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온 종교개혁의 진실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 헤르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개신교인들에게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절대로 침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의 보통의 신자들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지도 모르겠지만, 신학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목회자들처럼 관련 내용을 학습해 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건의 의의를 중요하게 기리는 것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개신교 진영에 속하는 학자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이 유럽의 정치와 경제,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막스 베버였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는 개신교가 갖고 있는 특유의 사상이 자본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 책의 저자 로드니 스타크가 비판하는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몇 가지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종교개혁을 신화화하고 있었던 개신교인들에게는 자못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하는 건 종교개혁으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 여기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로 넘어온 많은 지역들은, 실은 그 지역의 통치자들의 정치적인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반 신자들의 경우 신앙심이 특별히 강해진 적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지역의 경우 개신교를 선택하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힘과 재산을 차압할 수 있었던 유인책이 있었다는 말이다(반대로 이미 자국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던 나라들―대표적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은 굳이 개신교로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반면 당시 일반 대중들은 가톨릭에도 개신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건 당시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입증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 민중들의 불경건함, 비어 있는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에 관해 남긴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는가, 과장의 여지는 없었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2장에선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다양한 국교회들이 오히려 개신교의 부흥과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루터교와 성공회는 처음부터 국교회의 성격이 확고했는데, 이는 비국교도에 대한 핍박뿐만 아니라, 독점적 위치에 있으면서 변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또, 오늘날의 세속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국가 공무원이나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국교회는 오히려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무신론자가 교회 관련 부처의 수장이 되거나, 심지어 세속철학에 근거해 수정된 교리를 국가차원에서 결정하는 식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민족주의의 탄생에,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명에, 5장과 6장에서는 과학혁명과 개인주의의 출현에 종교개혁이 끼쳤다고 주장되는 과장된 내용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다. 자본주의나 과학혁명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면, 수세기에 걸쳐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물이다. 당연히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어 왔다는 것.


마지막 7장과 8장은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주제다. 흔히 세속화는 교회와 신앙의 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비어가고, 기독교가 곧 소멸할 거라는 예상이 많이 떠돌고 있지만, 실제 사회학적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종교인구,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


또,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열이 오히려 서로를 경쟁시켜 더 열정적으로 신자를 확보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반면 국교회가 지배적 종교인 나라들에서는 종교적 열정이 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듣는 유럽의 비어있는 교회, 술집과 클럽으로 변하는 교회가 다 그런 것들이라는 설명.





전반적으로 책에서 담고 있는 다양한 주장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특히 종교개혁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신성시 되어서 제대로 된(비판적인) 고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하고, 또 교회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학적 연구 없는 일방적인 주장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 찬양하는 방식은 분명 주의해야 할 부분이니까.


다만 여기에 실린 주장을 대부분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개혁의 의의가 손상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에 덧씌워진 부가적인 효과 주장에 대한 비판이니까. 예컨대 종교개혁이 자본주의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종교개혁 자체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오해들을 바탕으로 개신교회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를 폈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꽤 재미있게 읽었다. 애초에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지만, 방금 전에 주문을 해버렸다.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소개해 주는 영상을 만들어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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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영상입니다. ㅎ
제가 사랑하는 C. S. 루이스의 책을 두고 하는 이상형(?) 월드컵!
2부는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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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원제.


영화가 시작될 즈음 원제로 보이는 어구가 크게 지나간다. "A Common Man", 직역하면 보통 사람 정도가 되겠다. 이 제목이 어째서 “라이브 테러”같은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뀌었을까.


영화는 원제처럼 아주 평범해 보이는(하지만 머리털은 없어 조금은 수상해 보이는) 한 사내를 따라 진행된다.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의 길을 거니며 큰 가방을 메고 버스와 기차를 타고, 쇼핑몰을 들르고, 시장에 들려 아내가 말한 토마토와 채소를 구입한다. 그리고 경찰서까지 방문해 지갑 도난신고까지 하는 남자.


얼마 후 한 건물의 옥상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자신이 지금 네 개의 시한폭탄을 장치했으며, 그 중 하나가 경찰서에 있다는 것. 실제로 경찰서에서 시한폭탄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와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하는데, 남자가 요구하는 건 감옥에 갇혀 있는 네 명의 범죄자들을 자신이 지시하는 곳까지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원제는 이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의 평범함을 부각시킨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사내가 잔인한 테러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폭탄테러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 가면 여기에 반전이 더해진다. 남자가 범죄자들을 끌고 온 건,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남자는 평범한 사람들을 수없이 희생시키는 테러범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하는 무능해 빠진(그리고 무능하기까지 한) 정부와 사법기관들에 대한 평범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능한 심판.


영화는 테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테러에 젖어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테러가 횡횡하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심지어 테러범을 잡은 후에도 그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무엇을 믿고 살 수 있을까.


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폭탄 테러 같은 것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번에 죽는 사고들은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만 시끄러울 뿐,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고 흐지부지 잊히곤 한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에서는 이태원 참사의 주무 장관의 탄핵안을 기각했고, 기각 판결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짓이 지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여당과 정부의 꼴사나운 행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이전에는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면 소위 정치적인 책임이라는 걸 지겠다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런 최소한의 책임지기도 사라져버렸다. 백주대낮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아파트에 설계대로 철근이 들어가지도 않은 채 시공이 되고, 침수 위험을 경고했는데도 교통통제를 하지 않아 지하차로에서 사람이 죽어가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기껏해야 말단의 담당자에게 뒤집어씌우고 만다.


자, 이런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의 행동에 분명 불법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그가 경찰서 이외의 공간에 숨겨두었다는 폭탄은 처음부터 폭발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영화 말미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던 건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심판하지 못한 범죄자를 누군가는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정의에 대한 감각.




자력구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을 국민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쉽게 말해, 무슨 억울한 피해를 당하더라도 직접 갚아주지 말고, 법적 기관에 보복을 맡기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사적 보복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잉을 막으려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국가기관이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응분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문제는 이 기본적인 과정이 어그러질 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감각과 달리 한줌밖에 안 되는 일부 인사들이 법의 제정과 그 철학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 결과, 우리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문제인 양, 또는 처벌의 본질이 그가 저지를 악행에 대한 보응이 아니라 그를 개선시키는 것인 양 착각하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범죄자들은 사법제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보통의 시민들은 언제 범죄의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최근 이런 사적 보복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자주 제작되고 큰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은 단지 이런 대중문화로의 반영으로만 끝나지 않고, 결국 불안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영화 속 남자는 결국 의도했던 대로 네 명의 악질 테러범들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그 네 명 이외도 또 다른 테러범들은 출현할 것이고, 사법부는 여전히 무능할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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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 중산층 집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커졌다고 한다.

50년간 사람의 몸이 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수는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은 이렇게 계속 커져 갔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커져 버린 집의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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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종교적인 것 같아도,

우리 마음은 사실 이 시대의 화려한 각종 우상이 지배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오랜 세월 우리가 숭배해온 많은 우상이 사방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 팀 켈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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