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병제의 그늘.


일각에서는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는 것이 무조건 선진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기는 듯하다하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징집을 당하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각종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고 하는 일이 부당하게 보일 수도 있다또 복무기간이 짧은 징병제 대신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충분히 훈련받은 인원들이 군사력을 오히려 강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정말 모병제는 만능의 해결책일까?


영화는 모병제 상황인 미군에서 타의로 전역하게 된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그린다특수부대원으로 근무하던 제임스 하퍼는아마도 임무 중 입은 부상을 이유로 강제 전역조치를 당한다연금도 의료보험도 보장받지 못한 채 쫓겨난 그의 앞에는 그의 가족이 지불해야 할 청구서가 놓여있었고결국 그는 친구의 소개로 민간군사업체에 들어가게 된다.


업체의 보스는 자신들이 철저하게 합법적이며 정부가 직접 할 수 없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실제로는 더러운 돈을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범죄 집단이었다문제는 이 업체에 일하는 이들이 모두 전직 군인들이었다는 것.


그런데 실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많은 수의 전직 특수부대원들이 용병이 되어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그 행동들이 모두 합법적이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불법적인 고문도 이런 업자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한 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던 이들이 저지르는 이런 일은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고(그들이 속았다거나돈에 눈이 멀었다는 식으로치부하면 그만일까.





결국은 돈이다.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국방비라는 게 신경 쓰지 않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매년 늘어나기 마련이고그러면서도 일반인들이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당연히 가장 먼저 삭감되는 비용이 이쪽이다(최근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리고 비용을 줄이기 가장 쉬운 영역이 인건비즉 급료다.


전투에 익숙한 인원들이 제대로 된 생계 대책 없이 사회로 나왔을 때는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은 얼마든지 공공의 이익을 해치거나 다른 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문제는 대개 장기적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그 해결책에 대한 고민도 뒤로 미뤄지기 십상이다장기적인 문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선거철마다 부동산과 감세 공약만 남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게 세워질까결국 제도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이들의 불만은 커져만 갈뿐그렇다고 근본적으로 군대를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니...






탐욕.


영화의 흑막은 제약회사였다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막는 치료제 개발에 힘쓰던 과학자를 제거함으로써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말 그대로 물질 만능주의의 끝장이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그들이 말 그대로 흑막 뒤에 가려져있어서영화 속에는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영화에 보이는 건 희생당한 과학자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제거임무라는 말에 속은 대원들그리고 그들을 보낸 업체의 보스 뿐.


주인공을 철저하게 희생자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진짜 탐욕의 근원은 언제나 그렇듯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다진짜 나쁜 놈들은 비싼 정장에 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교양 있게 지낸다생각해 보면 그 비싼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한 일은 얼마나 사회에 유익했을까.


흔히 자본주의는 탐욕에 보상을 해 주는 제도로 여겨진다뭔가를 더 갖고자 하는 욕심이 사람을 더 부지런하게 만들고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추동할 것이라는 믿음에서다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는 요즘이런 주장을 믿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탐욕은 발전의 동력일 수도 있지만동시에 악의 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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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한 예술 - 크리스천 아티스트의 사명
필립 그레이엄 라이큰 지음, 곽수광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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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랜 시간 예술과 함께 해왔다초기부터 다양한 상징적인 그림들예를 들면 물고기라든지십자가 같은 간단한 기호는 기독교 자체를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되었다물론 이 시절에는 기독교가 박해의 표적이 되고 있었기에 드러내놓고 작품을 만들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곧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상황은 바뀐다곧 성경 속 다양한 장면들을 회화로그리고 조각 등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중세에 이르러서는 아주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동로마에서 잠시 성상파괴운동’ 같은 것이 있었지만전반적인 분위기는 달랐다그 양과 질에 있어서 중세는 기독교 예술의 최전성기였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성의 빛을 자신들의 작품에 담아내는 이들로 여겨졌다수많은 건축물들에는 예술품들이 반드시 장식되어 있었고때로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감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의 이런 지위는 퍽 달라졌다개혁자들은 예술 작품들에 대한 지나친 고양이 우상화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고아직 제대로 된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 예술에 대한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그러나 그건 예술의 문제라기보다는 평신도들에게(때로는 성직자들에게도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던 교회의 책임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필립 그레이엄 라이큰 역시 바로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지적한다예술의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우상화될 수 있는지 말이다그러나 그는 이런 위험 때문에 교회가 예술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회복시키고 그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예술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하나님은 세상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드시고그것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끄신다예술은 어떤 도구적 기능만 가지는 게 아니라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행위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은 성막 제작과 이 작업을 총괄했던 브살렐과 오흘리압이라는 인물인데그들이 성막을 만드는 과정은 하나님이 이 작업에 얼마나 큰 기대와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지그리고 그들이 하는 작업 자체가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만나는 자리를아무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공간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기독교적 예술이라고 해서반드시 성경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던가복음 전도를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저자는 여기에는 선함과 진리’,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어떤 것이 이 기준을 만족시킨다면그건 그 자체로(심지어 추상예술이라고 해도충분히 기독교적이다.



