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개방적이고 느긋하고 성적 중립을 지키는 관대한 이단과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경직된 정통을 서로 대비시키는 일은

역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접근법은 오늘날의 문화에 맞춘 산뜻하고 매력적인 대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이다.


- 앨리스터 맥그래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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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 - 경제 역사 법·정치 문화 철학 영역별 적용
이정훈 지음 / 도서출판 PLI(피엘아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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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은 페이지수가 700쪽 가까이 되는 데다, 내용 역시 경제와 역사, 법과 정치, 문화, 철학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이나 문화 쪽은 상대적으로 양도 적도 내용도 간략한 요약 정도에 불과하긴 하지만.


사실 저자에 대해 따로 악감정은 없다. 몇 년 전 교회에서 했던 한 특강의 강사로 와서 이 책에 실린 내용과 비슷한 강의를 하는 걸 잠시 지켜본 게 인연의 전부이니까.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 기독교 등이 섞인 강의였는데,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편향돼 좀 듣다 나왔다. 저자가 운영한다는 유튜브 채널 같은 것도 일부러 찾아 들어본 것도 없고, 그래도 좀 우려가 되는 건 역시 앞서의 그 강의에서 보여준 독특한 관점 때문이었다.


또, 개인적으로 이 책을 굳이 들게 된 건, 아는 후배가 한 번 어떤지 읽어봐 달라고 요청을 해서다. 읽어야 할 책들은 많지만, 또 요청이 들어오면 읽어주는 게 인지상정(?).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저자는 우파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을 동일시하고, 이에 근거해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뭐 사상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니까,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책 제목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관점을 “성경적”이라고 단정 짓고, 그 외의 관점들에 대해서는 책 내내 다양한 조롱과 무시를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일종의 강의를 옮긴 것인지라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어느 정도 상호 용인되는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언사에 좀 불편했던 어떤 사람(장로)이 와서 자제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는 걸 유쾌하게 써 놓은 수준이니까.


특히 좌파 정치세력을 적으로 상정하고 과감한 음모론과 상대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을 자주 표출한다. 이 정도의 폭력성은 자신이 완전히 옳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기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지 책의 태도만 문제인 건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저자는 일관되게 정치, 경제, 사회발전에서의 기독교의 유익을 강조하고(이 점에서 참 교회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만 골라서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우파 정치세력에 대한 옹호를 덧붙인다. 이승만에 대한 옹호와 박정희, 박근혜(!)에 대한 찬사와 무고함 호소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특히 종교개혁)가 다양한 분야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다만 그 기여가 어떤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마치 기독교가 유일한 기여자인 것처럼 설명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다지 기독교적이지 않았던 여러 중요 인물들(예컨대 애덤 스미스까지 동원해 가며 그들 역시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과장한다. 물론 사람은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확히 같은 논리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악행에도 기독교(교회)의 문화적 영향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


특히 책 초반 경제와 관련해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자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의 정신이 기독교에서 나왔다고까지 말하지만, 이건 그냥 갖다 붙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선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에는 오랜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가 밑바탕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고, 또 하나 기독교 역사 2천 년 가운데 근대 자본주의 아래서 신앙생활을 한 게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그 이전 천 년 동안은 기독교가 왜 자본주의정신을 만들지 못했다는 말인가(비슷한 비판은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특정한 정치 경제 사조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건 기독교인이 가장 피해야 할 (비합리적인) 태도다. 기독교는 역사상 수많은 상황을 지나왔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왕이나 독재적 군주(참주) 아래서도 신앙생활을 해왔고, 농업과 상업 등 다양한 산업들이 주가 되던 시절에도 그래왔다. 심지어 각각의 시대를 살았던 교회는 당시의 체제와 상황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논리를 개발해 내기도 했고. 에효.





분명 저자는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적 입장과 경제관만을 진리로 놓는 좁은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시야가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대 저자는 자본주의 각종 병폐에 대한 비판을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과 구분하지 못하고(실제로 공격자들 중 일부도 그런 무식함을 표할 때도 있긴 하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라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소명과 직업에 관해서도, 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방식으로서의 사업의 번창이라는 개념이 묘하게 뒤틀리곤 한다는 점은 무시된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모든 부분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아니다. 특히 신좌파운동에 관한 간략한 분석과 우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 견해와도)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우린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히 살피기 전에 우리 편이 한 말이니까 따라야 한다는 식의 집단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하니까.


또, 우파적 가치를 숭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전광훈 일파 같은 광신 집단과는 분명 거리를 두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앞서의 과격한 언사들은 일종의 정치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던 건가 싶기도 한데, 글쎄 지금 자신은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일부 위험해 보이는 구절들도 있지만, 그래도 적어도 합리적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지는 보인다. 이 정도만 돼도 적어도 대화의 상대로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편의 잘못을 좀 더 냉정하게 인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이승만의 독재적 면모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고려를 아주 관대하게 부여하면서도,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 반의 절반도 비슷한 고려를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야심차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하겠다고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기에 실려 있는 게 “유일한” 기독교적 관점, 혹은 성경적 견해라고 볼 이유는 없다. 기독교 우파적 관점 정도가 적절한 명칭이 아닐까 싶다. 분명 괜찮은 관점과 정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저자 자신의 강력한 우파적 관점과 결합되면서 분리가 쉽지 않다. 투뿔 쇠고기라 아무리 좋아도 모래가 잔뜩 묻어있으면 그대로 섭취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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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의 연대기 - 지워진 믿음의 기록
이창익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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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이 재미있다. 새롭게 만든 건 아니고, 조선시대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던 일종의 부적 표상과도 같다고 한다. 세 마리의 물고기가 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하나의 머리를 만들고, 거기에 눈이 하나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이 세 개인 하나의 물고기,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다. 주로 눈에 뭔가 병이 생겼을 때 치유를 기원하며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물고기의 하나뿐인 눈에 못을 박아두고는, 내 눈의 병을 낫게 해주면 못을 빼주겠다고 위협하는 문구와 함께.



