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해 제작된 대만 영화. 뭐 이런 장르로는 대만 영화 쪽이 워낙 많이 만들고 또 분위기도 잘 살리는 편인지라 어느 정도 평타는 치겠지 했는데, 기대했던 것만큼의 완성도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개연성 따위는 1도 없는 만화 같은상황을 배경으로, 토닥거리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영 몰입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편하게 보려고 선택했는데 말이지. (요새 네이버에서 주기적으로 영화를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감사.)

 

     성적에 따라서 차별대우를 공식적으로 하는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인물들은 터무니없고, 사고로 갈 데가 없다고 덜컥 다 큰 딸과 함께 친구네 집(이 아닌 저택)에 얹혀살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아빠나(그나마 별다른 일도 안 하는 듯?), 수년을 짝사랑하며 남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예쁜 여주인공이라는 부분도... 사실 처음부터 그냥 만화의 실사판, 판타지성 강한 만화적 설정과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런가보다 할 수 있을지도.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인물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갔던 건,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 캐릭터. 영화의 초반부터 한결같이 여주인공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던 그녀는 조금의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주인공을 보고 있다. 약간의 푼수 캐릭터를 넣어두어서 볼 때마다 웃음이 나게 만들었지만, 가장 순수함이 느껴졌던 인물. 누군가를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듯.

 

     사실 엄청난 빈부격차와 이를 공식화하는 차별적 학교(사회)구조, 외모지상주의 같은 요소들이 범벅이 된 영화이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빈부의 문제를 두고 사람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는 편이다(이 또한 만화 같은 설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의 차별은 성적에 국한되어 있고, 이 부분은 (여주인공이 보여주듯이) 자신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극복할 수 있는 요소였다.(물론 단지 성적이 계급을 나누기에 충분한 요소인가 하는 점은 남지만)

 

     덕분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인상을 찌푸려지게 만들기 보다는, 그저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일종의 경기’, 혹은 게임처럼 느껴진다. 한 리그 안에 강팀과 약팀이 있지만, 약팀이라고 해서 항상 강팀에게 지는 것만은 아니니까. 역전의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판은 훨씬 인간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다만 영화 말미 여주인공은 잠시 모두가 잊고 있던 재력이라는 큰 벽을 살짝 인식한다. 남주인공이 자신보다 더 가문 좋고, 돈도 많고, 미모도 훌륭하며, 남주인공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또 다른 여성 캐릭터와 관계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 부분이 가장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사실 영화가 현실적으로 돌아가려면 여기에서 여주인공은 완전히 마음을 단념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야 했다. 사람은 감정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자신이 상대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 뒤로 물러서는 것도 꼭 비참한 일만은 아닌 거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여주인공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또 그런 용기를 내는 아이가 있다면 열심히 격려하고 싶은 것도 사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너무 좌절하지 않도록.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으니까.

 

 

 

 

     딱히 추천목록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은 영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면야... 주인공들의 우월한 외모 감상 목적이라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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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교회 주보

     내가 전에 속해 있던 교회에서는 매주 주보 1면에 실종아동의 사진과 정보를 넣곤 했다. 매주 1,500여 부를 인쇄했는데 1/3은 교회 안에서 사용했고, 나머지는 전도용으로 배부되었다. 단순히 교회소개만이 아니라 실종아동을 찾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생각이었고, 주일 오전 예배 때는 주보에 실린 실종아동을 위한 기도시간이 꼭 들어 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나름 의미가 있는 부분이었다고 본다.

 

     ​한동안 내가 그 주보를 직접 제작했었는데, 실종아동찾기 란을 채우기 위해서 알아보던 중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실종되는지를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중 절대다수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실종된 아이를 둔 입장에서는 전체 비율이 어떻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일 테니까.

