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데이먼이 이런 역을?
맷 데이먼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탄탄하게 다져진 근육질 몸을 바탕으로 화끈한 액션(이 경우엔 주로 총을 사용하지만)을 보여주는 인상이랄까. 물론 그가 언제나 액션영화만 찍는 건 아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꽤 많이 다른 느낌의 배역을 맡았다.
맷이 연기하는 빌 베이커는 전형적인 미국 중하층 백인이다. 전에는 석유시추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최근에는 그나마 일자리도 잃어버린 상황. 뭐 대단한 사상이나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이 많거나 활발한 성격도 아니다. 이야기가 좀 더 전개되면서 알려진 내용이지만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쩌면 이 일에 맷의 책임도 얼마간 있을 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아빠에 대한 실망을 넘어 내심 경멸감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던 딸은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충동적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그저 집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이유로. 거기에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웬 아랍 출신의 여자동기와 동거를 하다가, 그 동거녀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 생활을 5년째 하고 있었다.
영화는 빌이 그런 딸을 면회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딸은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서 재수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변호사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하지만, 변호사는 사건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딸의 결백을 믿지만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빌 같은 아버지가 뭘 할 수 있을까.
비호감 딸.
곤경에 처한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라는 구도는 익숙하다. 테이큰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비슷한 구도를 취한다. 딸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들이나 세력은 굉장히 강하게 등장하기에, 아버지는 전직 무슨 특수요원이라든지, 심지어 범죄조직의 킬러라는 식의 힘숨찐 캐릭터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지극히 평범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설정만이 아니라 속까지(?) 그렇다. 이국의 교도소에 갇힌 딸을 구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서 딸이 진범으로 지목한 사내를 발견하지만, 시원한 해결을 이글어내진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만 다른 게 아니라 딸의 모습도 많이 다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서 아버지의(그리고 관객의) 동정을 이끌어 내는 가련한 캐릭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딸은 아버지가 모르는 프랑스어로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 따위는 무능해서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가석방 휴가를 나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룸메이트를 만나서도 비슷한 말을 던진다. 심지어 나중엔 마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교도소에 갇힌 양 증오의 말을 쏟아낸다. 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
그렇다 보니 나중엔 굳이 저런 딸을 구해야 하는지 하는 당위를 묻는 질문까지 나온다. 심지어 영화 말미 밝혀진 진실까지 더해지면.... 얘는 그냥 폐급이다.
씁쓸한 뒷맛.
물론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좀처럼 끊기 어려운 일이다. 빌은 딸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도움을 받게 된 버지니와 그녀의 딸인 마야와 가까워지면서, 나중에는 그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처음엔 단순한 룸메이트였지만 나중엔 동거하는 사이로 바뀌기까지 하고.
그런데 이 버지니 캐릭터도 또 비호감이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마야만 제외하고 다들 이렇다) 처음엔 빌과 함께 그의 딸이 얽힌 사건의 증인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한 증인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그가 아랍계에 대한 차별적인 말을 하자 혼자 흥분해서 (통역도 중단 한 채) 뛰쳐나온다. 그러면서 저런 인종차별주의자와는 대화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나중에 그녀가 빌과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도 빌이 딸인 마야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다는 이유에서다.(심지어 직전에 빌은 딸 사건의 용의자를 임의로 납치해 감금하고 있었는데, 이건 언급하지도 않는다) 물론 딸의 교육을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하룻밤의 잠자리를 하고 아이까지 낳았던 그녀가 거짓말을 그렇게 문제 삼는 독특한 윤리관을 갖고 있는 게 쉽게 이해는 안 간다.
그렇게 조금은 평범한 작은 행복이 깨져버린 빌은, 딸이 지목한 용의자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실은 딸이 자신의 동겨녀를 집에서 내쫓아 달라고 자신에게 요청했다는 것. 그러니까 딸도 결백한 게 아니었던 것. 물론 자신은 죽일 줄은 몰랐다지만. 하지만 빌은 자신이 얻은 용의자의 머리카락을 전직 경찰에게 (돈과 함께) 제공함으로써, 딸의 이른 석방을 이끌어 낸다.
