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롯한 대다수 개신교인들에게 수도회, 혹은 수도원은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주제다. 사회를 등지고 자기들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무슨 도를 닦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실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전통에서 이런 생각은 당연히 조금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 역사 속 수도회 전통을 통시적으로 훑어보는 이 책에서, 수도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수도회는 세속화의 물결에 넘어가는 “제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이건 최초의 수도사들이 출현한 시점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기 완성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재림의 긴박성을 믿고 이에 따라 살기를 원했던 이들이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세속화의 위협을 예지하고 이를 피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회라고 불릴 만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은둔자들로 대표되던 초기 수도적 삶은 이제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또, 서로를 감시/경계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수도원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베네딕투스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수도규칙. 기도와 노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규칙서는 중세 기간(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의 표준규칙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애초에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시작된 수도회였지만, 그렇게 모인 수도원이 각종 기부 등으로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이니 시토회니 하는 수도회들도 모두 처음에는 청빈과 경건을 강조했으나, 그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결국 애초의 이상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탁발 수도회였다. 말 그대로 구걸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이상을 설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이들은 앞선 수도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측면이 강했던 데 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도회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빈을 위한 구걸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는 평안한 삶으로 변질되었다. 이미 프란체스코 생전부터 청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한 온건파가 승리한다. 다시 한 번 초기의 이상이 희미해진 것.
이런 일은 수도회 역사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그것 봐라’, ‘처음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와 같은 논조로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처음부터 수도회 운동은 제도 교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수도원의 역할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 시대의 교회가 놓친 부분을 일깨웠다면 수도회 운동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당연히 수도원 해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말을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즈음 유럽 각지에서는 수도원 해체가 연달아 발생했다. 물론 당시의 여러 수도원은 지나치게 부유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기득권층과 밀착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수도원 해체로 이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한 수순이었다. 저자도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제도 교회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수도회가 사라지면서, 교회가 국가에 더욱 밀착해버리는 결과가 나왔다. 이제 제도 교회의 문제를 삶으로 반박하고 교정의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자리가 비게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각국의 개신교회는 국교회로 전환되는 일이 많았다. 칼뱅의 스위스 개혁교회도, 루터의 독일 교회도, 잉글랜드의 교회나 북유럽의 여러 교회들이 다 그랬다. 그리고 교회가 국교회화가 유발한 문제는 오늘의 유럽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수도회 운동의 오늘에 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회퍼나 토머스 머튼 같은 인물들에게서 현대의 수도회 운동의 자취를 찾고, 라브리 공동체나 떼제 공동체에서 그 실천을 발견한다. 물론 이런 운동들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과거의 수도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제도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름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면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제도 교회와 수도회 운동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살펴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각 시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이에 대한 수도회 운동의 반응에 주목하며 읽어보는 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밝히 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좀 더 천천히 읽으면서 내용을 함께 나눠봐도 좋을 듯.
쑨원은 자신의 혁명 동기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모세의 이야기와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킨 예수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혁명은 불이고, 그리스도교는 기름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혁명만 보고, 나의 신앙을 보지 못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불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 송철규, 민경중, 『대륙의 십자가』 중에서
최근 잇따라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직사회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요새 언론들이야 클릭장사가 가장 중요한 사업인지라 선정적인 내용만 각색해 보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신문은 적절한 매체가 아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이 책이다. 사실 근래의 문제는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 괴롭힘이지만,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한국 교사들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외적 요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하지만 문제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곤 한다.
책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교사 교육 과정의 부족함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를 지망하는 특이한 나라다. 하지만 정작 그런 학생들들 좋은 교사로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는 모자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의 수업 구성인데, 중등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학의 경우 실제 교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 구성에 따른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 교과 교사를 키우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과목들, 즉 지리나 역사, 경제, 정치 같은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과 교사이지만 정치를 잘 모르고, 역사를 어려워하는 교사가 탄생한다. 이런 엉뚱한 교육현실의 배경에는 기득권과 밥그릇이 연관되어 있고.
교사의 승진과 관련된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행 제도에서 교사들은 크게 세 가지 진로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교장이 되려고 애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길, 그리고 나머지는 이도 저도 관심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길. 세 부류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높은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행 제도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매우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세 번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된다.
교사들 자신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다른 교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주체들과의 연계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유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사명감으로 무슨 행동을 유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교원 양성 계획의 실패로 인한 임용대기자 문제다. 쉽게 말해 교육은 다 받았는데 정작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있는데,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예비 교사들의 희생만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면 결국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 된다. 어떻게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승진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학부모들에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비극적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을 하나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나을지 모르지만, 교사 개개인의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사의 정체성 부분이다. 우리는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걸까? 최근 우후죽순 출몰하는 갑질 부모들의 경우 내 자식을 떠받들어야 하는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건 애초에 논외로 해도 상관이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면 교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일까? 또는 (십수 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일종의 성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양쪽 다 지나친 면이 있다.
