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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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그 중에서도 중세 서양사를 이해하려면 자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다. 두 종교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그 정신적 뿌리를 찾고 있는(여기에 유대교까지 포함해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실제 관계를 맺는 방식은 매우 미숙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남아있는 십자군이나 지하드가 그 대표적인 이미지고.


그러면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싸우기만 했을까? 이 책은 이슬람교가 시작된 7세기부터 양측이 세력이 동쪽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진출로 유럽이 위기감에 휩싸이고, 반면 서쪽으로는 레콩키스타의 완성으로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나게 된 15세기까지의 약 9백 년 간의 이야기를 크게 훑어가며 다룬다.



사실 이 정도의 내용을 담자면 전체적으로 책의 볼륨이 상당히 두꺼워져야 할 텐데, 이 책은 생각만큼 두껍지 않다. 에필로그에 번역자 후기까지 합쳐도 280쪽이 안 되는 정도다. 하지만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꽤 짜임새가 있다. 이슬람의 발흥부터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편의 상황을 오고가며 잘 서술하고 있다.


특히 서술의 방식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한두 개의 사료에 근거해서 당시 시대상을 단정 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의 진위를 먼저 판별해야 하고, 그 기록이 담고 있는 사실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사실인지도 가려야 한다. 또, 일회성을 갖는 사건인지, 아니면 저변에 두루 퍼져있던 관행인지도 알아야 하고.


저자는 자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기록이 그것을 남긴 당사자들만의 기록인지 좀 더 널리 퍼져있는 관행인지 분명치 않다고 덧붙인다. 이런 태도는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를 다루는 데도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 서술은 최대한 중립적인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면서도,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던 십자군과 지하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종교가 언제나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역사라는 건 대부분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들, 군주들과 영주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두 문화권 사이의 직간접적인 교류와 (때로는) 우호관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황제 취임 축하선물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로부터 코끼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슬람 문화의 찬란한 발전은 기독교 국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서로 대립하면서 싸워 온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심지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도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반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런 미개하고 이단적인 유럽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교류의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쇄술로, 구텐베르크의 발명이후 50년 만에 유럽은 인쇄소를 갖춘 도시가 100개가 넘고 나온 출판물이 600만 부를 넘었지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인쇄술을 배우려는 시도 자체를 처벌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학문과 사상이 발전할 길을 막아버렸다.





책의 말미에, 왜 그렇게 두 문화권은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가 답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 갖게 되는 태도에는 이전에 겪었던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정복자로서 처음 대면했었고, 자연히 그들을 깎아내리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신의 최종적인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에 충만해서, 기독교인들을 낮춰보는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실 당시 그들이 만났던 유럽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었기에, 뭔가 배울 만한 게 없었다고 여길 만도 했고.


결국 서로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과 이해의 부족이 오랜 적대관계를 낳았다는 말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지라도 분명 일리가 있는 지적인 것 같다. 교통과 통신이 이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이해가 부족하다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언제쯤 이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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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은 정말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 가난한 살림에서 지출을 늘려나간다.

거대한 텔레비전과 아이패드를 산다.

이자가 센 신용카드나 고리대금을 얻어서 자식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다.

필요하지도 않은 집을 매매하고

그걸로 재융자를 받아 소비를 더욱 늘리다가

결국 쓰레기로 가득찬 집을 떠나며 파산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 J. D. 밴스, 『힐빌리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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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안으로서 미친 듯이 단순한 이론이다.

그것은 미친 사람의 논리와 똑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사상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배제시키는 것을 즉시 감지하게 된다.

이를테면, 맥케이브 씨와 같은 유능하고 성실한 유물론자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고,

모든 것은 이해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인다는

독특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 G. K. 체스터턴, 『정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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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 지혜, 안녕, 경이의 탐구와 신학의 쓸모에 관하여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은진 옮김 / 포이에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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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학’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비판적 시각이 있다. 하나는 원래 기독교는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이었는데 신학이 이를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만 만들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신학 작업이 정작 하는 일이란 실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만의 학문이나 토론주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 중 두 번째 비판은 중세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스콜라 철학/신학(당시에는 철학과 신학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 지를 두고 벌어진 의미 없는 논쟁이 그 대표적인데(사실 이 논쟁은 겉보기와 달리 중요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신학계 일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도 하니, 여전히 이 비판은 유효한 면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 비판은 신학 자체가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신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그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봐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첫 번째 쪽일 텐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맥그라스는 신학이 (신앙생활에, 또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무슨 소용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좀 더 큰 그림을, 후반부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저자는 신학을, 성경 본문에 관한 연구와 해석들이 모여 만들어진 오래된 기독교 전통으로 본다. 신학에는 교회가 보존해 온 풍성하고 귀중한 유산이 담겨 있다. 그걸 무시하는 사람은 바로 이 유산을 버리고 새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같다. 신학은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복음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사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신학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으니 저자의 이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바로 그 신학(정통 신학)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를 생각해 보면(뭐든 뒤집어엎는 걸 좋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그 시절 이단들에게만 피해자 서사를 입히기를 즐겨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다), 오늘날의 상황이 살짝 민망할 정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바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 2천 년을 버텨온(여기에는 바른 신학이 그 뼈대가 되었다) 동안의 신앙 공동체의 유산을 받아 일어난 후계자들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냥 내가 선언하기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유산과 역사를 이어 받았는지로 결정되는 법이다.


저자는 또한 신학이 온통 흩어지고 조각나 있는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신학은 성경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하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린 후, 책의 2부에서는 지혜와 안녕, 경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아름답게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서도 세 번째 주제인 ‘경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신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리가 공부해 가는 그분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멀리까지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러므로 모두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한 발 더 나아가 이미 우리 모두가 신학자라고 선언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신학의 필요성, 신앙생활에서의 신학의 가치 등을 두루 고려해 보면, 이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신학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학과 만나야 한다. 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나아가 적용을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뿐이 아닌데, 우선 실천적 차원에서는 교회에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신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나 자리가 부족하다.(개별 교회가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 학문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분산되어 있는 현대 신학계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다.


또, 신학이 교리와 동일시되는 오해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물론 어떤 교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결사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견해의 차이, 또는 현재 상황에서는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까.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미 좋은 개론서나 입문서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그것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부디 그 안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더 깊은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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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을 그르친 경영자가 법인에게 개인 재산으로

‘천문학적’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지는 않는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잘못했을 때 

소비자가 기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법원에서 큰 금액으로 인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파업을 한 노조와 노동자에게 청구되는 

손해배상액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균형이 맞지 않는다.


정관영, 『헌법에 없는 언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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