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감성.


     영화를 보면서 문득 비슷한 느낌을 가진 일본 영화들이 떠올랐다그 중에서도 역시 아케우치 유코가 주연을 맡은 지금만나러 갑니다가 가장 먼저였다감정의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이 영화에서도 헌신적으로 가족을 보살피는 캐릭터와 조금은 무뚝뚝한 가장그리고 도시를 벗어난 시골마을의 정서 같은 게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이런 감성은 또 대만영화나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들에서도 종종 보였던 것 같다드라마에 일부 멜로적 요소가 더해지고판타지가 포인트로 더해지는 그런 영화이런 게 동양적 정서에는 제법 많이 와 닿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여기에 가족이라는 요소까지 더해서 아주 제대로 관객을 자극한다각자의 생각으로 대화가 끊어지면서 오해가 큰 담처럼 쌓인 부자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는 영화 종반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그리고 또 하나이 영화의 히든카드 격인 보경의 정체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효율성.


     영화의 배경이 되는 양원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기차역이다경북 봉화의 산골에 있는 두 개의 원곡마을’ 사이에 위치한 역인데영화에 나온 것처럼 기차가 아니면 마을 밖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없었는데도 기차역은 없어서마을 주민들은 먼 산길을 돌아가는 대신 인근 역에서 내려 기찻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제때 피하지 못해 사망하기도 했고.


     그러면 진작 역을 하나 만들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건설비부터 운영비까지 역 하나 운영을 하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그런데 심지어 이 역을 이용하는 인원이 하루에 다섯 명도 안 되는 상황이니 타산이 나오지 않는다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역을 설치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이다결국 영화 속 이야기처럼주민들이 직접 역을 만들고 역명까지 정한 전국 최초의 역이 생겼다고 한다다만 이용자 수가 워낙에 적으니 지금은 관광열차만 운행 중이라는 소식.






     어려운 문제다이동권이라는 건 법률로 규정된 건 아니지만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상황이 이러면 대책을 세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 같다비슷한 부분으로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사회적 과제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데이쪽은 일종의 사회보장혹은 복지 차원에서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방자치단체에서 부담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그런데 기차까지 그렇게 운행을 하는 게 가능할까(비용 측면에서 워낙에 큰 차이가 나니까).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나 부담이 가능할까.

 






배우들의 호연.


     영화를 보며 젊은 여배우 둘이 눈에 띈다걸그룹 출신의 윤아는 제법 이런저런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어느 정도 연기력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고(진짜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팍), 이야기에 색다른 느낌을 주는 보경 역의 이수경은 몇몇 작품에서 꽤나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약간 시골스러운 느낌의 연기에서도 매력을 발휘한다).


     주연인 박정민의 연기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는데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자식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역의 이성민이 잡아주는 무게감도 꼭 필요했다앞서도 언급했지만이 아버지 역의 이성민이 눈물을 삼키며 털어놓는 진심이 마음을 울렸다.


     전반적으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지 않으면서중심이 되는 이야기 몇 개를 잘 조화시켰다는 느낌뻥뻥 터뜨리는 영화도 좋지만가끔은 이런 영화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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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 C. S. 루이스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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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 (재정가 특별판)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묵직한 책이다제목인 알라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가볍지 않게 다가올 텐데부제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는 이 의심과 불안을 좀 더 강화시킬지도 모르겠다책을 좀 더 읽어 나가다보면더 이상 피할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정말로 저자인 미로슬라프는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일 가능성을매우 진지하게그리고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가 왜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를 알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화해’, 또는 평화이다그러니까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복된 상태를 누릴 것인가가 아니라오랫동안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온 두 종교가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애초의 목적이 이런 것이었다면굳이 이 책의 작업그러니까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역설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두 종교의 신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에는 무엇보다 이웃사랑이 중요한 덕목으로 명령되고 있으니 말이다문제는 신앙인들이 그들의 경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따르지도 않는다는 점이지두 신앙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적대하는가가 아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보자그러면 저자는 어떤 식으로 이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려 할까유일신 종교라고는 하지만삼위일체라는 개념은 두 종교의 신관에서 결정적인 차이로 보인다실제로 이슬람교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우상숭배로 평가되기까지 하니까.


