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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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광기를 인식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더 나빠질까? 아니, 사람들은 보다 올바르고 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1. 줄거리 。。。。。。。

 

     슬로베니아의 한 수녀원에서 베로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자살을 하기 위해 수면제 세 통을 한 알, 한 알 삼켰다. 하지만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던지, 정신을 잃은 채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빌레트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의식을 되찾은 베로니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의사로부터 희망적인(?) 말을 듣는다. 다량의 수면제 섭취로 인해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고, 일주일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견을 들은 것이다. 어차피 자살을 하려고 했던 차에 잘 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베로니카의 심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살을 시도한 시한부 인생의 베로니카와 그녀를 둘러싼 정신병원 안의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흥미로울 뻔 한 드라마.

 

 

2. 감상평 。。。。。。。

 

     혹시나 하고 읽었으나, 역시나 하는 결론이었다. 이 작가는 그를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게 만들어 준 『연금술사』라는 작품에서 도대체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연금술사』에 이어 『11분』, 『오 자히르』, 그리고 이 책까지 네 권의 소설을 읽어봤지만, 모든 소설은 한결 같이 인간 내부에서 발산되는 힘과 에너지에 집중해서 그것을 표출하라는, 쉽게 말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메시지만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정신병원과 광기(狂氣), 자살에 실패한 여인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사용한 이번 작품에서도 이 점은 변함이 없었다. 언뜻 일상적인 삶의 진정한 가치라든지, 사회적 편견을 뛰어 넘는 사랑 이야기 같은 ‘좀 다른’ 주제를 담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파울로 코엘료라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져다주어도 늘 똑같은 비빔밥만 비벼댄다.

 

 

     무엇이 이 작가의 작품들을 늘 똑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걸까? 아마도 작가가 지나치게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의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굳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대사를 통해 자신이 직접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도 꽤나 구체적으로. 그래서 마치 뉴에이지 영성운동의 지침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 여기에 작가가 청년기 경험했다는 히피 생활에 대한 동경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보인다.

     문득 작품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코엘료는 사람들이 보다 올바르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사람들 내부에 숨겨두었던 탐욕과 폭력성이 드러나 더 큰 혼란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작가는 사람 내부에 있는 힘이 선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악한 무엇일수도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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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견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양의 구름.


 

나 여기서 구름이랑 논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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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쁘거나 슬프게 하는 건,

엄밀히 말해 기억이 아니다.

처음 얼마간은 기억 때문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감정은 분리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람을 기쁘거나 슬프게 하는 건,

오직 감정 뿐이다.

감정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낸다.

비극은 더욱 슬프게, 희극은 더욱 기쁘게.

 

결국 사람들은 어떤 '기억'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 만들어 낸 기억'일 뿐이다.

당연히 더 슬퍼지고, 더 기뻐지는 법.


 

이런 의미에서,

기억을 더욱 정확하게 만드는 순간

기억과 감정은 분리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억이란,

'감정이 만들어 낸 가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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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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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비범한 분쟁은

때로 일상의 물결 속에 감추어져 있는 동기와 가치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 -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런 얘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인 마르탱 게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저자의 설명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마르탱 게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어느 마을에 마르탱 게르라는 부농이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먼 곳으로 떠나 사라져버리고 남은 아내만 혼자서 집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르탱 게르가 돌아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용모와 성격은 약간 달라진 것 같았지만, 그의 아내도 그를 마르탱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마당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는데, 돌아온 마르탱이 그가 없는 사이 재산을 관리하던 작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농업 방식대신 땅을 팔고 보다 상업적인 방법의 재산 운용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의심을 품은 작은 아버지는 그가 진짜 마르탱 게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대도시에서 열렸던 재판은 돌아온 마르탱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진짜 마르탱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짜 마르탱, 곧 뒤 틸의 계략은 들통 나고 만다.

     저자는 이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표면적인 내용 이외의, 당시 프랑스 일반인들의 관습, 사고방식, 문화 등을 묘사하고 있다. 통상적인 역사서 중심의 역사 이해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책이어서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마르탱 게르의 부인이 뒤 틸이 마르탱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나, 그 둘이 프로테스탄티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가톨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 - 이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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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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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이 비싸고 수가 적은 필사본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성직자가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판단을 내릴 때 필요한 지식이 교회나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시중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출판업을 언급하지 않고는 인간의 재발견이기도 한 르네상스를 말 할 수 없습니다.

 

1. 요약 。。。。。。。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다. 저자의 이름과 책 제목만 내놓더라도, 어느 정도 그 내용이 짐작되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제목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 이 책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르네상스라는 시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시오노 나나미가 썼다는데서 책의 내용이 딱딱하지만은 않게,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른 면모를 그리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실제로 그러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르네상스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각 시기별 중심지 -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를 돌아가면서 각 시기의 주요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르네상스란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왜’라고 묻는 태도, 그것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르네상스는 호기심이 폭발했던 시대인 듯하다. 여기서 호기심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미지의 것,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왕성한 탐구욕, 그리고 그것을 글이나 그림, 조각, 건축 등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열정을 모두 포함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의 인물’을 다루면서, 단지 예술가들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 안에는 교황, 메디치 가문과 같이, 르네상스라는 문화의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토양을 제공해준 인물들도 포함된다. 또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종교인들도 들어가고, 저자가 좋아하는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도 역시 꼽고 있다.

  

2. 감상평 。。。。。。。 

 

     

     , 시오노 나나미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기독교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 물론 어느 정도 이 지적은 받아들일만한 면도 있다. 하지만 뿌리 없는 줄기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르네상스란 중세의 오랜 기간동안 천천히 고양되어져 온 인간의 역량이 마침내 때가 되어서 표출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중세는 종교 예술의 황금기였으며,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교회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이 이를 지지해 준다. 즉, 중세의 야만적인 유럽인들의 심성을 교회 안에서 교화 시키고,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정치, 예술과 같은 분야들이 차차 발전되어서,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해 내지 못하게 되자 그 보호를 벗어버리고 밖으로 나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중세의 유럽인들이 모두 진정한 의미의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그들의 삶의 기본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으며, 그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은 모두 기독교에 대해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사람들은 목회적 관점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갔다는 견해도 존대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그의 글 솜씨는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언제나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루빨리 이에 필적, 아니 능가하는 건전한 기독교적 관점을 지닌 인물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대화형식으로 쓰여 있어서, 마치 직접 앞에서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인물 중심으로 쓰여 있기에, 르네상스 당시의 전체적인 그림은 쉽게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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