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지식하우스에서 나온 세 권의 책.

고정관념 Q 시리즈의 유대인, 팔레스타인, 이슬람.

리더스가이드에서 트리플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서 받았다.

한 번에 세 권의 책을 읽고 그걸 하나의 서평으로 담아 낸다는....;;

 


이 책은 성경을 주제로 한 책.

리더스 가이드에서 마일리지 4000원이나 주고 받았다.

정가는 20,000원!! ㅎㅎ


 

한 번에 네 권의 책을 받으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과연... 살이 빠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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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고정관념 Q 13
오드 시뇰 지음, 정재곤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영국을 비롯한 구대륙의 열강들과, 유럽과 미국에 근거를 둔 시오니즘 단체들,

그리고 양극체제를 이끌었던 두 강대국은 번갈아가며, 혹은 동시적으로

이 지역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고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1. 줄거리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라는 도전적인 부제목이 달려 있는 책이지만, 책의 내용은 꼭 팔레스타인 독립에만 맞춰놓은 책은 아니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 지역과 특정 사람들에 관한 다방면의 ‘고정관념’을(이 책은 ‘고정관념 Q'라는 시리즈물로 나왔다) ‘역사’와 ‘사회 ․ 일상생활’, ‘정치 분야’의 세 가지 큰 항목으로 나눠서 다루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상 테러를 통해 투쟁했다’나 ‘아라파트는 평화를 원치 않았다’와 같은 약간은 어이없는 ‘고정관념’(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다는 말인가) 항목도 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피난민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이끌고 싶어한다’와 같이 미처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짚어주는 제법 수준 있는 항목들도 있다.


 

 
 

 

2. 감상평 。。。。。。。   

          

     팔레스타인은 너무나 먼 땅이다. 한국 교민이 몇 명이나 그 땅에 살고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해서는 우리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기독교인의 경우는 비기독교인에 비해 성경을 통해 얻은 지리적, 역사적 정보가 조금 더 있기는 할 테지만, 그나마 2,000년 전의 사정이고 근대사에 이르면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보통 사람들은 이란과 이라크,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는 것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

     땅이 넓은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지도 않다. 주산업은 농업이고,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이나 광야라고 불리는 척박한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 지역에 관한 책까지 나오는 이유는, 역시나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분쟁’ 때문이다. 비단 ‘아마겟돈’ 이야기의 배경인 ‘므깃도 평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도, 세계 3차대전의 유력한 후보지들 중 한 곳인 팔레스타인.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져 오는 짧은 뉴스 영상이 대부분.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이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문제가 있나보다 하는 식이다.

 

     팔레스타인을 다룬 이 책은 그 지방에 관해 사전 지식이 거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때문에 매우 기초적인 오해들부터 바로잡아 주고 있으며, 텔레비전이 비춰주는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나름 심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세련된 이미지와 팔레스타인의 원시적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선과 악의 구도나 문명의 수호자와 야만적 공격자라는 그림을 떠오르게 하지만, 어느 정도는 조작된 것이 사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어떻게든 이겨보겠다는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 측의 선심성 공약들은 한 개의 땅에 두 개의 민족의 국가를 보장해주겠다는 모순된 약속이었고, 비단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분쟁을 일으키는 데 소위 선진국들의 이기적 정책결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 결코 ‘선의나 공정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은 참 슬픈 현실이다.
 

     어떻게든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유지하려는 이스라엘과, 역시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 선과 악이나 흑백논리로 문제를 접근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책의 상당부분이 이런 흑백논리를 수정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국가나 국민이라는 집단체가 단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한 견해야말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이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정작 일상생활로, 특히 서민들의 생활로 들어가면 서로 협력하며 지내다가도 국가 차원으로 빠져 나오면 대결양상으로만 치닫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관한 초보자용 개설서로 보면 훌륭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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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폭력을 먼저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1. 줄거리 。。。。。。。

 

     교육학 관련 책인 줄 알고 꺼내든 책이다. 남미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럽의 침략 이래도 오늘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억압적 사회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다룬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이론서’나 ‘혁명지침서’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저자가 교육의 타깃으로 삼은 사람들은 주로 ‘무식한 농민’이나 ‘근시안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무시하는 ‘억압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빼앗기고, 모든 기회를 봉쇄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자의 관심대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억압자들은 교육을 통해 그러한 사회구조를 ‘자연스럽고’,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바른 교육’, 즉, ‘억압자를 위한 교육’(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형식은 ‘은행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다. 피교육자를 단순히 입금되는 돈을 저금해 두는 통장으로만 여기고 계속 교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을 쏟아 넣는 방식의 교육으로는 사회비판적, 사회변혁적 시각을 갖기 어렵고, 반대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내용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대화식 교육’이라는 생각이 또 하나의 핵심주장을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확실히 남미 쪽 상황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꼭 남미에만 국한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비록 그 형태나 겉모습은 약간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꽤나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근본적 신념이긴 하지만, 경제적 ․ 사회적 불평등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힘 있고 가진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어이없게도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구조는 상당히 많은 못 가진 자들에게 지지되고 있다. 이 책의 첫 판이 나온 지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책의 유용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착잡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목표’에는 상당부분 공감한다. 현실과 유리된 교육은 결국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고, 그런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구조를 강화시키는 교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어를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화식 교육’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는 상황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교육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교사의 수급, 교육 환경의 구성, 예산 문제 등) 당장 프레이리 식의 교육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남는다.

