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 메타버스를 건너 디지털 대전환까지
이상직 지음 / 이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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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변호사가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변호사답게 인공지능의 법적인 지위를 고민해 보기도 하고, 관련 산업의 발전을 막는 규제들이나, 인공지능의 발전이 낳을 수 있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등을 어떻게 방지/완화할 수 있을지에 관한 법률적 조치 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딱딱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보면서 최근에 인공지능이 이런 분야까지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고, 약간 연배가 있는 분들의 글쓰기 특성 가운데 하나인, 고사 성어를 인용하거나 유명한 역사적 장면들을 도입부에 배치한 후 본격적인 주제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쓰여서,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칼럼을 읽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옹호하는 편에 선다. 하긴 뭐 굳이 일부러 반대하며 과거를 고수하자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저자는 이 영역을 잘 발전시키기만 하면 한 번 더 국가적인 도약을 실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현실로 다가온 과업을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


물론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는 줄이면서, 그 부작용만을 골라서 방지한다는 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울까. 사실 저자도 ‘복잡한 규제는 줄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부작용은 막아야 한다’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정도이기도 하고.


책에 인용된 몇몇 일화들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들이라 딱히 내용 전개에 좋은 빌드업을 제공하지 못한다. 예화는 새로운 것일 때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거지, 흔하디흔한 이야기로는 아무 새로움도, 주목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또,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같은 말은 실제가 아니기도 하다.



저자가 정보통신부에서 공무원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쪽의 전문가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관련 법조업무를 했다는 정도. 때문에 책에 인공지능에 관한 아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런 내용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나 같은 사람은 읽어도 대충 감만 잡는 정도겠지만.


때문에 인공지능의 최신 동향이나 발전 방향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더듬어 보기에 이 책은 그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다만 관련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인 관점을 살짝 엿볼 수 는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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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흐메트 알탄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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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터키에서 대통령인 에르도안을 끌어내리기 위한 쿠데타가 발생했었다. 그러나 일은 실패로 끝났고,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아니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이 책의 저자인 아흐메트 알탄은 그 때 잡혀 들어간 터기 작가다. 사실 그는 소설로 유명했고, 그가 잡혀간 죄목은 처음부터 어이가 없는 수준의 증거도 없는 것이었지만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대체로 그렇듯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죄목이란 게 방송에 나가서 반정부세력에게 비밀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는데,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보냈는지 등은 전혀 소명되지 않았다.


몇 주의 구금 후 받은 첫 재판에서 보석으로 풀려났던 알탄은, 얼마 후 곧 다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우리나라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 흔했던 어용재판의 결과였는데, 이 책은 그가 갇혀 있는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편지로 옮긴 것을 밖에서 엮어 낸 것이다.



작가라는 버릇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건지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문장을 만들어 내고, 유머를 짜낸다. 마치 그게 작가가 가진 특권이자, 누구도 뺏을 수 없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반적으로 갇혀 있는 것, 즉, 자유를 제한당하고, 신체가 구속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라는 정서가 두드러진다. 당연한 일일 거다. 군대에만 가도 그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엄청난데, 하물며 감옥이라면 어떨까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뒤집어 쓴 죄목이라는 게 반역죄 비슷한 것이고, 검사도, 판사도 공정한 재판 따위는 안중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감옥 안에는 없는 게 참 많다. 그곳에는 거울이 없고, 시계가 없다. 모두 현재 자신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구조다. 그렇게 서서히 사람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면 결국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사실 글 자체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그런 것들은 아니었다. 탁월한 해학을 담아내거나, 깊고 날카로운 통찰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작가가 처한 상황에 대한 동정, 공감이 읽는 동안 좀 더 큰 정서였던 것 같다.


다시는 어디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없는 간첩을 증거까지 조작하며 기소했다가 들통이 나도 도리어 청와대로 영전하는 나라에서 썩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작가야 노벨상 수상자들의 공개 탄원 등으로 결국 석방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은혜가 내려올 것 같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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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논리는 정치적으로 적을 때려잡기에 편리한 수단이고, 

전무(全無)논리는 학문적인 노력을 기피하기 위한 핑계의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비록 학문을 통해 완벽한 진리를 소유할 수 없지만, 

상당한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음에 만족해야 하며, 

무지개처럼 점점 더 멀리 뒷걸음질하는 완벽한 진리를 

단지 사랑함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현우, 『사본학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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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역사 : 신약부터 새 창조까지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이여진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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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보면 차이가 나는 어휘들이 몇 가지 있는데 ‘주일’도 그 중 하나다. 대개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날’, 즉 기독교인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날이라는 의미다.


어떤 이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는 것이 무슨 중요한 신앙의 표지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이 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특별한 이미지가 생긴 걸까.



이 책은 기독교 내에서 일요일의 지위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이라는 개념과 주일이라는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안식일을 예배행위의 날로 삼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뜻대로 쉴 수 없었던 상황에 있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 후 다음 날 이른 새벽, 아직 일이 시작하기 전 모여서 예배하는 게 좀 더 편했다.


상황이 변한 건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선언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제 예배가 이루어지던 일요일의 시간을 훨씬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복잡한 예전(禮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일요일이 ‘쉬는 날’이 되면서 개념상 ‘안식일’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한다. 흥미로운 전개다.


중세 교회에서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전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각종 교회력을 폐지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주일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느 쪽이든 ‘주일’의 중요성이 높아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는 말.


영국의 청교도들은 아예 ‘주일’을 ‘안식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유도 하나 있었는데, 당시 로망스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토요일을 ‘사바트(안식일)’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이름으로 부르곤 했었는데, 영어의 경우 이와 상관없는 ‘사투르누스의 날(새터데이)’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기에, 일요일을 좀 서 쉽게 안식일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는 것.


강력한 청교도주의에 의해 ‘주일’은 좀 더 엄숙하게 비켜야 하는 날로 여겨졌다. 물론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관례는 그 이전부터였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안식일에 관한 이런 청교도적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는 그 영향을 받은 미국 교회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세속화가 사회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일요일 또한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그 날을 엄숙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일각에서는 예배의 전례에 대한 회복이 폭 넓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저자는 비록 여전히 세속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지만,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그 날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교회사와 관련해서 읽기에 편안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을 잘 담아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책은 일단 기본적으로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된다. 이번 책에서도 주제인 일요일의 역사를 딱 간결하게 담아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 같은 “엄숙한 안식일적 주일”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이었다.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다양한 미신에 빠지게 된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 역사를 다룬 책이라는 게 뭐든 다 담으려고 욕심을 내서 두꺼워지면서 내용도 한없이 퍼지고, 심지어 서술도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아는 척 좀 덜 해도 되니까, 딱 필요한 내용만 알려주면 될텐데 그게 잘 안 되나 보다. 그래서일까, 이런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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