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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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라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시작된 지는 수십 년 이상이 되었다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 이 명칭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인 듯하다. 처음 간략히 그 이름과 개념을 들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성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했고, 단순히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라는 건 잠깐만 생각해봐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언론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사고와 행동들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지 충분한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 것을 넘어(예컨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여성해방의 대단한 증거인 양 생각하며 강요하는 것이나 소위 미러링이라는 행태의 옹호 같은), 상당수의 주장들이 증오와 혐오 같은 파괴적 감정에 매어있는 듯했기 때문이다.(단순히 허세나 허언증에 근거한 거짓말 같은 건 그냥 넘어가자)

     물론 어떤페미니스트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해서 모든 페미니스트가 욕을 먹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라는 식의 사고는 가능한 하지 않으려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발전 양상, 다양한 페미니즘 내의 조류 가운데 최근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은 어디쯤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발전적 극복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제안까지 실려 있다.

 

 

     저자가 꼽고 있는 현재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분리주의 페미니즘,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것이 (남성 일반에 대한) 혐오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소위 미러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남성을 조롱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를 당당히 표현하고, 이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정도로 변호하는 일련의 행위는 분명 비논리적이다. 어떤 남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이 때 부당한 대우는 꼭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모든 남성을 공격한다는 논리는, 내가 새똥을 머리에 맞았으니 지구상의 모든 새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황당한 생각과 비슷하다. 우선은 주장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최소한의 비례성이나 대칭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여성의 피해자와, 그리고 모든 남성의 (잠재적) 가해자화, 문화적 검열, 남녀의 분리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1970년대 미국의 극단주의적(그리고 백인 여성 중심적) 페미니즘을 그대로 수입한 후 별다른 발전 없이 교조주의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명 서로 상황이 다르고,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50년 전 이해(대표적으로 이미 사실상 희미해진 가부장제 철폐 구호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

 

     단지 일부의 문제인 줄 알았던 것들이 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확실히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애초에 건강하지 못한 세계관 위에 세워진 구호와 행동들은 태생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 여성들만을 위한 세계나 여성우월주의, 여성이 하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라는 관점은 엉터리 판타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이끌고 있는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간다. 우선 다양한 여성할당제도를 통해 권력에 손쉽게 진출하려는 명망가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예컨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가 되면 여야 정당의 비례대표를 통해 거의 당연하다시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현재의 구조를 그다지 바꿀 이유가 없다. ,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과 강연을 통해 수익을 얻는 직업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갈등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정작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대다수 여성들의 상황의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남성을 적으로 돌리고 증오와 혐오를 통해 자기들끼리 킥킥대는 행동이 도움이 필요한 어린 미혼모의 지원이나 가난한 여성 노인문제,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특히 이 부분은 애초에 페미니즘 운동의 목적이기도 했다)에 어떤 도움을 제공해왔는가?

 

     저자는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적이 아니라 함께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관계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식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주장이 반가워지는 현실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문장들은 쉽게 읽힌다. 가능하면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쉽게, 문제가 되는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보인다. 다만 비슷한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되는 경향이 있고, 문제가 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조금은 추상적이고 구호에 그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이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페미니즘 사상에 깊이 물든 젊은 여성들 대다수가 대학 교육 혜택을 받으며 과거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급진 페미니즘이 성장할 자양분이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은 상대적 박탈감을 제어하지 못한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이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쉽게 빠져들었다. - P6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려면 메갈리아식 극혐은 지탄받아야 한다. 일베가 비난받듯 메갈리아도 비난받아야 한다. 메갈리아가 일베의 혐오에 미러링으로 되돌려줬다 해서 좌파 진영이 메갈리안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부추김은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 혐오를 넘어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 P21

상층부 엘리트 지식인들이 남성 혐오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데 대한 피해 계층은 이른바 수많은 이름 없는 흙수저 남성들이다. 또한, 급진적 페미니즘 전성시대의 피해 계층은 주로 흙수저 여성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약자층으로 남성 혐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먼저 희생양이 된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성 권력에 주목하면 할수록 보통 여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 P60

대다수 여성들의 삶을 위한 제도 개선과는 거리가 먼 여성단체 상층부 인사들의 의회 입성 관문으로 전락한 것이 여성 할당제다. 여성이 정치권의 소수이고 사회적 약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성 할당제를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이 남성 역차별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다. - P171

여자 대학생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보호막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해주리라는 착각을 한다. 여성단체가 압력을 넣어 갖가지 여성 전용 제도를 만들어주면 여기에 환호한다. 페미니즘이란 이렇듯 여성들을 사회적 약자, 신체적 약자라는 틀 속에 가두어버린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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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주류 대중 예술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이해하고 비평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식은

분별력과 적극적인 해석 능력이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해석 공동체라 부른다.

- 윌리엄 로마노프스키, 『맥주, 타이타닉,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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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 [책] 미래의 건축 100

6일 - [영화] 생일

6일 - [책] 폐기된 이미지

7일 - [책] 누구나 프로 컨설턴트가 될 수 있다

13일 - [책]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15일 - [책]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16일 - [영화] 한강에게

17일 - [책] 순전한 기독교

19일 - [책] 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 읽기

21일 - [책] 28

25일 - [영화] 어벤져스: 엔드 게임

26일 - [책] 평등은 없다

28일 - [책] 제국과 천국



올해는 예년에 비해 영화보다 책에 집중..