저자는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건 교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만이 아니라 교사들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야 교사 양성 과정에서 내실을 기할 수 있고,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자연스럽게 요구될 것이다. 당연히 다양한 제도들(예컨대 승진 제도)도 여기에 맞춰 재설정되어야 하고.
어느 영역이든 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을 대는 식으로는 오히려 덧나기 쉽다. 워낙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은 모두의 반발을 사곤 하니까. 특히 교육 영역은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교육과정을 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확히 이런 방식의 개혁을 시도해 왔었다.
물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다간 더 큰 카타스트로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개혁을 해 낼 수 있을까?
속편의 속편.
벌써 세 번째 시리즈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아마 왕십리 CGV에서 봤던 것 같은데, 심지어 그 때 소개팅을 하고 두 번째 만난 날이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영화는 결코 소개팅에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선정적인 장면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왔지만, 이게 꽤나 흥행을 했다더라. 2편이 만들어지고, 이제 3편까지 나왔는데, 심지어 한국영화계 흥행성적이 굉장히 떨어진 요즘에서도 무려 천 만을 넘겼다. 물론 요새 관객 수 통계의 신빙성에 관해 말이 좀 있긴 하지만, 이건 꽤 많이 본 것 같기는 하다.
이 영화의 흥행 포인트는 역시 마동석류 영화 특유의 피지컬을 사용한 시원한 한 방일 것이다. 영화 속 어떤 빌런과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오히려 빌런 쪽이 걱정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결같이 마동석과 1대 1로 붙으면 칼을 들고 있던 총을 들고 있던 마동석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또 마동석이 그렇게 한 방에 날려버리는 것들은 어지간히 나쁜 놈들이니까. 마치 마블 히어로 영화를 보는 듯 신나게 상대를 때려눕히는 걸 즐길 수 있게 된다.
설정의 아쉬움.
워낙에 피지컬에 중심을 두고 우당탕탕 하는 영화인지라 이야기의 전체 짜임새 쪽은 확실히 아쉽다. 이 부분은 마동석류 영화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지는 포인트인데, 특별히 이 영화에서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영화는 일본 야쿠자가 국내에 들여오는 마약을 중간에 빼돌린 경찰 일당이 빌런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 또 뺏긴 마약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서 보내온 해결사까지 섞이면서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돌아간다.(그리고 빌런도 좀 약해 보인다)
시리즈 첫 편의 흥행은 마동석 뿐 아니라 윤계상의 악역도 큰 몫을 했다. 그가 연기했던 장첸이라는 인물은 악의로 똘똘 뭉친, 입체적인 캐릭터는 분명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주로 선역을 연기해 왔던 윤계상이 이런 역도 할 수 있었구나 싶은 놀라움과, 그 캐릭터가 저지르는 악행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던 점이(이런 영화를 소개팅 상대와 봤으니..) 눈길을 끌었다.
사실 마동석류 영화는 범죄도시 시리즈만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틀로 찍어 내듯 비슷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범죄도시만큼 흥행을 거둔 영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배경이 가정사(성난 황소), 학교(동네사람들), 조폭(악인전) 등으로 다양했지만, 경찰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를 오직 주먹 하나로 풀어낸다는 설정 자체가 뭔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족한 설정을 돌파하는 중요한 도구가 인상적인 악역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번 편에는 그 부분도 좀 부족했다. 뭐 그래도 천만을 넘겼으면 된 건가.
현실이 더 해.
나쁜 놈들을 주먹으로 펑펑 날려버리는 형사가 정말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마도 이 영화의 또 하나의 흥행 포인트일 것이다. 이건 최근 우후죽순으로 나오는 복수 콘셉트의 영화나 드라마가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기에는 온갖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일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다는 현실이 배경일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자가 세금을 탈루하고, 검사들은 특활비를 빼먹고도 누구 하나 사과를 하지 않는 수준이니, 이런 상황이 단시간 내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영화도 앞으로 한 동안은 인기를 끌 것 같고. 온통 빌런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그 중 하나씩만 골라 시리즈를 만들어도 100편까지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ㅋ
물론 아직까지 이 시리즈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권력의 상층부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중국에서 온 깡패나 동남아시아에 활동하는 폭력배가 1, 2편이이었고, 이번엔 경찰까지는 올라갔다. 과연 더 올라갈까? 뭐 이 영화가 애초에 사회고발 영화가 아니었으니 그렇게까지 갈 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국 그렇게 가다보면 마석도도 급 낮은 나쁜 놈들만 때려잡는다는 한계가 두드러질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