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영화 느낌.
1990년대 말엔 다양한 지구멸망 시나리오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 뭐 이런 영화가 그 때만 나온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지만, 또 세기말적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면서 그런 영화들이 꽤나 유행했던 것 같다.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며 알게 되었지만, 지금 말하려는 두 개의 영화,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가 같은 해(1998년)에 개봉했다고 한다.
두 영화는 뭔가 설정이 비슷하다. 선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지구를 행해 거대한 소행성이 날아오고 이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상황을 영화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겟돈”은 날아오는 소행성에 우주선을 타고 착륙해,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폭탄을 장착해 터뜨린다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제로 각국의 우주관련 연구기관에서는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새 영화에 관해 리뷰를 하면서 왜 이 오래된 영화를 길게 물고 빼느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영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2020년대 영화라니... 물론 모든 창작물이 완전한 새로운 창작일 수는 없다지만, 이건 뭐.. 분명 CG야 그동안 흘러온 세월만큼 발전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감성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이제는 좀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어느 날 갑자기 달이 지구를 향해 나선형 하강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각종 문제들(주로 달의 인력 때문인 듯)이 발생하고, 웬만한 기업 회의실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나사 기지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지 못하는데, 미국 국방부에서는 수많은 핵미사일을 날려 달을 폭파시키겠다는 한심한 계획만 내고(달이 없어지면 급속한 환경의 변화로 인류는 아마 얼마 가지 못해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 천체관측자의 말을 따라 달로 향하는 로케트(그것도 박물관에나 있었던)를 타고 날아가는? 이게 최선인가요?
달이 초거대구조물이었다고?
영화의 가장 큰 상상력이라면 역시 달이 초거대구조물이라는 발상이다. 아마추어 천체관측가인 KC 하우스먼은 어느 날 달의 궤도가 정상범위를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달이 엄청나게 큰 인공구조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한다. 당연히 그의 말은 나사 관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잊힐 뻔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사에서도 달 궤도의 변경을 깨닫고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내용.
여기에 나노로봇 군체들로 그려지는 비인류 지성체가 등장하면서 달이 외계인이 만든 거대한 기지일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직접 로켓을 타고 달의 내부에 형성된 금속제 구조물들까지 보여주면서 이런 예측이 맞나 싶을 즈음,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 알고 보니 달은 인류의 오래 전 조상들이 만든 인공구조물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AI가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리어 멸종되고 말았다는 것. 그 AI가 다시 지구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달을 움직이고 있다는 건데.... 하...
달이 알고 보니 지구 침략을 위한 비밀기지라는 설정은 우리나라엔 지난 2012년 개봉한 핀란드 영화 “아이언 스카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쪽은 히틀러가 전쟁에서 패하기 전에 달로 로켓을 쏘았고, 그 후손들이 나치적 삶을 달 기지에서 이어오고 있다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 영화였는데, 상황은 훨신 말이 안 되어 보이긴 해도 또 블랙 코미디만의 위트가 느껴져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웃음마저 주지 않는다. 달 전체가 위장된 인공구조물이라는 설정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어 보였고, 그건 차라리 지구 전체에 추진기를 달아 통째로 멀리 옮기겠다는 내용의 중국영화 “유랑지구”류의 허풍과도 비슷해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보는 사람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빈틈투성이.
억지로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오긴 했는데, 그 사이사이의 설정이 빈틈투성이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주인공 세 명이 우주선에 타야 하는지도, 그 중 두 명이 하필 이혼한 전처와 전남편일 이유는 무엇이며,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우주인으로 활동해 본 경력이라도 있는데, 관련 훈련이 전혀 없었던 아마추어 천체관측가가 나머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그가 새로운 가설을 제기해서?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는 로켓 발사에 그런 모험을 하는 이유는 영화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달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도 정작 주인공들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오래 전 조상들, 그러니까 AI의 반란을 초래해서 멸망했던 조상들이 남긴 프로그램이었다. 주인공 일행이 타고오다 완전히 망가진 우주선을 순식간에 수리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가지고 있었던(근데 왜 망했어..).
더구나 그렇게 달에서 벌어지는 일도 뭐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는데, 위기감을 조성하려고 했던 건지 중간 중간 나오는 지구의 가족들 이야기는 또 얼마나 어설픈지. 주인공 커플이 이혼을 했다고 잔뜩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아들내미나, 그 아들내미와 지구가 멸망해 가는 와중에서도 썸을 실현하는 중국계 보모 여자애는 또 왜 나오는 건지(영화의 제작에 중국 자본이 합작 형태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게 원인은 아니었겠지?)
많은 재난영화가 그렇지만, 그냥 정신없이 인물들의 관계가 뻗어나가고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 호감가는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링컨 고등학교 학생들은
그 무례한 욕설과 저주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모욕을 당할 때마다 도랑에 빠진 기분이 든다면
어떻게 하루를 살아낼 수 있겠는가?
