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들과 지평들 -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공공철학
리처드 마우.산더 흐리피운 지음, 신국원 옮김 / IVP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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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특징짓는 사상 가운데 하나가 다원주의다. 근대 이전 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권위가 주장되던 시대였다. 왕과 황제들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들도 만들어졌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여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동양 각국에서는 유학(교)과 불교가 그 주된 도구였다.


하지만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변형되었던 사상적 기초들의 절대성 주장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사상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고, 이는 언뜻 모두가 공평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민주적인 사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큰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기독교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던 종교가 아니던가. 중세 기간 이 유일성의 독점성을 왕과 황제들에게 빌려준 결과였다. 뭐든 절대성을 주장하는 걸 혐오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독선과 오만한 주장을 펼치는 종교, 사상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이런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수용한다면 어느 정도, 어떤 모습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두 명의 저자들은 다원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다원주의를 분류/분석하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다원주의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제안한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다원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는 한 마디로 말해 “빈 성소는 비워둔 채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소란 최종적인 권위를 가리키는 비유인데, 다원주의는 그 정의상 성소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체계이지만, 바로 이 주장, 그러니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타당성(권위)는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뿐 아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다원주의는 홀로 설 수 없다. 모두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는 사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 서로 협력하고 도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때문에 기독교를 제거하려고 했던 루소 같은 인물조차 “공동체 축제”라는, 마치 예배와도 비슷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며 얻은 특별한 통찰 중 하나는 다원주의에 대한 분류이다. 저자들은 서술적 다원주의(어떤 현상이 있다)와 규범적 다원주의(어떤 방식을 따라야 한다)를 구분한 뒤, 다시 세 종류의 다원주의(방향적, 연합적, 맥락적)를 나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결합하면 모두 여섯 가지의 다원주의 항목이 나온다.


저자들은 이 중에서 규범적인 방향적 다원주의를 가장 경계한다. 정의상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규범적인), 바람직한 전망으로서의(방향성) 다원주의다. 이런 종류의 다원주의는 우리를 궁극적인 상대주의로 몰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고, 그건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류의 다원주의를 반대해야 할까? 저자들은 맥락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좀 더 유화적인, 아니 좀 더 적극적인 수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창조 상태의 본래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연합적 다원성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의 몸이 많은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는(물론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가리킨다) 독특한 연합성에 대한 가치를 일찍부터 인정해 온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독선적이고 독단적일 필요가 없다. 물론 결국 어느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라는 압박에 대항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에서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감사와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철학과 신학이 교차하면서 꽤나 깊이 주제를 연구해 나가는 책이어서, 읽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다원주의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들을 정교하게 분리해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제대로 접근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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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암살자협회?


영화 존 윅은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를 관장하는 암살자 조직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고급 수트를 입고 다니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 보니 잔인한 암살자였다는 식의 세계관은 그 갭(Gap)으로 인해 꽤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세계관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전도연이 연기한 길복순은 겉으로 보면 자신의 성을 가지고 있는 중학생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고, 어머니 모임에도 출석해 환담을 하거나 마트 마감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장바구니를 채우는 주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전설적인 킬러라는 것.


영화 초반 한국계 야쿠자 두목으로 특별출연한 황정민과 전도연의 일대일 대결신은 꽤 재미있었다. 황정민의 오두방정과 전도연의 액션이(대역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볼꺼리였고, 마지막에 전도연이 황정민을 처리하는 방식도 웃음이 나왔다.


일단 영화의 홍보 자체가 액션 영화로 보이니 당연히 액션에 집중하며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대했던 것만큼 인상적인 액션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앞에서 언급했던 첫 장면은 재미있었지만, 이후의 장면들에서는 그닥...





킬러도 사람이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존 윅”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평면적이다. 그들은 대개 그저 일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고, 개인사나 보통의 삶은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공 존 윅의 이야기에 좀 더 몰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일도 일이지만 길복순의 개인사에 좀 더 비중을 많이 둔다. 우선 주인공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딸이다. 뭔가 엇나가는 듯한 딸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양육에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길복순을 사실상 킬러로 키워낸 인물이자, 암살자 조직을 창설했던 차민규(설경구) 역시 노인과 어린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울 정도로 그저 냉혈한은 아니었다. 영화 속 에피소드로 나오지만, 애초에 그가 복순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제거하지 않은 이유도 그녀가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


킬러들도 고민이 있고, 그 고민이라는 게 지극히 일상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라는 게 독특하다. 그리고 그 고민이 무슨 인류애나 윤리적 측면, 지독한 사랑(연정) 같은 게 아니라, 엄마로서의 생활형 고민이라는 것도 인상적이고. 물론 덕분에 정통액션영화는 좀 멀어져버렸지만.





그래서 윤리적 고민은?


그런데, 그렇게 너무나 일상적이고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고민을 하는 주인공이, 사람을 죽이는 이 자체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영화적 상상과 각색이 들어가긴 했겠지만, 그래도 되나 싶은.


물론 영화 속에서는 잠시 윤리적 고민을 하는 복순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들의 입시 비리 사건(응?)이 터지면서 국무총리 되지 못할 위험에 처하자, 그런 아들을 죽여 달라는 어이없는 정치인의 의뢰 건이었는데, 복순은 그 의뢰를 실패했다고 보고하기로 하고 그로 인해 파문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 해왔던 수많은 작업들에 대해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때문에 영화는 자칫, 범죄자들에게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저지른 일 또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핑계를 더하는 결과를 내버렸을 지도 모른다. 딸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던 복순이 계속 업계를 떠나지 못하는 건, 애를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일로 돈을 번 그녀는 굉장히 넓은 베란다를 갖춘 집에서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으니....


전반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보여주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느낌이다. 철학적인 고민이라든지, 정의와 같은 높은 가치관에 대한 고려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락 영화 정도로 보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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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고 완성함으로써 짜고 계신

거대한 삶의 양탄자를 구성하는 작은 기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일의 궁극적인 의미다.


-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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