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
앨러스데어 코크런 지음, 박진영.오창룡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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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동물을 학대하는 사건에 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고문하거나 죽이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보이는 인간들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열악한 상태에서 동물들을 사육하는 업자들, 각종 끔직한 동물실험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경우도 다양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불쾌한 감정이 들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막으려(적극적으로 나서든지, 누군가에게 알리든지) 할 것이고.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법적 처벌수위도 그다지 무겁지 않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법을 제정함으로써 일을킬 수 있는 변화에 집중한다. 동물보호, 혹은 동물복지에 관한 법인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입장이다.



저자는 현재의 동물복지 관련 법률이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처벌수위가 현저히 낮아서 제대로 된 범죄예방효과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저자는 여기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현재의 법률은 동물을 인간에 비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


방법은 동물들에게 일종의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예상되는 반대의견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간다. 예컨대 법적인 의무를 질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이런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지적) 장애인이나 어린 아이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의무를 묻지 않음에도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물론 동물들에게 법적 인격을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고라니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저자가 말하는 건 ‘성원권’이다. 동물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물론 이건 단지 법조문 몇 개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동물들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전담 입법위원(의원)를 배정하는 식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처음 책 제목인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을 처음 봤을 때, 문자 그대로 읽히지는 않았다. 뭔가 알레고리적 표현이나 우화적 문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동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일 줄이야.


동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저자의 깊은 공감력에는 박수를 치고 싶다. 특히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동물들에 관해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법적 논리로 동물들에게 ‘성원권’을 부여해야 하는, 정확히 말하면 부여할 수도 있는 근거를 제시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런 논리 전개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면도 있다.


다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그 정도로 희미한 것일까? 인간의 인간됨(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근거)은 그저 법조항을 만들기 나름일까? 물론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게 진화의 정도와 방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결론에 이르기가 좀 더 쉬울 것 같긴 하다. 언뜻 단지 법률 자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건 실은 세계관 차원의 문제다.

그리고 법이라는 게 생각만큼 정교하게 제정할 수도,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겠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수많은 ‘겹침’의 공간들이 존재하고, 해석을 통한 유보나 양보의 시간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운전자가 한 무리의 양떼와 한 사람의 인간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트는 것이 정당할까. 처벌의 선은 어디까지가 합당할까. 동물의 복지를 신장시키기 위한 전담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면, 같은 논리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의원이나 소상공인, 자영업자, 학생, 어린이, 학교 밖 청소년, 미혼모를 위한 전담 의원들을 뽑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책은 동물의 복지, 지위 향상에 관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좀 더 강하게 떠오른다. 여전히 동물에게 법적 지위, 특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주장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동물들이 ‘원하는’ 일인가? 우리는 쉽게 동물들을 의인화하지만, 사실 아직 동물들의 의식세계에 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에 대한 C. S. 루이스의 견해가 떠오른다. 루이스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기에, 앞서 일어난 고통과 지금 당하는 고통 사이를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동물에게 고통은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각 차원의 문제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회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건 그러니까 동물을 학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최근 벌어지는 동물 학대 사건들을 보면, 루이스의 추측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지옥 같은 경험을 날마다 겪고 있는지..


동시에 루이스는 어쩌면 반려동물, 혹은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의 경우에는 자아 비슷한 것이 형성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상상의 범위를 조금 넓히기도 한다. 이 점에서 그는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하는데, 마치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새로운 인식과 본질을 얻게 된 것처럼, 인간을 통해 자연이 구원 비슷한 것을 얻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동물들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사실 문제는 인간이 동료 인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게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동료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동물을 향해서는 잔혹하게 대할 가능성이 낮을 테니까(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다). 법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을, 다른 생명을 대하는 의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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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말처럼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경험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이며 상대적인 성격은, 

실은 경험 자체가 말해주는 어떤 절대적인 것도 없음을 시사한다. 

