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과 간략한 내용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야 처음으로 손에 들어본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아, 어쩌면 좀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너무 쉽게 판단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적합한 시기에 손에 든 것일 지도.
책은 한 배교한 가톨릭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라는 이름의 신부가 현지에서 신앙을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던 그의 제자들이 진상을 확인하겠다는 일념으로 직접 일본으로 향했고, 두 명의 신부들이 은밀히 일본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혹한 탄압을 시행 중이던 일본 정부에 의해 결국 잡히고, 그들의 선배이자 스승이 처했던 운명에 똑같이 처하게 된다. 가난하고 무식한 일본의 신자들이 자신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른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배교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명한 선교사의 배교 소식은 로마 교황청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그건 단지 한 사람의 배교가 아니라 “당시 유럽인의 눈으로 보면 세계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은 나라”에 의해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13)이다.
자신들은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멋있는(!) 순교를 선택할 거라고 여기며 일본행을 감행한 젊은 신부들은, 그 땅의 상황에 대해서 놀라고 당황한다. 교묘하게 그들의 배교를 유도하는 일본의 관리들은 신부들을 직접 고문하는 대신, 그들을 의지하고 있던 신자들을 잔혹하게 괴롭히고 죽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과연 옳은 모습일까.
작가가 만들어 낸 이 독한 딜레마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작품 속 로드리고의 선택을 두고서 그가 정말로 배교를 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의견이 분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성화를 밟는 것을 누가 매도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가 모든 세상의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누군가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는 곧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게 될 것이다. C. S. 루이스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우리가 지나치게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심을 두는 반면,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로드리고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을 따르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로드리고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나름의 판단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지 성화를 밟는 것뿐인데 뭐가 그리 어렵겠느냐고 힐난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 어떤 행동은 단순히 신체를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또, 우리의 몸과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무엇도 아니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신념을, 믿음을 꺾으려고 하는 함정을 파는 사람 대신, 그 함정에 빠진 사람을 비난하는 행위 역시 옳지 못하다. 로드리고가 처한 상황은 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 책임을 오롯이 그에게만 돌리는 것도 무자비한 일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침묵에 곤란해 한다. 그분을 믿는 이들이 이렇게 수없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왜 그분은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성경 속 사건들처럼 오늘의 일들에도 그분이 나타나셔서 악인들을 처벌하고 의인들에게 상을 주셔야 하지 않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저 밖에서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통의 신음을 내뱉으며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이들을 구해주시는 게 옳지 않은가.
하지만 이 질문은 결국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한다. 성경 속 욥은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낸 후 하나님의 보상을 받았지만, 로드리고는 스스로 배교했다는 죄책감과 열패감에 빠져 영혼 없는 생활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욥과 같은 보상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서서히 사그라졌을까.
이 역시 독자에 따라 다른 결말을 떠올릴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어떤 의미로) 결말을 직접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게 작품의 완결성을 더욱 높여주는 느낌이다. 재능 있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마무리다.
아마도 이 책과 그 주인공에 관해 내리는 다양한 평가는,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을 드러내는 진술일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또 어떤 모양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자연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정한 철학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정당한 것으로 비준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어떤 체험이 철학을 정당한 것으로 비준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은 (적어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어떠한 신학적·형이상학적 명제도 입증하지 못합니다.
다만, 자연은 그런 명제들의 의미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 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중에서
물론 내가 유행을 잘 따라가는 인싸는 아니지만, 요새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신이 어질어질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용어는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었다. 무려 강간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명이 붙어 있는 이 용어의 의미는, 그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는 뜻에 불과하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동급생들 폭행하거나 학대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걸 자랑스럽게 법적으로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적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불쾌감을 표하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그런 불쾌감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강간’과 같은 행동과 동일시하는 건, 그래서 법적인 처벌까지 강제하는 건 우선은 용어의 혼란을 일으킨다. 강간의 정의를 시선에 둔다면, 욕설을 살인이라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를 테러행위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아, 오래 전에 대학교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며 여성을 바라보는 행위를 성범죄라고 우겨댔던 어떤 여성들이 있긴 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우리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는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저명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도 같은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불쾌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 마디를 강간이라는 단어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36)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에 대한 통계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맥이 존재한다. “정신적인 압박”을 “육체적 침해”와 동일시하는 조사에 대해 그는 “황당하다”고 말한다. 여성폭력에 관한 높은 긍정응답률은 애초에 잘못된 사고에 기초한 설문내용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것.
