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피쿠로스주의라고 하면흔히 쾌락주의로 번역된다왠지 어감에서 뭔가 흥청망청 즐기고낭비하고과시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존 셀라는 이게 큰 오해라고 말한다에피쿠로스는 무절제한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1) 먹는 행위와 같은 동적인 육체적 쾌락, (2) 배고프지 않은 상태와 같은 정적인 육체적 쾌락, (3) 친구들과의 즐거운 대화와 같은 동적인 정신적 쾌락, (4)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은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 중 에피쿠로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네 번째 유형의 쾌락이었다참으로 만족스러워서 어떤 걱정이나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걸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동적인 쾌락보다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 때 얻을 수 있는 정적인 쾌락이 좀 더 근본적인 쾌락이라고 보았다예를 들면 뭔가를 먹어야 느끼는 만족감 같은 쾌락보다배가 고프지 않아 편안함을 느끼는 쾌락이 좀 더 근본적이라는 것결국 우리가 뭔가를 먹는 이유는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라는 논리다꼭 뭔가를 먹거나 소유하거나 하는 식의 물질적인 쾌락 말고도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이 논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또 하나그는 인간이 육체적 고통을 썩 잘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문제는 일어날 지도 확실치 않은 미래의 육체적 고통을 염려하느라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다는 부분이다이런 차원에서 그는 대부분의 고통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도 말한다그렇다면 역으로 해결책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문제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면그 마음을 바꾸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언뜻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준다물론 모든 종류의 정념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불교 쪽이 (그 가능성을 제쳐두고서라도좀 더 극단적으로 보이긴 하다에피쿠로스는 뭔가에 대한 욕구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니까비싸고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먹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다만 매번 그런 것을 먹고자 버둥거리다보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대답이 정말 해결책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이런 점은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죽고 나면 어차피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텐데 뭐가 걱정이냐는 투다이쯤 되면그가 정말 고통을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


그러나 인간이 겪는 많은 고통이 결국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그의 지적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이 욕망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면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정신적 쾌락을 강조하는 에피쿠로스가 친구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최상의 정신적 즐거움과 안정감편안함은 역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끝없는 경쟁 아래서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밟고 더 높은 데로만 올라가려고 하는 이들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알기 쉽게 잘 설명하는 책이다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미움받을 용기’ 같은 종류의 심리학과도 잘 맞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위일체와 교회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동방 정교회·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황은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만에 머리 아픈 책을 읽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어냈다’. 물론 볼프의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하지만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도 이번 책은 월등히 난해했다도대체 한 문장을 몇 번씩이나 읽어갔는지 모르겠다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 번역자가 누군지 일부러 찾아봤다알라딘 기준으로 다른 책을 번역한 이력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이번이 처음이었을까결국 중반 이후부터는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기 보다는 전반적인 맥락을 잡고 넘어가는 데 치중했다.


사실 이런 번역상(애초의 문장이 난해했을 수도 있다)의 악조건을 넘어가면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다책의 1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두 명(교황직을 맡기도 했던 라칭거 추기경과 지지울라스 총대주교)의 교회론을 검토하고, 2부에서는 그 두 전통적 교회의 입장과 함께 자유교회라는 개신교 중에서도 좀 더 덜 조직적인 입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볼프 자신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볼프 자신은 이 세 개의 입장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대신경우에 따라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그의 교회론의 핵심은 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기초하는데, “두세 사람이 내(예수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구절이다이를 기초로 볼프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약속은 믿음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회중에게 약속되었으며이 회중을 통해서 개인에게 그 약속의 효력이 전달된다고 주장한다이 점에서 그는 신앙에 있어서 개인주의에 치우친 자유교회의 주장과는 거리를 둔다.


사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이 점에서 의견을 일치를 이룬다하나님은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삼위로 영원한 내적 교제를 이루시는 분이고이런 그분의 존재 방식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교회의 존재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요 17:21)


하지만 그 실제적인 존재 방식에서 이 두 오래된 신앙 전통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로마가톨릭교회는 삼위의 통일성에 집중하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적 한몸됨을 강조한다면동방정교회는 삼위의 삼중성을 강조하면서 각 교회의 독립적인 연대 정도의 구조를 지지한다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자유교회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런데 또 성직자라는 직임에 관해서 두 교회 전통은 꽤나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데둘 모두 그리스도인 개인이 교회에 속하는 과정에서 성직자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본다주교야말로 교회를 역사적 전통과 이어주는 고리라는 것이다그리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이런 견해는 점차 군주적 구조로 변해갈 위험이 있었다(마치 교황제도가 그랬듯이).


볼프는 참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닌 교회는군주제적 구조를 띨 수 없다고 주장한다삼위 하나님이 교통하듯이교회의 구조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뮐렌이라는 신학자의 의견을 인용하면서 심지어 교황제도 집단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교회는 상호의존적이며서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사정없이 비판받는 시대다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교회의 이미지는 낡고고루하고촌스럽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느냐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그리스도인들조차도 교회의 존재 이유를쉽게 말하면 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도 한다교회론의 위기다.


