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 킹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 동화책으로 본 기억이 있다. 얼마 전 봤던 알라딘처럼, 실사화로 돌아온 라이온 킹 역시 추억을 자극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사실 처음 애니메이션이 나온 이후에도 CDDVD로도 워낙에 많이 팔리긴 했지만, 계산을 해 보면 첫 애니가 나왔을 때 어린 아이였던 이들이 이제는 최소 30대는 되었을 테니 딱 구매력이 좋을 나이에 맞췄다고도 볼 수 있을 듯. (너무 상업적 계산인가)

 

     ​실사화라고는 하지만 사자 이야기가 주인지라, 정말로 실사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 대신 컴퓨터를 이용한 그래픽 작업이 엄청나게 투입되었다. 많은 부분(특히 색감!)이 보정되기는 했지만, 언뜻 정말로 자연관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으니까. 사자들의 소굴로 정해진 바위굴부터, 거대한 들소무리가 돌진하는 협곡, 심바가 도망쳐간 정글 속 낙원까지 실감나는 배경 묘사도 훌륭했다.

 

 

 

 

     영화 초반을 보면서 같은 사자가 중심인물(‘인물맞나?)로 등장하는 나니아 연대기가 떠올랐다. 특히 심바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언하는 의식에 초원의 여러 동물들이 나와 둘러서서 고개를 숙이거나 환호하는 모습은, 아슬란이 노래로 세상을 창조하자 말하는 동물들이 이를 둘러섰던 마법사의 조카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울러 표범과 가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뻐하는 모습은 성경 속 한 구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 116)

 

      온통 분열되고, 험한 말과 보복, 치졸한 비아냥거림과 혐오만 보이는 뉴스 속 세상과는 사뭇 다른, 원초적인 평화와 조화의 나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소위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종간의 평화는커녕 같은 인간들 가운데서도 성별과 피부색과 국적을 이유로 다투고, 아니 같은 국적 안에서도 지역과 사상에 따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상황이니...

 

 

 

 

     ​영화 속 주제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무파사의 가르침과, 한 번 가면 그만이라는 시몬과 품바의 인생관의 대립이다. 사실 직선적 시간관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특징이지만, 영화 속의 개념은 그보다는 유물론적 관점과 좀 더 유사해 보인다.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영화는 그런 허무주의를 부정하고, 생태주의적 순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이 세계관은 딱히 힘이 없기에 (우리는 거대한 순환의 일부분일 뿐인데, 애써서 무엇을 해야 하나?) 심바를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만드는 추동력은 아버지의 메시지, 또는 자신의 자리를 찾겠다는 욕구 등이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애초에 자연의 순환까지 꺼냈던 말이 약간 무안해진다. 심바의 투쟁은 과연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위한 것이었는가?(애초에 초식동물들을 다 잡아먹거나 쫓아내면, 초원이 황폐화되기는 하는 건가?)

 

 

 

 

 

     ​문득 영화의 주제와 영화 속 유명한 노래들이 서로 잘 어울렸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티몬과 품바가 나와 부르는 신나는 노래는 사실 현실도피를 부추기는 내용이고, 영화 초반 심바의 일탈(?)을 노래한 노래도 마찬가지. 엄청나게 감동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가사들이 약간 깬다는 느낌. 역시 추억은 약간 막연한 낭만으로 남아있었어야 하나...

 

     ​물론 이런 아쉬운 점들은 압도적인 비주얼에 거의 가려있다. 그냥 영상미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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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작은 조각들,

즉 신학적인 조각, 도덕적인 조각, 역사 비평적인 조각,

설교 조각, 경건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인 것처럼 읽는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단편적으로 읽는 것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삶을 형성해 가고자 하는

신적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 공동체는 어떤 이야기를 토대로 삶을 영위해 간다.

그 이야기는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배경이 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삶의 틀을 세워 준다.

