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 달러의 돈으로 무장한 이런 비정부기구들은 

세계 곳곳에 침투해 혁명가의 재목들을 월급쟁이 활동가들로, 

펀드(공익기금) 유치 전문가로, 지식인들로, 

그리고 영화제작자들로 바꾸어놓고, 

그들을 살살 달래서 정면대결을 피하게 만들고, 

다문화주의, 성 평등, 공동체 발전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의 담론은 정체성 정치학과 인권의 언어로 쓰인다.


- 아룬다티 로이,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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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는 경쟁.


영화의 중심에는 방송국 메인 뉴스의 앵커인 세라(천우희)가 있다같은 일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점에 있는 하나의 자리를 바라보며 일하는 조직에서 성공하는 일은 얼마나 진이 빠지는 일일까.

 

영화 속에도 그런 치열한 경쟁이 드러난다끊임없이 평가를 받으면서 자신이 그 위에 올라가야 하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고그렇게 한 번 올라갔다고 해도 도전자들은 계속 나타난다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의 특성 상 실수 한 번으로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이기도 하다.

 

영화 말미에서 진짜 흘리는 피는 그래서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긴 한다물론 영화의 구성으로만 보면 좀 진부해 보이기도 하지만끝없는 경쟁한 번 탈락하면 끝장인 무한경쟁 체제는 누군가를 밟아야 올라설 수 있는 잔인성을 지니고 있다경쟁은 발전을 이루기도 하지만때로는 모두를 함께 지옥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중인격?


주인공 세라는 결혼을 했는데도 어머니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고어떻게 보면 어머니에게 조종당하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영화 초반부터 이혜영이 연기한 어머니의 섬뜩한 모습에여기에 뭔가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물씬.

 

하지만 그대로 가기엔 좀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영화 말미에 반전을 하나 넣어두었는데그게 바로 이중인격(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이라는 소재다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무의식 중에 마치 다른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병을 가리킨다그 증상 자체가 확실히 좀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는데그 때문인지 공포나 스릴러 영화에 종종 사용되는 소재다.


영화는 실은 세라의 어머니가 이미 죽었고죽은 어머니와 관련된 트라우마가 세라의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하지만 이 과정이 썩 개연성 있게 설명되지 않는 데다가세라의 엄마가 젊은 시절 같은 방송국 아나운서였으며세라를 임신함으로써(미혼모였다는데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꽤 큰 스캔들이었을 듯숨어야 했다는 사연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가 좀 애매하다전반적으로 구성이 좀 아쉽달까.







 

여성을 중심에 둔.


직장 여성의 개인적인 성공과 임신으로 인한 경력 단절딸에 대한 모성애와 지배욕의 애매한 경계그 상대 개념으로 어머니에 대해 딸이 느끼는 구속감과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한 죄책감 등등 전반적으로 여성의 경험을 중심에 둔 영화다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정신과 의사 역의 신하균은 철저하게 설명을 담당하는 보조 캐릭터일 뿐이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라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태동을 느낀다아기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방송국에서 일으킨 사건으로 세라는 다시 일로 복귀하기가 불가능해졌을 것이고당연히 사법처리까지 받아야 할 상황이다그런 그녀가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신호일까.

 

세라의 어머니는 임신 때문에 자신의 일을 잃어 버렸다는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임신은 그녀의 길을 막은 장애물이었을 뿐이었다그러나 그런 생각은 결국 딸의 삶마저 망가뜨리고 있었다어린 시절 어머니의 원망과 함께 목이 졸리는 경험을 한 것이 결국 세라의 병증을 낳은 것 같으니까.


사실 모두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임신은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계기일 수도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으니까결과가 달라진 건 개인의 결심 탓일까아니면 상황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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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윤지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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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림책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위암 4기 선고를 받았다. 무뚝뚝한 남편과 이제 갓 두 돌을 지난 아들이 있는 그녀에게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소식. 책 제목인 ‘사기병’은 이 말도 안 되는 병을 가리키는 작가만의 별칭이기도 했다. 사기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병.


이 책은 그런 작가가 1년여에 걸친 투병생활을 한 기록을 만화로 그려낸 결과물이다. 당연히 실려 있는 사연은 마음이 아프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매우 씩씩하게 이 과정을 그려낸다.(그게 더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항암치료로 인해 도저히 기운을 낼 수 없는 나날들에 관한 기록도 있지만, 적어도 그림 속에서만큼은 작가는 강한 여성이었던 거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병명은 다르지만 벌써 10년도 더 전에 수년 동안 투병생활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떠오르고,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이 실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새기게 된다.


예컨대 작가는 위를 모두 절제한 후,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올라오는 구토를 참아내며 살기 위해 미음을 억지로 넘기고, 그저 바람을 쐬며 산책을 하는 것뿐인 경험이, 하루 믹스 커피 한 잔이 큰 희열을 안겨주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지.



투병생활을 하는 건 오롯이 환자 자신이다. 누구도 그의 고통을 대신 안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환자의 마음의 짐을 아주 약간이라도 덜어줄 수는 있는 것 같다. 그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보다 ‘친절’이고.


특히 책 초반, 작가는 병원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자주 풀어내는데, 환자가 병원에 가는 일 그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친절하게 내뱉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를 보여준다.(하지만 실제로는 사무적으로 대하는 이들을 만나는 게 대부분이다)


사실 누군가를 친절하게 대하는 일엔 그다지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미소와 함께,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때로는 돌려서) 이야기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그 값싼 선물조차 하기 싫어서 (종종 자기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같잖은 이유를 대며) 퉁명스럽게 자신의 위치(대개 신경질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대상보다 스스로가 위에 있다고 여긴다)를 과시하지 못해 안달한다. 그냥, 우리 좀 친절해 지자.