어디 하나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의 문제에 눌려있는 주인공 빌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의 여자들, 심지어 범죄까지도 묻고 넘어가려는 삐뚤어진 자식 사랑의 모습만 보인다. 시종일관 조용하게 진행되는 영화의 결말 부분은 그래서 약간은 허탈하고 씁쓸하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걸까, 저 부녀는 과연 앞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한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유명한 장군이다. 그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고, 마침내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기른 병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이동해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간 인물이다. 단지 들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후 무려 15년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던 독보적인 장군이었다.
이 책은 그 한니발의 일대기다. 어린 시절 바알 신전에서 아버지에 의해 로마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유명한 이야기부터, 코끼리까지 동원한 채로 알프스 산맥을 넘고,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고 로마 성벽 바로 앞까지 갔던 이야기... 하지만 결국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본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는 이야기까지...(내용은 그의 죽음까지 나온다)
말 그대로 한니발의 일생을 차분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야 새로운 뭔가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개 한정적이고, 그걸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인데 나름 성실하게 정리해 놓은 듯. 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 쪽이 재미도, 그리고 오히려 전문성도 좀 더 높아 보인다는 게 아니러니하달까.
물론 학자와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한니발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맛깔나게 쓰는 좋은 작가도 아니라는 점이전반적인 평점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책의 영문제목은 “Rome's Greatest Enemy", 즉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한니발)인데, 한니발이 어째서 로마의 ‘위대한 적’이었는지는 단순히 설명으로 서술할 게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쓰는 쪽이 훨씬 흥미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훨씬 더 낫다.
그렇다고 책 전체에 걸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닌지라 굳이 읽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정보들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한니발 전쟁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니발에 편에 섰다고 말하는데, 이건 로마빠인 시노오 나나미의 책에서 보이는 일사불란한 로마연합의 이미지를 깨준다. 또, 한니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북아프리카 출신의 황제인 셉티미우스가 한니발을 자신의 선조로 보고 그의 무덤을 복원했다는 내용은 새로웠고.
다만 저자는 한니발이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의 일반적인 전쟁 관례와 달리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 즉 로마가 당시의 전쟁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건 좀 빈약한 설명 같다. “한니발이 이기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게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는 건지..
책 표지가 멋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주는 점수에서 1점은 표지 디자이너의 공이다. 영문판 원서 표지도 동일한 이미지(검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고대 장수, 아마도 한니발?)를 사용하지만, 한글판 쪽이 영문 폰트라든지 배색이 훨씬 감각적이다. 영문판 쪽은 그냥 외국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페이퍼백 느낌의(실제로 페이버백이긴 하다) 허전한 표지랄까.
고대 로마사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긴 하겠지만, 본격적인 전사(戰史) 연구서도, 그렇다고 고대 문명사에 대한 전문적인 안내서도, 실감난 묘사가 들어간 소설도 아닌 좀 어정쩡한 포지션이라는 게 아쉬운 점.
원래는 전도서 및 서간문 형식의 일부 신약 성경에만 ‘서’자가 붙어 있습니다.
특히 신약의 서신서는 편지 문학이기에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서’(書)를 붙인 것입니다.
룻기, 욥기, 잠언, 아가는 ‘기’, ‘언’, ‘가’라고 장르가 이미 표현된 말이므로
‘서’자를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룻기, 욥기, 잠언, 아가’라고 원래대로 부르면 됩니다.
- 이복규,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 중에서
1960~70년대 중국은 대환장파티 중이었다. 경제에 무지한 국가 지도자(마오쩌둥)가 추진한 멍청한 계획(문화대혁명)은 전국토를 처절하게 파괴했고, 수천 년의 역사를 아우른다는 중국의 학문과 경제, 정치적 기반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지식인들은 당연히 이런 멍청한 체제에 반발했고, 정부는 그런 지식인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극한의 상황에서 죽을 때까지 육체노동을 시켰다. 결과적으로 바보들(위에서 시키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능력이 없는 이들)만 남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최종적인 결과는 수천 만 명이 굶어죽는 파국이었다.
이 작은 소설은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옥수수(당연히 별명)”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 된 소년이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눈치는 채고 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검은 책”을 썼다는 이유로 먼 강제노동현장으로 끌려가고, 그런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학교 방송반에 받아주겠는 제안을 받는 상황은 어린 아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은 온통 괴상한 것들뿐이었다. 멀쩡한 말을 데려다 일을 시키기는커녕 집회에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간부의 명령은 결국 말과 그 말을 돌보던 친구의 아버지 모두에게 스트레스였고, 결국 말의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소설에는 또 하나의 죽음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의 목욕탕 물을 데우는 일을 하는, 조금은 순박하고 ‘아저씨’가 굴뚝에 느슨하게 달아놓은 스피커를 고치러 아무런 안전조치 없이 올라가다가 떨어져 죽었다. 아저씨는 무슨 대단한 대가도 아니라 그저 색시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동네 주임의 말을 믿고 올라갔지만, 웬일인지 그는 죽은 후 열사의 칭호를 받으며 신문에 오르내린다.