경을 조각내는 일이 위험한 이유는,

그렇게 되면 다른 이야기가 우리 문화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고,

우리 삶은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고힌,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성경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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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단순하다. 전편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1편은 봤는데 2편은 보지 못했다) 존 윅이 규칙을 어겼다며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죽이려는 연합회와, 연합회의 지시에 따라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조무래기 킬러들, 그리고 초반엔 조금 맞더라도 결국은 적들을 해치우는 존 윅

 

     ​영화의 부제에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어 뭔가 대단한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싶었지만, 존 윅의 시그니쳐는 혼자서 엄청나게 많은 적을 격투를 섞어가며 해치운다는 건데 부대로 싸우는 건 어울리지가 않는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 뭐 액션영화에서 줄거리가 단순한 거야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1편을 봤을 때는 그냥 키아누 리브스의 노익장이 주로 눈에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영화 속 세계관에 짙게 배어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들이 보인다. 우선 정신없이 전환되는 영화 속 배경은 뉴욕의 뒷골목부터 마피아 소굴, 북아프리카의 저택을 넘어 사막의 유력한 부족장의 집에 이른다. 여기에 그를 쫓는 수많은 킬러들의 국적과 성격들도 주목해 볼만 한데, 존 윅과 그나마 여러 합을 겨루며 제법 싸웠던 이들은 한결같이 아시아인들(동남아시아 콤비와 일본 칼잡이)이다

 

     ​물론 이걸 단지 코스모폴리탄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분해(해체)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재구성을 해낸다. 실제 세계에서는 거의 연결되지 않을 이야기를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지역들은 주변부와 고립된 섬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대도시인 뉴욕에서 총싸움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도 간여하지 않고, 경찰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속 이미지가 들어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예컨대 존 윅이 콘티네탈호텔의 계단에 손을 올리자마자 그를 죽이려는 일체의 행위는 중단되어야만 한다. 이는 레위기의 도피성제도나 성전의 제단 뿔을 잡은 사람을 처형할 수 없다다는 성경 속 규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그런 상징은 철저하게 원 문맥에서 분리된 채, 트리애 매달린 다양한 장식 중 하나처럼 작용될 뿐이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해체해서 만들어낸 세상은 오직 힘만이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목적에서인지, 어떤 사정 가운데서 벌어진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엄청나게 큰 힘을 가진 기관의 명령에 순종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구성된 사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거대담론이 해체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그저 목소리가 큰 쪽이 우세를 잡을 뿐, 그 이상은 없으니까.

 

     ​당장은 현실을 좀 다른 식으로 재구성 혹은 재규정하는 것이 스스로를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존재처럼 비춰주니 신선한 즐거움을 주겠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다시 만들어진 현실 또한 같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거나 더 악화되기만 한다는 것. 현실을 급격히 파괴하는 다양한 가상의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폭력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나저나.. 솔직히 이제 이런 액션은 좀 무리인 나이가 아니신지... 배우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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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하나님 - 그리스도인, 어떻게 권력을 향해 진리를 외칠 것인가
톰 라이트 지음, 안시열 옮김 / IVP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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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세속주의자들은 종교라는 것이 곧 사라져서, 공룡처럼 화석으로나 남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흔적을 박물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들은 이런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와 그 비슷한 것들이 앉을 자리를 치워버리기 시작했다. 종교는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 신념의 문제이니,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감추라는 명시적, 암묵적 지시가 내려졌다.

      물론 채 우리는 반백년이 지나기 전에 그들의 과장된 예측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종교인구는 줄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출생을 통해 무슬림이 되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기독교 인구도 증가추세다. 이 책에 따르면 심지어 (기독교는 이제 끝물도 지났다고 여기는) 영국과 같은 곳에서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 국지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설명하는데 과연 종교를 빼버리는 것이 가능할까? 9.11 테러와 같은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재정을 어떤 영역에 써야 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부터 교육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방식을 어떤 식으로 정할지 같은 영역은 분명 종교와 철학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대사회는 오랫동안 철학의 부재 상태에 놓여 있었고(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에 기초해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성격 자체가 자기부정적인 철학인지라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각은 혼란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선 이 공공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데 힘을 쓴다.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주고받았던 그분의 나라대화 속에서, 유대인들의 나라 개념에서, 그리고 창조신학에서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왕이시기도 했다. 예수는 그 하나임이 이 세상 깊숙이 들어오셨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저자는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력자들과 정부와 같은 권력기관들에게 진리에 관해 말하는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폭력과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권력과 한 편이 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지자적 야당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교회는 국가의 시녀가 될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서야 한다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떠올랐다.