2019년에 출간된 이 책의 작가가 결국 병을 이겨냈는지 궁금해졌다. 책 말미에 ‘다시 시작’이라는 문구가 보여서 마음이 쿵 내려앉은 참이었다. 안타깝게도 결국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게 우리 모두가 결국 도달할 목적지이긴 하지만, 이런 젊은 이들의 죽음은 특히나 슬프지 않은가.


오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 두껍지만 쉽게, 하지만 조금은 느릿하게 넘어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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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좌파생활 - 우리, 좌파 합시다!
우석훈 지음 / 오픈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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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좌파’냐고 물으면, (우선은 그 무례함에 한 마디를 할지 모르지만) 썩 흔쾌히 그렇다고 인정할지 모르겠다. 우선 그 용어에 담긴 오랜 역사적, 사회적 무게감을 함께 질 여유도 없고, 사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좌파’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우석훈은 자신 있게 스스로를 ‘좌파’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은 흔히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데,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구분이라는 거다. 좌파면 좌파고 우파면 우파지, 진보와 보수가 뭐냐는 말.


흔히 말하는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상대편을 비난하는 맥락에서 ‘좌파’라는 용어를 운운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보수’가 아니듯, 그들이 말하는 ‘좌파’도 진짜 좌파는 아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진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보수는 뭔가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진보는 어디로 나가야 할지 자신들도 모르는 것 같다는 거고, 보수는 뭘 지켜야 하는지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 재미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좌파는 거의 멸종 상태다. 정치인들 중에 (심지어 정의당 의원들도) 스스로를 좌파로 소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앞서 말한 ‘진보’가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좌파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집권을 해 본 적이 없고, 어떤 정치적 채무나 책임도 없다는 데까지 가면 살짝 웃음이 나온다.


좌파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나온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진보’는 그런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냥 적당히 고쳐 쓰자는 주의다. 그렇다면 그게 ‘보수’와 뭐가 크게 다르단 말인가.


여기에서 마침내 ‘개혁적 보수’라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한 이유를 깨달았다. 누군가 말했던 ‘극중주의’가 정치적 포지션의 표현일 수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애초에 보수와 진보는 서로가 서로를 향한 대응 포지션으로의 의미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최근 대선에서 민주당이 가장 민주당답지 않았던 이재명을 내세우고도 패배한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 정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도, 수단도 없는 데다, 대통령과 함께 들어온 공무원들은 자기 정치, 자기 밥그릇 챙기기, 자기 사람 꽂아 넣기를 수없이 하고 있었다는데, 뭐 말 다하지 않았나.



뭐 그게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가 그런 모습이라면 어쩌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소위 진보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보수 정권은 당연하게 해결할 생각이 없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국 터져 나왔고, 그 결과가 최근 젠더 이슈에 과몰입해 극우화 되고 있는 1, 20대 남성들이다.(개인적으로는 여기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 10대 꼴통들은 곧 20대 꼴통이 될 것이고, 그들은 내가 죽기 전에 30대 꼴통이 되어 이 나라의 중추가 될 테니까.)


저자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꼭 집권 세력까지 되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는 문제 해결의 이론적, 실질적 기여를 해왔던 좌파가 사라짐으로써, 우리 정치판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저자의 조심스러운 바람을 살짝 엿보게 된다. 지금은 멸종된 좌파지만, 언젠가는 (그리 가깝지는 않겠지만)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이 그러하듯 좌파가 의제를 제안하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는 데 참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는 영원히 고도성장을 할 수 없고, 언젠가는(이미 우리는 그 지점에 거의 다 왔을지도 모른다) 방향전환을 해야 할 텐데, 지금의 진보와 보수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걸까. 언젠가 좌파가 지금보다는 폭넓은 공감을 얻을 날이 돌아올 것이고, 헤겔의 역사적 변증법의 그 날을 그저 기다리면 되는 걸까. 물론 사상이라는 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무에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누가 애써 그 일을 하려 하겠는가. 아무 보람도,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는데.


그래서 우석훈은 취미로서의 좌파생활을 제안한다. 무겁고, 심각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투쟁과 혁명으로서의 좌파 말고, 생활 속 좌파, 좀 더 즐겁고 명랑하고 슬기로운 좌파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자신은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쯤 되면 장기전 모드로 잔뜩 웅크린 자세다. 뭐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금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노력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막을 필요도 없고.


다만 책을 다 읽고도 저자와 같은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는다. 일단 신나게 현 정치계를 까긴 했는데, 왜 오늘날 좌파가 거의 멸종상태가 되었는지 그 내부적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게 한 때 좌파였던 사람들이 다 양지를 찾아 진보가 되었기 때문이라거나, 독재자들이 좌파세력을 탄압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다 설명이 된 걸까?


시야를 조금 넓혀 보면 세계적으로 극좌파들이 일으킨 테러라든지, 과격투쟁으로 인한 피해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 좌파의 유산을 상속 받으려면, 부채도 함께 받는 게 공평하지 않나. 물론 우리나라로 국한시켜 보면 우파 독재가 훨씬 큰 문제를 일으켜왔지만.



시종일관 한 발 물러서 있는 사람이 갖는 여유가 보여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으면 아무래도 투쟁적이고, 날카로워지기 쉬운데 그런 게 없다. 글도 최대한 명랑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는데다, 재미있게 쓸 줄 아는 작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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