살다 보면 필요한 곳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터득하기 마련이었다.
- 콜슨 화이트헤드, 『니클의 소년들』 중에서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새빨간 원색의 표지에, 제목 역시 원색적이다. 정치와 무당, 그리고 김어준이라니. 심지어 저자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물평을 해 온 강준만이다. 저절로 손에 한 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제목에 실린 것처럼 김어준이라는 인물을 ‘정치 무당’으로 단정 짓고 그의 행적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개인적으로는 김어준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그가 시작했던 딴지 일보를 한 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고, 그가 한다는 유튜브도 애써 찾아들어보지도 않았고, 지금은 그만둔 TBS의 청취율 1위였다는 프로그램도 일부러 찾아 들어본 적은 없다.(유튜브 알고리즘에 떠서 몇 번 보긴 했다) 다만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한두 번 본 것 같긴 하고, 그와 관련된 뉴스나 기사를 좀 본적이 있는 정도.
저자가 김어준을 강하게 비판하는 지점은 몇 군데로 요약이 가능하다. 먼저 김어준 특유의 음모론 제기다. 대부분의 음모론들이 그렇듯, 현실에 대한 불만에 의심을 몇 스푼 섞어 만들어 낸 거대한 음모론은 한 번도 증명된 적이 없었지만, 김어준은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나 발언의 철회를 한 적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거나, 새로운 이슈를 던져 덮어버리는 식이다. 전형적으로 말에 책임지지 않는 캐릭터라는 말.
또, 그가 정치적 반대파에게 쏟아 붓는 혐오적 표현들, 악마화를 하는 발언들도 문제로 지적된다. 기본적으로 이건 대화나 타협의 용어가 아니라서, 이런 표현들에 젖어버리면 근본적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정치적 과정이 무너지고 만다. 결국 상대를 쓰러뜨리고 짓밟아야만 되는 냉혹한 정치판이 되고 만다는 것.
역지사지의 부족도 또 한 가지의 문제다. 우리 편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고, 상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음모론과 혐오발언을 통해 물고 늘어지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런 언행은 자기편의 속은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의 반성을 이끌어 내기는 무리고, 나아가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환멸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 된다.
그가 공영방송을 사적인 정치적 견해를 반복해 발화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물론 여기에 조중동은 더 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은 민간 언론사이고, TBS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 정권이 바뀌고, 이제 보수 진행자가 보수를 옹호하는 방송을 한다면 민주당 쪽에서는 가만히 있겠느냐는 지적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지적은 좀 과한 면이 있다 싶으면서도, 근본적으로 그 내용 자체는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어준에 대한 지지는 민주당 계열의 지지자들 가운데서 압도적이다. 저자는 김어준이 마치 지지자들에게 교주처럼 굴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류가 없고,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존재.
스피커로서 존재감이 워낙에 커져버린 김어준에게 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들도 줄서기 바쁘고, 그런 김어준과 대화를 하다보면 저절로 강성발언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도 인상적이다. 그가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의 템포와 수위를 자신에게 동기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은 꽤 날카롭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인식인은, 김어준 자신에게는 좀 억울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이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좀 책임감 있는 언행을 보여야 한다는 비판으로 읽으면 어떨까 싶다.
물론 그를 비롯한 지지자들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려갔던 것이 큰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종의 죄책감은 그를 그렇게 몰아갔다고 여겨지는 이명박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발전했고, 아마도 그 즈음에 김어준과 그 멤버들이 크게 뜨기 시작하지 않았나.
상대가 막 나가는데 우리만 점잖게 나가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증오나 혐오는 무너뜨리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뭔가를 세우는 데는 적합한 도구가 아니니까. 그리고 여기서 그런 증오와 혐오는 보수 정당에서도 못지 않게 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옳다. 다만 여기서는 김어준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주제로 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김어준의 과격하고 거침없는 발화가 늘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런 발화가 지지층의 속은 시원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결코 전체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당장 지난 대선만 해도, 선거 즈음해서 민주당 계열의 여러 스피커들이 경쟁적으로 나와 낙관적 전망과 함께 비슷한 종류의 강성 발언을 쏟아냈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상대당 후보가 연일 헛발질을 해댔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김어준을 비롯한 강경 스피커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지고 여기에 국회의원들까지도 부화뇌동하는 모습에 적잖은 사람들이 일종의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 정치는 분명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 김어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지나치다. 하지만 그의 책임이 또 전혀 없다고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번도 선출되어 본 적이 없는 그가 어느 샌가 선출직 국회의원들의 태도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 자체만으로도 정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개인 방송에서 개인 자격으로 뭐라고 하던 그건 그의 자유지만, 그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건 결코 민주당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지적은 어쩌면 민주당을 위한 고언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자의 최근 행적이 보수 쪽으로 전향(?)을 했다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지라,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랐을 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쩌다 보니 저자의 평가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근데 이와는 별개로 책 자체가 잘 만들어진 것 같진 않다. 꽤나 동어반복이 잦고, 책의 내용 대부분이 여기저기서 가져온 발췌문들이다. 사실 이 정도의 내용이면 30페이 정도로 요약도 가능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구입한 지 제법 된 책으로, 책장에서 기다리다 이제야 손에 들었다. 그런데 첫 몇 장을 읽어나가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이 책 이미 읽은 책인데?’ 그랬다. 이건 읽은 책이었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초기 기독교 신자의 수와 증가율 등의 인상적인 수치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뭐 한 번 읽은 책이라고 해서 다시 읽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책이 흥미로우니까.
