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작가인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경우가 좀 있을 것 같다. 나름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던 일본 영화감독이다. 이 책은 그가 틈틈이 영화를 한 편 찍고 편집하는 와중에 한 잡지에 기고한 영화 소개 칼럼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 제목인 “쓰레기통 극장”이 독특해서, 칼럼 제목들 중에 하나인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다. 아마도 이 책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소소하게 자신에게 의미있는 영화들을 소개한 작지만 소중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이건 첫 번째에 배치되어 있는, 작가의 어린 시절 텔레비전 영화 속 드라큘라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는 데서도 살짝 느껴진다.
책은 영화를 소개하지만, 단순히 영화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추억 이야기를 함께 풀어놓는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주인 것 같고, 영화는 대충 가져다 붙인 것 같을 때도 있고..ㅋ
영화 소개 칼럼 뒤에는 그걸 쓰고 있는 작가의 지금 상황에 관한 글이 주절주절이어진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짬을 내 글을 쓰고 있기도 하고, 미국까지 넘어가서 편집과 후반작업을 하는 중이기도 하고, 영화가 완성되어 시사회가 시작되었지만, 정작 감독 자신은 또 다른 작품을 찍는 중이라 첫 상영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뭔가 소소하고,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영화 감독의 이야기를 살짝 엿보는 것 같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 두 번째 부분의 편집을 왜 이 모양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본문보다 글씨체도 훨씬 작고,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폰트를 사용했다. 뭔가 덜 정형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나 보다 싶지만, 폼을 내더라도 책은 읽는 사람 눈이 편하게 하는 게 가장 기본이다. 내가 편집장이었다면 이런 편집은 무조건 반대했을 듯.
아무래도 연배가 나보다 높은 감독인지라, 익숙하지 않은 영화도 많다. 하지만 최신의 책이 늘 좋은 게 아니듯, 오래된 영화들 중에서도 고전처럼 좋은 영화들은 늘 있는 법이니까. 영화에 관심이 좀 있다면 즐겁게 볼 수 있을 만한 책.
제목이 흥미롭다. 루터는 종교개혁자이고, 미켈란젤로는 유명한 화가이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떡하니 붙여놓고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책의 부제는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이다. 이것까지 보면 이 책이 무슨 16세기 유럽의 종교나 신학적 문제를 다루는 책처럼 보이지만, 그러면 미켈란젤로가 등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루터에 상응하는 가톨릭교회 측 인물이 나와야지.
실은 이 책은 종교개혁 시기의 유럽 미술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이고. 다만 당시 유럽의 미술을 비록한 예술은 교회와 떼어 놓고 말할 수 없었다는 걸 안다면 저자의 의도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저자는 당시의 예술을 종교적 상황과 관련지어서 설명하고자 했던 거다.
종교개혁이 한창일 당시, 개혁자들은 교회의 미술이 오용되는 모습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뭐든지 종교개혁 세력이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던, 그래서 한때 “반(反)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는 가톨릭교회와 교황권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연이 이런 분위기는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에도 반영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논지다. 애초에 공의회는 사실적인 것과 성경과 전통에 부합하는 내용만 그릴 수 있다는 교시를 통해 미술에도 영향을 끼치려고 했다.
많은 예술가들도 하는 수 없이(당시 교회는 예술품의 주요 주문자들 중 하나였다) 이런 지시에 따른 작품들을 제작하지만, 예술가란 사람들이 누군가. 누가 그렇게 강하게 통제 드라이브를 걸려고 하면 더 멀리, 교묘하게 튀어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엄격한 규정을 조금씩 벗어나면서도,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뜻을 잘 반영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책에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가들(티치아노, 틴토레토, 카라바조, 루벤스 등등)의 작품을 컬러 도판과 함께 해설되어 있다. 약간은 기괴할 정도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인물을 그렸던 매너리즘 화풍이 어떻게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가는지, 저자의 설명과 함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눈에 확 들어온다. 좋은 설명이라는 뜻.
물론 이쪽이 워낙 아는 만큼 보이는 부분인지라 크게 흥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게 예술 작품인 동시에 성경 속 여러 인물들을 그린 종교화이기도 해서 그쪽의 관심사가 있다면 또 볼만한 포인트일 것 같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결국 미술에 집중하고 있는 책이면서도, 당시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사상적 투장에 관해 꽤 자세하면서도 좋은 분석과 정리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처럼) 미술에 영 조예가 없더라도, 이 책의 1부만으로도 한번쯤 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는 유흥업소에서
빈번하게 성매매를 알선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는 유흥업소에서 성매매가 종식되도록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남성 손님의 안전한 성구매를 위해
여성 종사자의 신체를 관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유흥종사자는 주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아야 유흥주점에서 일할 수 있다.
- 황유나, 『남자들의 방』 중에서
비평 부문 퓰리처상을 받고, 뉴욕타임스에서 30년 넘게 서평란을 담당했던 저자가 쓴 서평들을 모은 책이다. 저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이 정도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이 책이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물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한정.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조부모대에 미국으로 건너와서(생각해 보면 당시는 일본인들에 대한 경계가 굉장히 심했을 듯)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가”로 불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까. 그리고 그 노력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역시 책 읽기였다.
이 책에는 그런 저자가 읽었던 책들 중 소개하고 싶은 것들이 모두 아흔아홉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글들은 한 권 이상의 책을 소개하고 있으니, 실제로 등장하는 건 100권이 훨씬 넘는다. 서양의 고전부터 우리 시대의 글들까지, 소설과 시, 논픽션과 연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이 많은 책들 중에 직접 읽어본 책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살짝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 못 읽어본 책이 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많은 책들 중에 이런 저자와 내가 겹치는 책들이 몇 권 있다는 데서 (독서에 대한) 의지를 북돋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그렇다 독서가들은 모든 부분에서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술꾼들이 온갖 이유로 술을 마시는 것처럼).
저자가 뉴욕타임스에서 서평가로 활동을 했던 마지막 시기는 2017년이었다. 이 해는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을 한 해였고, 저자는 그와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바마가 가고 트럼프가 들어선 미국은 분명 세계에 주는 메시지가 있었고, 책 전체에 (특히 역사나 논픽션에 관한 서평에는) 이런 우려가 잔뜩 묻어나온다. 문제는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세계 곳곳에 이런 작은 트럼프들이 우후죽순 돋아났다는 것이고, 이런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각각의 항목들이 A4 한 페이지 정도(책으로는 서너 페이지 안팎)로 짧게 쓰여서 읽는데도 그리 부담이 없다. 물론 방대한 (이 책의 경우 주로 미국의) 역사와 문학사, 정치와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여기에 소개된 내용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겁낼 필요는 없는 게, 그런 걸 알아보자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데 즐거운 거고.
이 정도의 책을 가지고 좀 더 넓은 독서로 나아가는 시작점으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여기 소개된 책들 중 몇 권을 따로 챙겨뒀다. 당장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한 열 권 남짓. 또 나중에 보면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올 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개방적이고 느긋하고 성적 중립을 지키는 관대한 이단과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경직된 정통을 서로 대비시키는 일은
역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접근법은 오늘날의 문화에 맞춘 산뜻하고 매력적인 대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이다.
- 앨리스터 맥그래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