다시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페미니스트, 그것도 저명한 운동가이다. 그가 이렇게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 관해 강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서양 기준으로) 6, 70년대 시작된 평등주의적 페미니즘 운동과 1990년대에 시작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 사이의 투쟁 노선의 차이가 그 배경에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잘못된 길”은 급진주의적 페미니즘의 난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종류의 페미니즘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남녀평등이냐 여성의 특별함이냐의 문제인 듯하다.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면, 최근의, 그리고 현재 주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이며 그런 피해자를 위한 특별대우가 필요하다는 말로 요약된다. 최근의 PC주의의 유행과 함께 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장은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은 채, 아니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공격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저자가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먼저 이 운동은 진짜 희생자와 가짜 희생자를 혼동함으로써 좀 더 급한 투쟁을 간과하게 만든다. 몸에 쫙 달라붙는 짧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의) 남성들을 시선강간범으로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행동이 되는 동안, 정말로 심각한 차별을 받는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어가야 할 힘과 시간이 낭비된다는 말이다.
또, 래디컬 페미니즘은 결국 언론과 각종 문화 매체에 대한 검열과 삭제라는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건 성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감시하는 일종의 전제주의적 행태다. 누군가 불쾌하다고,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제 곧 그것은 금지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익히 잘 아는 고전 문학 속 일부 표현이 PC주의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되거나 원래의 단어가 “교정된 채” 새롭게 출판되는 경우도 실제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극단적인 사람들끼리는 확실히 언동이 비슷해 지는 것 같다. 문제는 검열과 삭제를 초래하는 원인이 매우 모호한 어떤 사람들의 기분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가끔은 헷깔리는 바로 그 기분 말이다.
여성의 태생적 피해자됨을 강조하는 건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운동의 초점이 모아지도록 만든다. 이제는 남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의무이자 명예가 되어버리는 수준이다. 저자는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남성적 힘의 남용에 대한 투쟁이 아닌 남성 자체에 대한 투쟁이 될 때, 결국 두 성은 격렬한 대립만 하게 될 뿐이다. 또, 모든 여성이 피해자라는 서사 역시 사실이 아니다.
또, 남성에 의한 폭력에 비해 그 수치가 낮긴 하지만, 여성에 의한 폭력 또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일부러 눈을 감고 있으며, 자신들의 피해자 서사의 틀에 맞지 않는 일부 여성들(예를 들면 매춘부들)의 주장은 거짓이나 조작된 것으로 매도된다. 그러는 한편 여성의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모성본능에 대한 과도한 추앙을 초래하기도 하고, 남녀 사이의 강한 분리주의는 오히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라는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보기에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끝까지 어떻게 될지 사고하지 않은 채, 눈앞의 불쾌함을 해소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특히 남성을 그저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고, 여성들만의 둥지모임으로써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지적에는 공감이 간다.
끝까지 생각하지 못하니 논리적 모순이 난무한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라는 주장은 여성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들의 또 다른 구호와 배치된다. 또 여성의 “태생적”인 특징을 강조하려다 보니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모성애적 측면과 여성적인 성격(부드럽고, 꼼꼼하고, 포용적이고 하는 식의)을 부각시키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임신중절의 권리(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태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뺏는 일)를 주장하는 또 다른 흐름과도 배치되지 않는가.
저자는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두 조류 사이에 끼어서 길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성들이 좀 더 이른 시기에 나온, 좀 덜 급진적인 대신 남녀평등을 기초로 한 페미니즘 투쟁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자기비판적인 내용들이 그다지 담겨 있지는 않아서, 또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성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측면에서, 남성에 대한 고발과 여성의 우월함, 혹은 고립된 여성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한 주류 페미니즘보다는 좀 더 공감의 여지가 많아 보이긴 하다.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고, 각각의 주장과 강조점이 꽤나 다르다는 것, 이름에 여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두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 등 생각해 볼 만한 꺼리를 던져주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