그래도 예전에 읽었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 이전에 쓴 리뷰를 찾아봤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없었다. 읽은 책 전부를 리뷰로 쓰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혹 누락됐나 싶어서 블로그가 아닌 파일 폴더를 뒤져봐도 없다. 혹 책의 제목이 바뀐 건가 싶어서 저자명으로 검색해도 없다. 이 정도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난 이 책을 안 읽었던 걸까? 하지만 책 후반부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계속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인지...
엊그제 한 지인이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어쩌면 다른 책에서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 것을 본 걸지도 모른다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왠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진실은 뭐였을까...
책은 기독교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다. 흔히 기독교 관련 책 하면 신학적인 관점이나 신앙적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관점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한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충분히 제대로 된 분석과 평가가 있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그냥 있는 자료를 쭉 가져다 모아놓는 것만으로 해석이 되는 건 아니다. 필연적으로 어떤 도구를 동원해 분석을 해야 하는데, 신앙적 관점은 “지금의 나”가 더 중요하기에 이런 분석에 애초에 별 관심이 없고, 신학적 관점을 띠고 있는 책들의 경우에도 제대로 된 분석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신앙을 드러내는 식의 결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신학계가 사회와 유리된 채 연구를 지속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보수성을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나 교파에서는 더더욱 교회의 일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해석이나 접근을 터부시하는 경향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의 놀라운 부흥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 나온 건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신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소개를 보면 원래는 언론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활동하다가 UC 버클리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후 사회학자와 비교종교학자로 수십 년간 교수직을 맡은 사회학자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를 가지고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니 내용도 충실하다. 그리고 당연히 교회사만 읽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부분도 있다.
책에는 온통 신선한 관점들 투성이다. 1장은 초기 기독교회의 놀라운 성장 속도에 관한 내용인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저자는 기독교가 10년에 40%의 성장률을 이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고 보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던 시기 로마 인구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흔히 생각하는 “바닷물의 염도와 비슷한 3~4%의 기독교인” 같은 개념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2장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계급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 같은 하층민들이 주류가 아니라, 오히려 중류층과 상류층에서 광범위한 개종자를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신앙체계의 모순점을 깨닫고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하는 부류는 어느 정도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교회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역시 여기에서 일반적인 그림은 교회가 일찌감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는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기독교는 꽤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첫 개종 대상자로 여겨왔고, 실제로도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4장과 5장은 초기 기독교의 급성장에 영향을 준 요인들을 다룬다. 4장은 만연한 역병과 그로 인해 파괴된 인적 네트워크. 결과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선택하기에 적합한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또 5장은 교회 내 여성들의 위상이 꽤 높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유아(주로 여아나 장애아) 유기나 살해, 낙태, 유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당시 교회는 이런 여성에 대한 학대적 조치들을 반대했고, 그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나아가 신자들의 출생율과, 비신자 남편들의 전도까지 용이해졌다는 것.
7장은 당시 동방의 중요한 도시였던 안디옥(안티오키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끊임없는 파괴가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안정감을 줄 수 있었을 지를 묘사하는 장이다. 그리고 아마도 8장은 가장 논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인데, 바로 순교자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의 교회사적 관점에서는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순교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만한 보상이 있었단 말이다.
한 장 한 장 따로 날을 잡아서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을 정도다.(유튜버 직업병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제시된 내용이 완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연구라는 게 그런 식으로 뭔가를 입증해 내는 게 아니다. 나름의 논리에 따라 어떤 가설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또 이미 지나간 일, 그것도 2천 년이나 지난 일을 확실하게 입증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확실히 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나 여느 교회사가들이나 볼 수 있는 자료는 한정적일 텐데,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게 흥미롭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전날 무슨 일이 있었든지
회의에 꼭 참석해서 내용을 경청하고
업무에 관련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의무인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면
더 이상 그 자리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말도 잘 못하고, 귀도 잘 안들리고, 꾸벅꾸벅 졸기나 하는 사람은
이사나 위원에서 사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 소노 아야코, 『노인이 되지 않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