 

     ​또 이 선포는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드러나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특정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 막말을 내뱉는 식의 저열한 방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성경에서 말하는 행동이던가. 책에도 등장하듯 교회는 그것이 처음부터 행해왔던 이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공감하며 불의한 사회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을 해야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신정정치라는 단어를 곱씹어 볼만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정정치라는 말에서 느끼는 그로테스크한 권력행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고통과 불의함을 온몸으로 감당해 냄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다양한 이유로 오랫동안 교회는 공공의 장에서 한 발, 한 발 물러서왔다. 일부는 역할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티를 필두로 한 다양한 지적, 사상적 공격이 한 몫을 했다), 혹은 (내세에만 집중하는) 잘못된 신학 때문에, 또 그저 무관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이런 후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그분의 통치영역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영역을 그냥 둔다면, 엉뚱한 이들이 교회의 이름을 팔아 그 자지를 차지하려고 나설 것이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그리스도인들도 한 명의 시민으로써 당연히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 임무는 단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일에 투표를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지적 또한 기억해야 둘만 하다. 공적인 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제대로 된 역할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독서시간이었다. 겨우 한 번 가지고는 안 될 것 같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 책 후반부는 문장들이 좀 난해하다. 번역의 문제도 약간 있었던 것 같고, 어쩌면 원문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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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쌤입니다
김화수 지음 / 호밀밭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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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적어낸 에세이집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학원 논술 강사로 일했던 작가는 결혼 후 통영으로 이사를 와 독서모임을 시작 했다. 독서모임을 주로 삼아 작은 공간을 마련한 나에게도 꽤나 와 닿는 경험과 고민들이 실려 있어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어 간다.

 

     독서 모임을 시작하면서 작가가 느꼈던 뿌듯함과 보람에 크게 공감이 됐다. 누군가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C. S. 루이스가 이야기했던,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특별한 연대감이 저절로 솟아난다. 여기에 작가는 독서모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면서, 친절하게도 자신의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쌓은 노하우들을 차분히 풀어놓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식으로 발제 질문을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 확실히 좋은 발제 질문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반갑다.

 

 

​     아쉬운 부분은 이야기의 주제가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사실 책 전체의 구성에서 이 부분은 작은 항들 중 하나일 뿐인데, 작가는 굳이 이 이야기를 길게 늘여서 이어간다. 핵심은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 회원들이 분탕질을 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물론 비판의 대상자들은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남성 일반을 비난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을까

 

     ​책속에는 그가 참여했다는 강의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소개되지 않고 있기에 그의 비판페미니즘에 갇힌 페미니즘에서 벗어나 인간을 봐라이 적절했는지를 판단하기에 어렵다.(심지어 여기서 작가는 그 비판이 담고 있는 역설을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일부러 문자적으로만 읽으며 그를 조롱한다. 그리고 책에는 그 페미니즘 비판을 하는 참여자의 의견에 대한 합리적인 반박이 제시되고 있지도 않다. 물론 작가가 여성들이 겪는 불편은 큰 문제지만 남성들의 불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또 페미니즘 작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다분히 모욕적인 소설을 제시한 그 참여자(143)는 수준 이하의 감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여튼 어떤 생각을 책으로 낼 때는 좀 더 객관성을 갖춰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후반부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글쓰기 모임과 아동 독서 지도요령 부분이다. 글쓰기 모임은 기회가 되면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책읽기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개인의 경험이 다양하듯, 아이들의 성격과 상황 또한 다양하기에, 꼭 여기에 소개되는 원칙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닐 듯.

 

     책 말미에는 작가가 고양이쌤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한, 책방에서 키우는 네 마리 고양이의 소개가 등장한다. 책 제목에도 등장하는 고양이들에 관한 언급이 너무 뒤에서야 대충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 마리 한 마리의 사연과 특징을 세심하게 소개하는 문장들에서 애정이 느껴진다. 다만 책 제목에도 나오는 고양이가 조금 더 내용 전박에 짜여 들어갔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은 냥덕후적인 아쉬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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