 

 

 

 

#2 - 염전 노예

     몇 년 전 서해의 한 염전에서 정신지체 장애인을 노예처럼, 수십 년 동안 부려먹었던 악덕업자가 붙잡힌 적이 있다. 끔찍했던 것은 몇 번인가 도망쳤지만 섬이라 나갈 수도 없었고, 업주와 한 패인 지역 파출소에서도 도망쳐 나온 사람을 다시 업주에게 돌려보냈다는 점.

     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피해자는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을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이런 시대착오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토양이 되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 그리고 인간 본성의 깊숙한 자리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악이 도사리고 있어서 조금만 물을 주면 금세 삐져나온다는 걸 생각하게 보게 만드는 일이었다.

 

 

 

 

#3 - 이영애

 

     ​솔직히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아직도 아직 여전한 인기를 구가한다는 드라마 대장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영애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오래 전 광고에서 종종 봤던 예쁜 배우 정도의 느낌이었고, 부잣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고상하게 살고 있나보다 정도. 그녀가 나왔던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5년 전에 나왔던 친절한 금자씨였으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이 사람은 배우였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그리고 사실 친절한 금자씨도 상당히 센세이셔널 했던 작품이었는데, 그 안에서 주연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냈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아이를 잃고 온힘을 다해 꿋꿋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몸싸움도 불사하는 어머니 역을 능숙하게 연기해 낸다

 

 

 

 

#4 - 여전히 어딘가에는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매년 2만 명 가까운 아동들이 실종(최근 기준이 18세 미만으로 되었고, 가출 등도 포함된다)되고, 백여 명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비율적으로는 상당히 적지만 그게 부모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사라진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또는 이 영화처럼 범죄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아이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면 하지만...

 

     ​앰버 경고 같은 제도적 정비도 필요하고, 관련 인력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시민 일반의 관심 재고다. 아이들의 얼굴이라는 게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다 비슷비슷해 보이기 마련인지라, (특히 나처럼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더욱)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관심을 갖고 주변의 아이들을 살핀다면 문제가 길어지는 것을 조기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이건 아동학대 같은 다른 범죄에도 마찬가지고.)

     영화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실제로 이런 범죄가 발각되었다고 해도, 솜방망이만 내려치는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그리 무겁지 않은 처벌로 유야무야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때문에 감독은 정연(이영애)의 손에 비공식적 해결책을 들려주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동 대상 범죄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아동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 그게 아이들을 좀 더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취해야 할 자세일 것 같다. 이런 영화가 이를 위한 작은 관심이라도 불러일으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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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으로의 여정 - C. S. 루이스가 안내하는 순례자의 길
박성일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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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S. 루이스의 본업은 영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였다.(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중세와 근세 영문학에 관해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그의 강의는 늘 많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은 루이스를 기독교 변증가, 나아가 신학자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그 자신은 끝끝내 평신도’(그는 성공회 신자였다)라는 단어로 자신을 설명했지만, 그가 한 강연과 출판한 책들은 확실히 이런 면모를 많이 담고 있기는 하다.

 

     이 책은 그런 루이스를 한 명의 신학자로 상정하고 내용을 써 내려간다. 하긴 신학이라는 게 꼭 공식적인 학교에서 배우고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충분한 독서와 사색으로도 갖출 수 있는 자질, 혹은 자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라면 루이스도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하고.

 

 

     우선 저자는 루이스의 사상에 영향을 준 여러 인물들을 열거한다. 그 중에는 조지 맥도널드처럼 루이스가 전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도 있고, 루돌프 오토처럼 일부 사상을 받아들인 인물들, 또 워즈워스처럼 영향을 받았으나 또 한 편으로는 극복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있다

 

     저자는 루이스의 신학의 핵심을 초자연주의와 구원중심주의라고 정리한다. 그는 이를 순전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고 했고, 여기엔 단순히 논문만이 아니라 시와 소설, 강연 등 다양한 수단이 사용되었다. 사실 이렇게 되면 그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서 연구하는 데에는 좀 어려움이 될 수도 있지만, 책은 성실하게 루이스의 신학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가 루이스의 신학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한 구조는 여행이라는 모티브다. 루이스도 그의 작품들에서(예컨대 순례자의 귀향이나 천국과 지옥의 이혼같은) 여행 모티브를 자주 사용했는데, 이를 본 딴 것

 

     가장 먼저는 루이스 작품에서 매우 자주 발견되는 갈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류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는 이를 온전한(또는 충만한, 지고의) 세상을 향한 갈망이라고 말한다. 많은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는 이에 대한 이미지다. 다만 유대인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규칙(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목자 민족이라고 불릴 만하다.