     저자는 몇 가지로 이를 완화시키려 하는데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기독교인들 역시 무슬림들이 비판하는 식의 삼위일체 이해를 문제로 여긴다는 부분이다무슬림들이 삼위일체를 불편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이 세 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정통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지, ‘세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삼위일체란 한 분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식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그림일 뿐이다.


     물론 이 주장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포인트에서 상당한 정도의 의견일치를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른다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좀 더 단순한 해결책(기독교의 설명은 틀렸고자신들은 옳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측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비슷하다는 부분도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신은 오직 한 분이시고창조주이시며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이다그분은 선하고자비로우시며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이렇게 비슷한 존재는 서로 같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 문제는 단순한 유비의 차원은 아니고제시된 신의 속성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오직 한 분인 신을 믿는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신을 믿는 게 아닌가같은 논리가 만들어지지 않고오히려 만드신 분을 믿을 때도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저자의 결론보다 좀 더 쉬운 해설이 존재한다양측이 같은 신을 섬기지만 한 쪽이 왜곡된 형태로 섬기고 있다는 결론이다사실 이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해법이기도 한데그 방향을 바꿔도 마찬가지로 통할 수 있다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결국 서로 간의 반복은 좀 더 심해질 뿐이건 평화라는 애초의 저자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

 


     때문에 저자는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은근하게 제시한다같은 신을 양측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된(혹은 제한된형태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사실 이 부분은 직접 표현된 건 아니지만신에 대해 우리가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불가해성혹은 신앙의 신비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암시적으로 제안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이해가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없으니까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 볼 필요가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다만 신앙이라는 게 그렇게 논의를 위한 중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실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무시한 채몇몇 신학자들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한계.


     결국 저자의 논의는 사랑의 요구라는 윤리적 차원과 공공선에 대한 호소로 넘어가는데사실 평화를 위한 논의라면 이런 차원도 나쁘지는 않다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신을 섬긴다면서 상대를 파괴하려고 하는 일에 나서는 건 무엇보다 자기 신앙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겠는가다만 책의 결론부로서는 조금 약한 느낌도 들고.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말해보자저자는 삼위일체 문제를 신의 불가해성신비라는 측면으로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문제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그런 식의 조화 가능성 자체를 무산시키는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그들은 삼위의 이위인 성자예수를 단순한 선지자들 중 한 명(물론 꽤 존경심을 담아서)으로 설명한다애초에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건데이 문제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정교하게 분리해 사고하는 고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까?


     또물론 의도적으로 저자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지만과연 신앙을 다루면서 이 부분을 빼놓을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를 빼버린다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양 종교의 신자들 대부분이 저자가 제안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본다그러나 이건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지그 목적 자체는 충분히 공감하고응원하고 싶다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료로서 우애를 쌓을 수도협력할 수도 있다다만 우리 사이에 높이 쌓인 혐오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데는 문자보다는 영의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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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10-04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평화에 집중해서 이 주제를 연구했다는 게 볼프스럽네요.
이 주제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인데, 늘 구원의 문제에서 사고가 딱 막힙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은 있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반대의 주장은 종교간 대화를 어렵게 하고요.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간 통합을 이루랴는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볼프가 삼위일체의 불가해성에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킨 것 같아 불만입니다.. 루이스의 말처럼 삼위일체야말로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교리일텐데 말이에요. 볼프가 화해와 평화을 강조하다 중요한 부분들을 애써 간과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서로 다른 종교의 신학적/종교적 화해는 어쩌면 이뤄질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저 겸손과 존중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 같기도 합니다

노란가방 2021-10-04 22:56   좋아요 0 | URL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전투‘에서 언뜻 보여주었던 것처럼,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타슈를 섬기던 사람이라도) 한 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다려 볼 일입니다. 볼프의 (암시적인) 생각처럼 그곳에 진실한 기독교인과 진실한 무슬림들이 함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요. 공공선을 위한 협력, 이웃에 대한 호의와 사랑, 민주주의 안에서의 다양성 존중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Redman 2021-10-04 2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또 배우게 됩니다.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던 9월.

어떻게 해야 회복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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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는 건 쐐기풀 같은 거야

쐐기풀잎을 오래 가지고 놀면 누군가가 아프게 되니까.”


세라 매코이초록지붕집의 마릴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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