 사택을 보고 오라는 아내의 성화에 쫓기듯 마을로 향한다. 그러나 한 밤중, 그것도 안개가 잔뜩 낀 초행길에서 그는 큰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날 밤 딸 세령을 쫓아 밖으로 나갔던 오영제(장동건). 지독한 지배욕의 화신 같은 그에게, 집을 나간 아내와 그런 아내를 꼭 닮은 딸의 존재는 늘 화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집을 뛰쳐나간 어린 딸이 죽은 채로 돌아오자 그의 분노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서서히 조여들어오는 오영제의 수사망, 격렬한 그 날 밤, 그리고 7년 후까지 이어지는 그 날의 그림자.

 

 


 

2. 감상평 。。。。 。。。

     원작이 있는 작품을 다시 선택하는 데에는 어떤 심리가 담겨 있는 걸까. 원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다시 접하고 싶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익숙함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원작이 마음에 드는 경우일 것이다.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반복해서 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영화를 예매한 걸까. 마침 시간이 맞기도 했지만, 거의 비슷한 시간에 다른 영화도 있었다. 아마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을 때, 무의식적으로 익숙함에 표를 주었던 게 아닐까 싶었지만, 정작 영화관에 들어가고 나서야 앞서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오르고 말았다. 시종 일관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으스스함에, 찜찜한 결말, 그리고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등장인물들...

 

 

     사실 소설은 꽤나 몰입도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소설 속 묘사가 그림처럼 떠오르면서 상상하게 만들었고, 다음 장면은 무엇일지, 무엇보다 결말이 어떻게 맺어질지 궁금함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배경을 만들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하는 작가의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다만 문제는 역시, 작품을 보면서 좀처럼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 사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영제와 최현수 모두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괴물 같은 인물들이었다.

 

     ​원작에서 현수는 자신이 술만 마시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많은 핑계를 대며 술자리를 피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아내를 이유로 음주운전에 나서 어린 생명을 살해한 현수는 누가 뭐래도 변호의 여지가 없다. (사실 소설에서는 질리도록 현수를 몰아세우는 아내를 묘사하는 장면도 적지 않은데, 영화에서는 거의 삭제되어 문정희는 특별출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아들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그가 저지른 범죄는 최악이다.

     한편 사이코패스의 전형처럼 등장하는 오영제도 당연히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비록 딸을 잃었지만, 그의 이런 성격 때문에 순수한 부성애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들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소유욕, 지배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을 뿐으로만 보일 뿐이니까.

 

     ​그러면 영화는 우직함을 넘어 미련할 정도로 자기 제어가 안 되는 두 사람이 벌이는 끔찍한 사건, 사고를 그리고 있다고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오영제든, 최현수든 괴물이긴 마찬가지였고, 한 쪽이 얼굴에 웃음을 띤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평가도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은 역시 장동건이라는 배우. 사실 대사나 음성은 좀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어필해 냈다. , 물안개 가득한 호수와 수몰된 마을 같은 분위기를 잘 만들어 내긴 했다. 하지만 소설의 복잡한 구성을 충분히 살려내지는 못한 것 같고, 여기엔 몇몇 인물들(위에서 언급한 현수의 아내를 포함해서)의 행동과 그 여파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이유가 커 보인다.

     비주얼과 분위기에는 신경을 많이 썼지만, 이야기의 짜임새에 충분히 힘을 기울이지 못한 영화. 영화관을 나오면서 든 생각은, 원작이 있는 작품은, 그리고 그 원작을 이미 읽어본 경우라면 좀 더 신중하게 볼지 결정해야겠다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4-03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낙원 서문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1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존 밀턴이 쓴 장편 서사시 실낙원을 읽기 위한 일종의 예비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1~9)에서는 서사시라는 장르에 관해 길게 설명하면서, 이런 장르의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루이스의 시대에도 이런 종류의 장편 서사시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던 덕분인지, 루이스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차근차근 특유의 분석을 시도한다.

 

     후반부는 몇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실낙원 본문을 직접 인용하면서 설명한다. 밀턴에게 영향을 주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해서,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신학적 요소들, 일부의 우려들(밀턴의 작품 안에 이단성이 있다는)에 대한 답변 등이 소개 된다.

 

 

2. 감상평 。。。。。。。

     “실낙원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 같은 독자에게도 (그 책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 시라는 장르, 그것도 장편 서사시라는 장르가 워낙에 어렵게 다가오곤 했기에 실낙원 같은 작품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규칙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 , 고전적인 작품들의 경우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알지 못하는 선이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고.

 

     다른 영역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실낙원 같은 종류의 작품들은 아는 만큼 더 많은 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개 해설서들은 따분하고, 지루하고, 해설서를 위한 해설이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경우도 많아서 생각만큼 큰 도움이 되지 않곤 한다. 또 국내에는 이런 종류의 인문학적 연구가 많지 않은 터라, 선택의 여지 자체가 별로 없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루이스의 이 책은 실낙원을 읽기 전, 혹은 읽은 후 좀 더 깊은 이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꼭 실낙원이 아니라도 비슷한 종류의 다른 장편 서사시들을 읽는데도 유익을 주지 않을까 싶고. 오독(혹은 문학비평에서의 실험”)과 함께 영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