 

     ​마침내 지주의 아들’(순례자의 귀향에 나오는 이미지다)이 직접 나타났을 때, 이미지와 규칙은 그 안에서 통합된다. 그것들이 오랫동안 가리켜왔던 것이 바로 이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 이미지와 규칙이 아들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그것들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루이스는 자연신학의 구원에의 가능성을 낮게 본다.

 

     이제 아들과 함께 오랫동안 갈망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사람들은 완전한 돌이킴이 필요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가 그것. 이는 전인적인 돌이킴으로, 사실상 현재의 자아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죄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결코 선으로 바뀌지 않는다. 문제를 파악하고 완전히 돌아서지 않는 한 그 나라에 이를 가능성은 없다.

 

     우리를 당황시키는 것은 완전히 돌이킨 후에도 그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제 제대로 된 방향으로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지, 아직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그래서 당장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의 고양을 경계했다. 이 길은 멀고 지난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단도 존재한다. 교회가 그렇고, 성경과 기도도 중요한 무기다. 우리는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아 유혹을 이겨내며 여행을 계속 해야만 한다.

 

     루이스의 종말론을 살피는 6장은 가장 흥미로운 장이다. 루이스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천국과 지옥을 그대로 믿었지만, 문제는 성경 자체가 이에 대해 충분히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부분. 하지만 루이스는 제한된 내용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 장에서 저자는 루이스의 개인적 종말론우주적 종말론’,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낸다.

 

 

     C. S. 루이스에 대한 좋은 연구서다. 그의 작품 전반을 살피면서 몇 가지 주요 주제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외국 연구자들의 책들을 여럿 봤지만, 이렇게 루이스의 사상을 조직신학적으로 분석하고 기술해 놓은 책을 우리나라 연구자가 썼다니 자랑스럽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루이스가 초자연주의와 구원중심주의를 기본 축으로 자신의 기독교 사상을 전개했으며, 그 내용이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에 충실하다고 평가를 내린다. 실제로 루이스는 기독교를 단순한 심리상태로 전락시키려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를 매우 강하게 경계했었다. 물론 일부 영역, 예를 들면 성경관 같은 부분에서는 강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저자의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고.(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입장에 공감하다)

 

     책을 다 읽고 난 상황에서 저자가 루이스 신학을 훌륭하게 재구성해냈다는 점은 확실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루이스가 신학자였는가 하는 점은 확신하기 어렵다. 리뷰 초반의 문장과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스에게 신학자적인 면모는 확실히 있었지만, 그는 신학자로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사상을 신학의 틀을 사용해 분석하는 것은 확실히 흥미롭고, 또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틀로만 그의 사고를 다 재단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루이스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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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려서..
전부터 봐두었던 책을 한 권 사들고 왔다.
이제는 절판되어서 살 수 없는,
C. S. 루이스의 작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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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화려한 모임에서 진실이 웃음거리가 되고 

선량한 친구의 이름이 쓰레기 취급당하고 있을 때 

할 말을 찾느라 주변부에서 우물쭈물 망설여본 적이 있는가

운동장에서든, 중역회의실에서든 또는 텔레비전에서든 

설득이나 동료의 압박은 마녀의 어떤 주문보다도 

훨씬 만만찮은 주문을 걸어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물리치다'단어는 신자들의 일상표어가 되어야 한다.

 

- 컬트 브루너, 나니아에서 만난 하나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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