이 책은 20세기 초 우리나라(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서 유행했던 다양한 미신들을 신문이나 공식 기록물 등을 참고해 나름 정리해 준 책이다. 책에 소개되는 미신들의 수준이 꽤나 다이내믹하고 버라이어티하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동네 여성들이 나서 근처 산의 신성한 곳을 향해 오줌을 싸거나, 신성한 구역에 묻힌 시신을 파내버리는 건 오히려 약과였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이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신체를 먹었다는 신문 기사는 수없이 등장하고, 몇몇 지역에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그러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미신) 줄에 매어 공중에 달아놓는 풍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하드코어한 삶을 살았던 건지.


책의 후반 두 개 장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신흥종교들을 다룬다. 수십 명의 여성을 첩으로 삼고, 교인들이 바친 돈으로 주지육림에 빠져 살았던 대표적인 사이비종교 백백교의 교주 이야기(아, 요즘도 비슷한 광인이 만든 사이비가 있지 않나)와 그 자식들과 제자들이 만든 분파들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고 있으면 어질어질하다.





단순히 다양한 기사들을 항목에 따라 배열해 놓았을 뿐이지만,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그런 미신들이 당시 유행했는지에 대해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 보려고 애쓴다.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먹고, 간과 쓸개를 빼 먹는 나병 환자들의 모습에서는 그 만큼 병이 주는 절망감이 컸음(87-88)을 읽어내고, 시신을 공중애 매달아 두는 풍장은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으로 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상황(178-179)을 보는 식이다.


또,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신흥 종교에 대한 탄압에서는, ‘조선적인 종교’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추론(34)한다. 일견 나름 일리가 있는 추정들이다. 사람이 사람의 신체를 먹고(사실 이건 다른 맥락에서는 극진한 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신병을 치료하겠다면서 죽을 때까지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구로 때리고 하는 짓을 아무 이유 없이 한 거라고 넘어가기는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합리화하고 넘어가기엔 확실히 여기 소개된 사건들이 충격적이고 엽기적이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제당국에서 한 분석, 그러니까 당시 조선 민중의 비과학적이고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므로, 서둘러 개화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쉽게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판단을 오늘날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건 확실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오늘 우리의 판단에, 오늘날의 상식과 과학의 대답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한 사고의 결과가 도출되었다면, 과거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물론 그래도 인육은 좀...



조금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당시의 역사 자료를 잘 정리해 둔 책이다. 좋은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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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 / 돌베개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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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전체 국가 중 60%를 넘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왕정에서 식민지로, 다시 공화국과 군부독재를 넘어 결국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유일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 상황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요소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원칙으로 꼽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일 테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이 책의 저자는 다수결은 애초부터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럼 민주주의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그 중에서도 아테네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시 일반적인 정치 형태는 왕정(군주정)이나 귀족정, 혹은 그와 유사한 참주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목표는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에 있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참주는 일종의 독재자였다. 귀족정이나 왕정에서의 통치권은 핏줄이라는 나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소유한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한 합법적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참주는 그런 정통성이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건 어떤 참주들은 선거를 통해, 그러니까 다수결로 뽑혔다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뽑힌 거면 민주정이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만, 선거라고 해서 다 같은 선거가 아니지 않은가. 절차적인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선거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거에 제공되는 정보가 심각하가 왜곡, 오염되어서 유권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압적이어서 특정한 선거 결과가 유도되거나 하는 경우를 말한다.


권력을 잡은 참주는 이제 어떤 견제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 정적은 가차없이 탄압해서 반대파의 입을 막으려 하고, 딱히 정상적인 시스템을 따른 조언을 듣거나 하지도 않는다. 고대 아테네에는 이런 참주들이 여럿 존재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결국 아테네는 이런 참주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아마도 당장의 유익이 장기적인 유익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단지 제도만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 시민 개개인의 민주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다른 자연적 평등, 시민 지혜, 바른 추론, 교양 교육 등이 여기에서 중요해진다. 즉, 시민들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그들이 모여 내리는 합리적 결정에 따라 통치되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것.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의 이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고직 십 수 만 명이었던 고대 아테네와 수백, 수천 만 명이 속해 있는 현대 국가 사이의 물리적 차이를 고려하면, 옛 방식을 그대로 오늘날로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변용, 혹은 적용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이 책에선 그 부분이 깊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또, 저자가 찬탄해 마지않는 민주주의가 왜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답이 없다. 그저 민주주의는 옳다는 생각 뿐. 하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이 민주주의는 그 도시 안에서도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았고(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사법살해되었다), 아테네 제국 시기에는 그 범위와 강도가 훨씬 심각해지기도 했다. 저자는 그건 사람의 문제고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가려 하지만, 어떤 일이 어떤 제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그 제도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떤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제도를 바로 폐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단순한 해결책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니까. 그리고 인류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보다 나은 정치제도를 발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까. 어떻게 하면 이 하자 많은 제도를 좀 더 고장나지 않게 끌고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책 속의 참주에 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선거로 뽑힌 참주가 독재자가 될 때,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 소개되는 참주의 특징이 오늘 우리의 최고권력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고 씁쓸해진다. 결국 시민들의 무지함과 무능력이 이런 참주를 국가의 원수로 뽑아 놓은 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을 해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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