     또, 이럴 경우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인 ‘혁명’을 통한 해결방식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우려가 든다.(저자의 생각에도 언뜻 이런 생각이 묻어 나온다) 결국 폭력을 통해 또 다른 질서를 세우겠다면, 그 질서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문제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에의 어려움이라는 말이다. 체 게바라의 투쟁이 아무리 아름다운 목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부군을 죽였다. 그렇다고 정부군에 속한 사람들이 억압자들과 동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혁명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피델 카스트로나 스탈린 식의 권력독점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프레이리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 지 나로서는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무지를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들은 비단 개인적인 요인들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단결되지 못한 노동자는 언제나 고용주들의 만만한 상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느슨한 농민들의 연합체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결합해 있는 거대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이길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프레이리 한 명 만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점이라면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좌파 빨갱이니 극우 꼴통이니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념적 분쟁만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정작 중요한 ‘인간’이 소외당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인간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누가 심어 놓은 것인가!

 

 

     내가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혁명적 상황에서의 폭력의 정당화’라든지, ‘궁극적인 사회 구원의 동력으로서의 인간’ 등의 주제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저자도 책에서 말했듯이(“나는 그리스도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으로 확신한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불의를 그냥 두고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저자의 이력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WCC에서 일했다고 한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어), 현실에 대한 진단에 기독교적 용어들이 몇몇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주제어로 설명하는 부분(“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은, 마치 ‘자기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를 설명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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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가 우스운 꼴, 추한 꼴의 자신을 보여주고 싶겠는가.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성격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재산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 간에,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당연히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사람들이 하루종일 거울을 보는 횟수를 살펴보라.

그러면,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에는 큰 전신 거울이 있다.

언젠가 무심코 거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속으로 한 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적어도 80% 이상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나 옷 차림을 비춰보았던 것이다. ^^








사실, 거울을 보는 행위 자체가 

자신에게 직접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별로 없다.

어떤 사람이 단지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 멋진 외향을 꾸미겠는가.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시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남자인데,

어느날 자신의 모습이 물에 비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후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루종일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좀 더 그 모습을 가까이 보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나르시즘'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혹시라도 이 나르시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서라고 해도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추해지는 것일까?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쓰는 존재가

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경험상, 그리고 역사상의 수많은 인물들에 관해 살펴보건대,

분명히 인간이 추해질 때가 있다.








왜?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을 때,

인간은 추해지게 된다.

(이 말은 시각장애인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리라 믿는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모습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눈이 가려진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다른 사람의 경고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눈을 가리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요인들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상대방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

혹은 더 많은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정도가 심해져감에 따라 그 사람의 눈도 서서히 가려져 간다.

그 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딱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스토커가 되어서 상대방을 괴롭히기까지 한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을 너무도 미워할 경우,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생각이 앞선 나머지 눈이 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제 3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뻔하게 얽어매려는 시도임을 알아챌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모를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자신의 명예나 지위,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열심도 눈을 가릴 수 있으며,

돈이나 보상받고자 하는 욕심들도 우리의 귀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을 제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적이라고 단정시켜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선포된 존재는, 복수의 표적이 되어버린다.








추해짐이 단지 그 사람 하나만의 문제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쉬운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자동차 운전자가 눈을 가린채로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비단 그 사람 자신 뿐만 아니라

같은 도로에서 함께 운전하고 있는 다른 운전자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때문에 눈이 가리워진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눈이 먼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당신이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조심해서 운전할 수 밖에 없다고 조언해 주고 싶을 뿐이다.

눈을 가리고 운전하는 사람을 앞에서 막아선다거나,

이리 저리로 운전하라고 옆에서 명령하는 것은

더 큰 사고를 유발할 뿐이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의 눈을 가린 것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리 쉽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단 차가 멈추기라도 해야 눈을 가린 것에 손을 대지 않겠는가.





차선의 방법으로, 방어운전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피해가는 것이 좋다.

물론 그 사람이 지나치게 이탈된 코스로 달려간다면,

경적을 울려서 한 번쯤 제지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당장 손을 뻗쳐서 운전대를 잡고 세우려고는 지 말기 바란다.

어쩌면 당신을 사고를 유발하려고 하는 적대자의 손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한 가지,

당신 자신이 그렇게 눈이 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마저 눈이 먼다면,

이젠 정말 큰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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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몇 백년이나 된 문화재가 그렇게 쉽게 파괴되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

 



하지만 최근 일련의 모습들은 뜨끔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떠들어 대고,

그 앞에서는 연일 제삿상이 차려져 수 많은 사람이 절을 한다.

삼보일배를 하며 주위를 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곡을 하며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불을 지른 사람은 반역자 취급을 받고,

덩달아 노숙자들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사람들이 꽃을 가져와 그 앞에 두고 있다.

마치 사람이 죽은 것처럼.

 


 

무생물의 인격화.

그리고 사실 그 인격화의 대상은 국가, 혹은 국가정신.

참 무서운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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