결국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서도,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해서도 안 된다는 걸 배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제한되고 상상이 사라질 수 있을까. 결국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위선적인 성격과 강약약강의 비뚤어진 사고만 만들 뿐이고, 그건 장기적으로 한 사회의 발전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날에야 이 문화대혁명을 중국 공산당에서도 공식적으로 실패한 운동으로 평가하기에 이런 책이 나오는 것도 허락되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소위 “중국적 사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면이 적지 않다. 어쩌면 이런 것들도 그런 위선적 문화와 권력에 굴종하고 그 반대급부로 갑질이 생활화된 역사에서 나온 건 아닌지...
이야기는 동화의 형식,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 정도의 느낌으로 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좀 더 묵직한 생각할 거리를 넌지시 건네준다. 읽어볼 만한 작품.
소현세자 독살 의혹.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서 당시 조선 왕인 인조가 청 황제에게 절을 했던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났다. 이후 청은 조선의 차기 왕이 될 소현세자 내외를 볼모로 끌고 갔는데, 세자는 청 황실의 고위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우호적인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런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애초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정통성도 부족했던 데다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인조는 정치적으로 꽤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안고 돌아온 세자에게 위협을 느껴 아들을 독살했다는 것이 이 사건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던 의혹이다.
영화는 이 의혹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진행된다. 여기에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침술사 천경수(류준열)라는 캐릭터를 넣어 한 명의 증인으로 기능하게 만들면서, 사건을 보는 관객들의 긴장감도 높여준다. 구중궁궐 임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서 이런 증인을 놓아두는 건 영리한 설정이었다.
올빼미.
영화의 제목 올빼미는 그렇게 감독이 만들어 넣은 가공의 캐릭터인 천경수를 가리킨다. 그는 보통 때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주변이 어두워지면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상태다. 마치 올빼미가 야행성이라 낮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밤이 되면 비로소 사냥을 하러 날아다니는 것처럼.
한편으로 이 제목은 아무리 다른 사람들 몰래 음모를 꾸미더라도, 누군가는 그걸 보고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과 비슷한. 다만, 영화의 전체적인 밝기가 너무 어둡다. 아무리 밤이 주된 무대지만 이렇게 어두워서야...
온통 CCTV와 블랙박스 같은 카메라들이 비추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짜 나쁜 놈들은 자기들만의 어둠 속에서 일을 처리하곤 한다. 결국 증거가 없으니 처벌도 없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진다. 심지어 누군가 사건을 드러내더라도 그저 덮어버리고 끝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올빼미처럼 한 밤의 쥐새끼들을 낚아채 잡아먹는 어둠의 영웅들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해진.
영화의 주인공은 류준열과 유해진인데, 개인적으로는 인조 역의 유해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어딘가 조금 나사가 헐거운 개그 캐릭터로 나오는 영화나 편한 옆집 아저씨 같은 예능의 모습만 보다가, 간만에 이렇게 진지한 역할로 나오는 게 조금 새롭게 보였달까.
앞서 잠시 설명했듯, 당시 인조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이 대개 그렇듯 공신들의 등쌀에 눌려 지냈고, 전쟁에서 패하면서 엄청난 피해까지 입었으니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어려웠다. 영화 속 인조는 심한 불안과 일종의 편집증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유해진은 약간은 미쳐있는 이 캐릭터를 썩 괜찮게 묘사했다.
다만 대사처리는 좀 아쉬웠는데, 너무 뭉개져서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는 부분도 보인다. 시종 그가 어딘가 아픈 모습으로 등장했기에 너무 또렷한 발음을 사용하기 어렵기도 했겠다 이해는 가지만.
영화 말미에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흥미롭게도 그 역사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기록되었다는 점인데, 영화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마지막을 천경수가 마무리한다는 설정을 넣는다. 영화적으로는 꽤 시원한 장면이지만, 또 인조가 그렇게 실제로 악랄했나 하는 질문을 해 보면....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