볼프의 이 책은 (난해한 문장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신자는 자기 혼자서 믿음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다교회는 그에게 신앙의 내용을 전달해주었고그 길로 이끌었다하나님이 주신 신앙은 그로 하여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에 자리 잡게 만든다그는 교회적으로 규정된 존재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교회지만그 실제 존재 방식에서 잘못될 여지는 언제나 있다대표적인 것이 군주제로 대표되는 교회의 위계조직의 경직화다애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교황이든주교든총회장이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면그들 중 한 명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우월한 신앙적 계층을 형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실제 운영에 있어서 조직이 만들어지고명령관계가 형성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각 지역에 존재하는 개별교회만 해도 의사결정과 사역을 위한 구조가 존재한다오랜 역사와 전통을 통해 형성된 그런 모습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하지만 이런 구조들이 교회의 법으로 만들어지고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엇이 되는 순간 타락은 시작된다그건 영원한 교통 중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리는일신교적 모습이니까.


오늘의 교회는 반론과 이의제기에 얼마나 열려있을까질문이 꺼려지고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무례하거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 양 억누르는 게 교회의 모습이라면그건 볼프의 말처럼 그가 무슨 고백을 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내 판단이 아니라 교회의 판단정확히는 공동체의 판단좀 더 정확히는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할 텐데그런 사람들을정확히는 그런 리더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아직 교회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만약 교회가 그 본질에 따라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고그렇게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면 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노청년이 애국에 몰두하는 이유는

애국을 빼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우월함을 뒷받침할 근거가 빈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대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쉽다.


- 김인희,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속작의 저주?

전작이 인기를 얻었지만 그 후속작은 망한 예를 찾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전작의 흥행에 기대서 안이하게 제작했다가 참패를 겪곤 한다어쩌면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로 꼽히게 될지도 모르겠다분명 영화는 아직 이야기가 모두 풀려나오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지만그렇다고 두 시간짜리 예고편을 보는 걸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전작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예컨대 김다미라는 신인 배우로 큰 효과를 얻었던 감독은 이번에도 비슷한 과정으로 신시아라는 신인급 배우에게 주연을 맡겼지만전작의 인기가 단순히 그것 때문이었을까.


분명 전작에서 김다미의 연기는 신인티를 벗지 못했었고대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그게 느껴졌다하지만 완숙한 연기력을 가진 중견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어서 영화 자체가 안정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그저 젊은 배우들을 쏟아부어놔서 무슨 대학생 졸업영화를 보는 듯한 불안감을 준다.


더구나 뭔가 세계관을 짜고 배경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면 이야기에 좀 더 성의를 다했어야 했다하지만 대충 봐도 영화는 종반부의 결투씬에 모든 걸 쏟아 부은 듯했고나머지 90%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저 금세 사라져버릴 투덕거림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마지막 결투씬 조차 그리 스릴을 주지 못했다는 점전작의 경우 좁은 연구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엄청난 파워를 지닌 주인공의 제한된 액션으로 큰 파괴력을 보여주었는데이번 영화는 애초에 완전히 오픈된 야외 공간에서 전혀 감흥이 없는 무협영화식 액션 전개만을 보여준다.






너무 가벼운 죽음들.

영화 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별 설명 없이 죽어나간다예를 들면 영화 속 소녀를 도와주던 박은빈 배우의 캐릭터를 위협하는 용두 패거리(... 설명하는 것도 길다)는 영화 말미 그저 한 방에 대량학살로 퇴장해 버린다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에게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하고 쥐어 터지더니 나중엔 말 그대로 터져나간다.


영화 속에서 소녀를 여기저기서 쫓는다는 설정이라 갑자기 등장한 여러 초인적인 캐릭터들도 진주인공인 소녀에게 꼼짝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건 매한가지다전작의 최우식처럼 시종일관 깐족거리는 것까지 똑같았지만적어도 최우식이 맡았던 캐릭터는 애써 반격도 시도해 보고 했었는데 이건 뭐 광역기까지 난사하며 달려드는데 뭐 가까이도 못가는 수준이니..


물론 영화 속 죽음을 실제 죽음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특히나 이런 판타지 영화에서 그런 것까지 따지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그럼에도 이런 가벼운 죽음들의 남발은 영화의 수준을 더 떨어뜨리는 느낌이다과연 그들이 터져 죽을 만큼 큰 악을 저질렀을까.





왜 후속편은 안 만들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왜 그냥 후속편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전편에서 김다미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습으로 끝났던 차라이제 그녀가 무엇을 찾아다니고 어떻게 사건을 수습해 나갈지를 기대했던 관객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 같기도 하다물론 그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그래도 이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지원까지 받았다면 충분히 후속편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편을 보긴 할 것 같지만그건 이번 영화가 흥미를 자아냈기 때문이 아니라여전히 전작에 기댄 기대감 때문일 것 같다뭐 늘 홈런을 칠 수는 없지 않겠지만그래도 타율이 좋은 타자라면 안타를 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다.(물론 연타석 헛스윙 삼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치유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삶을

연장시키려는 시도에는 목적이 없다.

반면 이러한 고통을 최소화시킬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 스캇 펙, 『죽음을 선택할 권리』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