작고 얇은 책이다당연히 많은 주석이나 전문적인 논의까지 덧붙여 있는 책들과는 달리핵심적인 내용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다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기에는 괜찮은 책너무 전문적이어서 나 같은 초심자들은 읽기 어려운 것들보다는 오히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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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글쓰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게 하는 바닥짐이 될 수 있다


- 파올로 조르다노,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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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 정의론 -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원칙 리더스 클래식
황경식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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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꽤 자주 언급되었던 철학자가 존 롤스였다우리가 어떤 재능이나 유산사회적 환경에서 태어날지를 모른다는 가정 아래어떤 사회 체제와 제도가 가장 합당할 것인가를 추론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내가 노예로 태어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예제가 존재하는 체제를 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마찬가지로 다양한 약자들이 함부로 여겨지는 사회 역시 많은 공감을 받기는 어렵다롤스는 그렇게 무지의 베일을 쓴 채로 합의를 이루는 체제가 정의로운 체제에 가까울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 책은 그런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안내서이다제목이 『존 롤스 정의론』인데생각해 보니 중의적인 의미도 있지 않았나 싶다실제로 롤스의 『정의론』을 요약설명해주는 내용이기도 한데또 꼭 『정의론』의 내용만 말하는 게 아니라롤스가 다른 책들에서 표명했던 그의 정의론을 두루 종합하고 있기도 하니까.


두꺼운 책을 이런 식으로 짧게 잘 요약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요새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많이 쌓이고 있는지잘만 정리되었다면 이런 작업만큼 좋은 일도 없다물론 더 진지한 관심이 생긴다면 원전을 찾아 읽어보면 되는 거고어렵고 많은 내용을 잘 정리해 내는 건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두 가지 요건 중 하나다.



샌델의 최근작인 『공정하다는 착각』의 주된 기초 중 하나도개인이 타고난 자질과 재능(특히 지능)이 온전히 개인의 공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현실 세계에서는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개소리가 부끄러움 없이 내뱉어지는 세상이니까.


그렇다면 이를 실제로 구현할 방법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그게 세금이든 뭐든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이니 또 쉽지는 않을 것 같다언뜻 준혁명 같은 일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여기는 수많은 제도와 원칙들 또한 실제로는 비교적 최근 생겨난 것들이 적지 않으니조금은 기대를 해도 될까.


원전을 읽기 전 먼저 읽어볼 만한 괜찮은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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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 메타버스를 건너 디지털 대전환까지
이상직 지음 / 이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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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변호사가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변호사답게 인공지능의 법적인 지위를 고민해 보기도 하고, 관련 산업의 발전을 막는 규제들이나, 인공지능의 발전이 낳을 수 있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등을 어떻게 방지/완화할 수 있을지에 관한 법률적 조치 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딱딱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보면서 최근에 인공지능이 이런 분야까지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고, 약간 연배가 있는 분들의 글쓰기 특성 가운데 하나인, 고사 성어를 인용하거나 유명한 역사적 장면들을 도입부에 배치한 후 본격적인 주제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쓰여서,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칼럼을 읽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옹호하는 편에 선다. 하긴 뭐 굳이 일부러 반대하며 과거를 고수하자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저자는 이 영역을 잘 발전시키기만 하면 한 번 더 국가적인 도약을 실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현실로 다가온 과업을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


물론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는 줄이면서, 그 부작용만을 골라서 방지한다는 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울까. 사실 저자도 ‘복잡한 규제는 줄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부작용은 막아야 한다’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정도이기도 하고.


책에 인용된 몇몇 일화들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들이라 딱히 내용 전개에 좋은 빌드업을 제공하지 못한다. 예화는 새로운 것일 때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거지, 흔하디흔한 이야기로는 아무 새로움도, 주목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또,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같은 말은 실제가 아니기도 하다.



저자가 정보통신부에서 공무원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쪽의 전문가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관련 법조업무를 했다는 정도. 때문에 책에 인공지능에 관한 아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런 내용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나 같은 사람은 읽어도 대충 감만 잡는 정도겠지만.


때문에 인공지능의 최신 동향이나 발전 방향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더듬어 보기에 이 책은 그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다만 관련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인 관점을 살짝 엿볼 수 는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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