아.. 책방 주인이니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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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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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언젠가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그 평등의 당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저자도 지적하듯,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실현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타인들이 가진 것에 기초해 자신의 요구를 계산하는 데 더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동안(우리의 시선이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만 맞춰져 있는 동안), 정작 자신의 진정한 꿈이나 목표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92-93). 결국 이런 차원에서 경제적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자기) 소외를 초래한다(22).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소수의 상류층이 국가 전체의 부에서 자신이 잘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는 점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일종의 경제적 과식이라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15). 물론 경제적 불평등은 가능한 극복되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경제적 평등이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여러 종류의 불의한 불평등을(예컨대 미국의 선거제도는 돈이 많은 이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입법, 사업, 행정적 감시를 통해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8).

 

      다만 문제의 본질은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어떤 이들이 겪고 있는 불충분함에 있다. 우리는 왜 극빈층의 삶을 보며 마음이 괴로워질까? 그들이 생존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원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적 양의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질의 결여다. 가난한 사람들이 나보다 경제적 자원을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48-49).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역효과를 가져온다. 예건대 생존하는 데 5단위의 자원이 필요한 사람이 열 명이 있는데 자원의 총합은 40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게 4단위씩을 분배받아 다 함께 죽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까?(물론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누가 희생해야 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질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평등에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 없고 불평등에만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평등에도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 사람의 사정이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차등적 분배는 존중(그 한 사람에게 맞는대우이기 때문에)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평등주의에 도덕적 당위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생존에) 충분한경제적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

 

 

2. 감상평 。。。。。。。

     흔히 자유와 함께 핵심적인 가치로서 평등을 꼽곤 한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에 일종의 도덕적 당위를 부여하려고도 한다. 물론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볼만한 여지가 있다. 깨끗한 식수가 없어 더러운 웅덩이의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의 병약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 들지 않던가.

 

      하지만 이 책은 그 정서의 영역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한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그들이 평등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충분한 수준의 경제적 자원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적은 경제적 자원을 갖는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수준의 분노나 죄책감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관건은 충분성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평등의 추구가 일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평등 자체를 절대적으로 달성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고 집착할 경우 부작용이 적지 않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평등주의는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데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적 소요는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나아가 이와 관련된 정치적 다툼까지...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도구적 가치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을 허물어 구덩이를 메운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애초에 만족도와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똑같이만들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런 평등주의에 대한 몰입이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 다양한 사회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이 경제와 각종 문화, 역사의 영역에까지 절대적인 원리인 양 통용되는 것처럼(이건 마치 암석을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고양이의 습성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는 건 타당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생각이다(단일작물재배는 하나의 병충해에 의해 전멸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기여한 공로와 관계없는 평등한 보상은 감정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다(친일파와 독립운동가에게는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자원을 임의로 분배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누리고 남을 만큼 충분한 자원이 존재해서 똑같이 나누더라도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기계적 평등의 강요는 오히려 더 시급한 문제를 가릴 수 있다는 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과도한 이상주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주제를 존중과 연결시키는 지점도 흥미롭다. 경제적 정의는 개개인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여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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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9-05-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평등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노란가방 2019-05-13 13:14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하면서 읽어볼 만한 책인 듯 합니다.
 

 

1. 감상평 。。。。。。。

     타노스의 인피니트 스톤 사용으로 인류의 절반이 사라는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 후, 남은 이들은 극심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등장한(돌아온) 앤트맨. 과거 단독영화(앤트맨과 와스프) 말미에 살짝 등장했던 양자 얽힘 현상으로 인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들고 나와 문제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던진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미 이런저런 경로로 예측되었던 내용이다)

     그 작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남은 히어로들. 타노스보다 먼저 스톤을 모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2. 감상평 。。。。 。。。

 

     ​영화의 시작부분은 처참하다. 야구장은 버려졌고,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었던 것은 영화가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인구의 절반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장 경제적으로 엄청난 후퇴가 일어남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공을 들여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보존하려고 애쓴다.(여기에 또 얼마나 많은 행정력이 들어갔을까)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명일지도 모르겠다. 9.11 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가 만들어지고, 건국 후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그들을 도운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야드바쉠이 세워졌던 것처럼, 영화 속 생존자들은 공원을 만들고 수백 개의 기념석을 세운다.

 

     ​잊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큰 사고나 고통, 상처를 치료하면서 상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를 목표로 달려가려고 한다. 이건 신체적인 상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에도 마찬가지여서, 생존자들에게 끊임없이 잊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한 구석의 추모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마저 조롱받는 게 현실이다. 과연 그렇게 상처를 덮고, 잊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일일까?

     영화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제법 중요하게 다룬다. 타노스는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남은 절반은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을 하고 있는 한, 타노스가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망각이 아닌 기억이 죽음으로부터(‘타노스라는 이름과 그가 행한 일은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을 지탱시켜준다. 남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싸울 수 있었고, 그 기억은 포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모든 것을 지우려는 이와 기억하려는 이들 사이의 싸움은 결국 기억하는 이들의 승리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도 있었지만(이 역시 매우 중요한 전통적 주제다), 그들 역시 남은 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사실 뭔가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일이 일어나려면, 타노스의 한탄처럼, 정말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야 할 것이고. 망각을 강요하는 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버려야 하는 딜레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지우려 하기 보다는, 잘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영화 자체는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전편에서 벌여놓은 판이 썩 자연스럽게 수습되지 못한 느낌이다), 시리즈 자체로도 한 세대의 은퇴를 기억하는 괜찮은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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