더구나 경험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인간은 

많은 부분 이미 결정된 것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경험에 따른 인식에 대해서 절대적 확신이 아니라 

그 인식이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박민영, 『이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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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 성서 내러티브에 나타난 하나님의 폭력
L. 대니얼 호크 지음, 홍수연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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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선한 인물들’로 분류되는 캐릭터들이 종종 놀랄만한 폭력적 성향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진멸할 것을 호소했고, 다윗은 에돔 족과의 전투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시편의 시인들은 종종 적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꿈꾸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좀 더 큰 ‘문제’는 하나님 또한 이런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것이고, 자신의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재앙을 내리기도 하신다.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그분의 계획은 원수들에 대한 가혹한 징벌로 표현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분의 아버지의 뜻과는 좀처럼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런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왔다. 초기 기독교 시기 대표적인 이단 중 한 명인 마르키온은, 보복을 즐겨하는 폭력적인 신을 담고 있는 구약과 사랑을 명령하는 신약의 하나님을 아예 분리시키고자 했다. 그가 가진 성경에는 오직 사랑의 하나님에 관한 내용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삭제된 것이었다.


이건 좀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이었지만, 확실히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만 했다. 좀 더 온건한 사람들 중에 오리게네스 같은 인물은 구약의 이야기를 일종의 알레고리화 함으로써 그 역사성을 희미하게 만드는 전략을 취한다. 겉으로 보기엔 폭력적으로 보이나, 실은 아니었다는 식이다.


방법은 좀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정통적인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리게네스와 비슷한 결론을 취한다. 물론 아예 성경을 신화적 이야기로만 보는 사람들이야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어쨌든 이를 ‘거룩한 문서’로 읽어내려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결론이 같다고 해서 다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구약 전체를 알레고리로 보려는 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지나치니까.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대신 안티오크 학파가 개척한 길을 따르는 게 기본이다. 본문의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기초로 하는 것.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폭력성‘이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으로 자기계시를 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았다면,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폭력성”에 관한 본문들 중 상당수는 그 본래의 의미가 오해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예컨대 가나안 주민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곧바로 그 땅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 주의해야 할 점에 관한 경고가 따라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문자적으로 전멸시키라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식이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저자는 성경 전체를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 과정에서 당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힘, 폭력)을 보여주셨는지를 따라간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백성들의 배신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과 거기를 두신 채, 새로운 방식으로 그분의 계획을 실현해 나가기로 하신다.


이 내용을 신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과정신학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뭐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주제의 흐름이기도 하니까, 너무 성급하게 배척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보수적 학자들이나 진보적 학자나 마찬가지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그분을 둘러싼 신비의 영역은 우리의 능력으로 파헤치는 게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저자도 이 책에서 어떤 결론을 내려 하는 대신, 하나의 논의를 제안할 뿐이고.


그리고 이 문제(“하나님의 폭력성”)가 초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천적인, 그리고 더 크게 와 닿는 문제는, “우리의 폭력성”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간들의 잔혹한 행동들,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구절을 가져다 대는 꼴들이 진짜 더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며, 결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행태다. 그리스도인은 이 폭력이 가득한 세계에서, 어떻게 평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 근본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다.



생각보다 두툼한 책이었다(400페이지 정도가 된다). 어떻게 보면 똑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않고, 마지막에 와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함께 실으려고 하는 태도가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논쟁이 아닌 대화를 추구한다는 건데, 우리 일상 가운데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확실히 이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결론을 내놓고 어떻게든 성경을 그 결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손쉬운(하지만 썩 매끄럽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진실한 자세로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서로 다른 견해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해 나가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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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적인 설명을 

공허하고 진부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여긴다. 

대부분은 교회에 가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통찰을 얻길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주에 관하여 설득력 있거나 감동적이거나 

유용한 설명을 다듣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계속되고 끈질기게 우리 머릿속을 떠다닌다.


데이브 톰린슨, 『불량 크리스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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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실수에 대해 말할 때 

예의를 갖춰 조심스러운 말로 그 행동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스스로 못마땅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자신을 너무 모질게 대하지 않고 평균적으로만 대해도 

불안이 완화되면서 사건을 사건으로, 

문제를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 한기연, “이 도시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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