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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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전시하기 위해 밀림에서 잡아온 고릴라 한 마리가 있다. 놀랍게도 녀석은 유럽으로 실어오는 배 안에서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기를 한참, 어느 날 “안녕”이라는 사람의 말을 내뱉는다.


곧 이 신기한 원숭이는 서커스단에 팔려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좀 더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대도시로 옮겨와 사람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어느 덧 5년 만에 성공한 유명인이 된 그가, 학술원의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진화 과정을 담담하게 회고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흥미로운 소재다. 사람이 된 원숭이라...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이 책은 그래픽 노블로,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소설이다. 만화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대사가 그리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 책 전반에 걸쳐서 뭔가 부조리하고, 조금은 이상하기도 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생각해 보면 이게 카프카 소설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이런 ‘이상함’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처럼 말하는 원숭이라는 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인 유인원이 사람의 옷을 입고 말하는 건 동물원의 공연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이겠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면(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소설 속 캐릭터라면) 확실히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


당연히 소설 속 사건(5년 만에 고릴라가 인간처럼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 역시 이런 특별한 일이 어떤 과학적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차피 작가도 독자고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보는 거니까.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사건에 관한 묘사 속에 당연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 피터가 굳이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애쓴다거나,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진화의 과정에 무슨 역사적인 의미라든지, 철학적 사유가 들어갈 자리를 없애 버린다. 학술원에서의 그의 마지막 멘트는 그저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강연 내내 피터는 인간의 ‘자격’이라든지 ‘조건’이라든지 하는 게 실은 별거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피터는 자신의 진화를 자유를 향한 열정이나 도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애초에 자신은 자유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창살 안에 갇힌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뿐. 그가 인간의 행동을 따라했던 건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터는 스스로 “인간 사회에서 중간쯤 되는 문화적 수준”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란, 너무 현란하지도 않고, 너무 빈약하지도 않은 사고 수준에, 여흥을 적당히 즐길 줄 알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순리대로 적응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피터가 그렇게 살아갈 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우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엔 인간의 장점, 혹은 특별한 점이라고 꼽는 창의성이나 철학적 사유, 도덕이나 윤리 등이 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인간 사회는 돌아간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작가는 그런 것들에 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니들 사는 걸 보면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뻐기고 있냐 라는 식의.



물론 이건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인간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아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고와 그 피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 그런 가치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실제로 우린 이 부분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릴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저 평범한 중류층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인간을 흉내 내는 고릴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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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1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노란가방 2022-06-11 1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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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목을 보고 손에 든 소설집이다. ‘선릉 산책’. 딱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고, 소설 속 선릉역 인근은 내가 가장 자주 돌아다니는 지역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돌아다녔던 거리의 풍경을 읽으면서, 기억 속 내가 봤던 골목들 어디쯤일까 하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좀 더 몰입이 됐다.


이 책은 일곱 편의 중편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표제이기도 한 ‘선릉 산책’은 그 중 세 번째로 실려 있는 작품. 각각의 이야기들은 등장인물도 내용도 독립적인데, 한 가지 공통적인 소재가 있는 것 같다. 모두 어딘가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게 그렇게 계속 어딘가로 걸어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소설 속 ‘걷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일곱 개 이야기 속 인물들과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이 모두 개성이 있다. 다들 삶의 무거운 무게를 어깨에 지고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리 대화가 진행되어도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벽에 부딪힌 건 아닌데, 뭔가 좀처럼 서로의 생각이 만나지 않는 달까.


예를 들면, 표제작이기도 한 ‘선릉 산책’ 속 주인공은 아는 형의 부탁으로 하루 아르바이트를 대신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하게 된 일은 토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한 소년과 함께 선릉역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겨우 하루 동안의 시간이지만, 그리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둘이 함께 선릉역 인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공감을 이루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변주를 준다.


소년의 보호자로부터 세 시간만 더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 것.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주인공은 급격히 짜증이 치솟았고, 어둑해질 무렵 공원 어딘 가에서는 동네 양아치 청소년들과 사건도 발생한다. 서로 친해진 줄 알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투명한 장벽이 생겨버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거기에 담긴 무게는 얼마나 가벼운지...



그렇게 모든 이야기 하나같이 말끔하게 끝나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영 어영부영 밋밋하고 찝찝하게 끝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의 결말이 있는데, 그게 썩 공감이 되는 측면이 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가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가볍거나 하지도 않다. 읽던 도중 다른 생각이 들거나 하지 않게 재미도 있고.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재능있는 작가 같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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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를 찾는” 그 난리는 도대체 어떻게 시작이 된 걸까? 

“네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가 품고 있는 

거룩한 순종의 열정에서 나온 건 절대 아닐 거야. 

이렇게 각각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으려 드는 

‘교회 쇼핑 심리’는 영적으로 파괴적인 거야. 

우리의 예배 취향에 맞추려 드는 교회의 예배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 유진 피터슨, 『사랑하는 친구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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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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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분류학 기준에서 생물로서는 가장 하위에 있는 것들이다. (플랑크톤이나 바이러스를 어떤 식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린 인간과 같은 포유류, 그 중에서도 영장류를 가장 고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파충류와 양서류를 그 아래에, 다시 다양한 종류의 식물종들을 그 아랫단에 배치한다. 소위 진화론적 분류체계다.


때문에 우리는 식물에 관해 모르는 게 많다. 적어도 나와 비슷한 정도는 되어야 상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인간의 특성이다. 식물은 조용해서 (당연히) 말을 하거나, 최소한 고양이나 개처럼 울부짖지도 않고, 우리에게 애교로 보이는 행동을 보이지도 않는다. 뭔가 불편하다고 해서 어딘가로 떠나버리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홀로 말라버릴 뿐이다. 무슨 독초를 먹지 않는 이상, 좀처럼 식물에게 ‘공격당하는’ 일도 없다(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다).


식물은 조용할 뿐만 아니라 느리고 재미가 없다. 그리고 기르는 동안 할 일도 별로 없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좀 더 긴 텀을 두고 관찰한다면 분명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이 바쁜 현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미생물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을 보면,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정적이고, 재미없는 이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를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식물은, 대신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다양한 조치들을 취한다(1장). 같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자라는 장소에 따라 선택하는 전략은 다르다. 심지어 식물은 종종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4장). 화산이 터지고 대규모 산불이 나 황폐화된 땅도, 일단 식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점차 생태가 회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식물의 뿌리와 미생물 사이의 공생 관계는 이 부분에서 열일을 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와 경쟁을 하기도 하고(2장), 때로는 협력을 하기도 한다(5-6장).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떤 종들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땅 속 뿌리들이 연결되어 서로에게 필요한 영양소 같은 것들을 주고받는다. 일부 식물들은 다른 종들 끼리 성장에 유리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꽤나 역동적인 식물들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읽는 재미가 있다. 화려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꽃들, 온통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린 컬러의 옷을 입고 그저 ‘배경’으로만 작동하는 것 같았던 풀과 나무들도, 실은 굉장히 치열하게 생존을 위한 도전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건 뭐 쉽지 않는 게 없다.



여기서 자연히 그러면 우리(인간)가 배울 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다. 각각의 장 말미에는 그 장에서 설명한 식물의 특성과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짧게 언급하는 식의 구성을 반복한다. 식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랄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식물의 모습에서 저자는 시간을 들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교훈을 읽어낸다. 생존을 위해 다양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전략을 취하는 데에서는, 우리가 가진 자원과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배우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적용점을 찾아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서 저자가 이끌어 내는 사회적 전략, 인간관계에서의 교훈 같은 것들은 식물을 관찰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이미 알고 있는 교훈을 식물들의 모습에 덧씌워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식물은 우리에게 그런 전략이나 교훈, 혹은 도덕법칙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다. 식물(혹은 어떤 동물 종)이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 전개는 딱히 당위성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것들이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지만. 사실 우리는 뭔가를 몰라서 제대로 안 하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책 자체는 좋다. 무엇보다 표지도 예쁘고, 평소 잘 알 수 없었던 식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측면에서도 만족스럽다. 조금은 과하게 큰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시도만 하지 않았다면 좀 더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 같다. 따뜻한 봄볕을 맞으면서 읽기에 딱 적합할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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