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여섯 번째 시리즈이자, 당초 계획에 따르면 마지막 시리즈인 “시월의 말”의 첫 권이다. 작가 소개를 보면 이 시리즈의 집필을 끝낸 뒤 1년 후 시력을 잃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일생의 역작을 써 내려간 후 진이 빠졌던 걸까. 하지만 원래 계획과는 달리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하나의 시리즈를 더 덧붙인다. 작가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편에서 파르살로스 회전에서의 승리로 사실상 공화파와의 내전을 끝낸 카이사르는, 이제 후속조치에 나선다. 우선은 패전 후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로 가지만, 이미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 폼페이우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내전을 조기에 수습하던 계획은 그렇게 무산이 되었고, 심지어 이집트 왕실 내에서 벌어지던 내전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부분은 흔히 미인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의 외모에 대한 작가의 묘사인데, 절세미인이라기보다는 마른 외모의 그리 예쁘지 않은 얼굴, 하지만 재기발랄하고 높은 지적 수준인 인물로 그려진다. 언뜻 아가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과도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집트를 떠난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던 공화파를 분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른바 강경 수구파였던 보니의 지도자 카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카이사르의 계획은 무산되는데,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강경하게 반대했던 카토를 용서해 줌으로써 자신의 관용을 선전하고 내전 이후 정국을 빠르게 수습하려고 했다.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상상을 덧붙이는데,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건전한 정치는 언제나 반대파의 존재를 상수로 깔고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반대파가 없는 원로원은 필연적으로 약화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건 정적 죽이기에 여념이 없는 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이 좀 들어야 할 말이지만... 보통 이런 사람들은 책을 안 읽으니까.
계속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작가의 인물평은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과 좀 다른 면들이 종종 보인다. 전편에서는 라비에누스를 야만적으로 묘사하더니, 이번에는 테렌티우스 바로를 아주 얌생이로 만들어 놓았다.
카이사르의 최대 정적이었던 카토에 대한 묘사에 특히나 공을 들인 듯한데, 한편으로는 스토아 철학에 헌신한 깐깐한 원칙주의자이지만 바로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현실을 무시하는 멍청함도 함께 안고 있다.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배정된 수송선을 모두 보내버리고 1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배로 며칠이면 될 거리를) 육로로 행군하는 고지식함의 소유자이면서, 죽음을 앞두고는 과연 영혼은 영원할까를 두고 그리스 고전을 읽고 또 읽는 두려움에 빠지는 모습도 보여준다.
또,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된 카시우스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느낌은 소 카토의 마이너 버전? 시종일관 투덜거리며 카이사르가 하는 일마다 흠을 잡고, 평가 절하한다. 물론 카이사르도 그런 일들을 다 알고 있지만, 앞서의 자신의 정치 원칙에 따라 놔두는 느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토니우스. 앞선 갈리아 전쟁에서도 나름 존재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를 대신해 기병대장(부독재관)으로 로마를 다스리고 있던 그는 최악의 통치를 하고 만다. 작가는 이 시기 이탈리아에 머물던 군단병들의 반란을 안토니우스가 조장한 것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확실히 소설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인물 묘사에서 복선을 깔아두는 느낌이다. 역사가 스포인지라 결말을 알고 보면 다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내용들이고.
참고로 “시월의 말”이라는 제목은, 전쟁의 신인 마르스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는 말을 가리키는데(첫 머리에 그 의식이 소개된다), 어쩌면 카이사르를 가리키는 비유가 아닌가도 싶다. 마르스에게 바쳐진 전차 경주에서 이긴 쪽의 말이 제물이 되는 것처럼, 내전을 끝낸 승리자인 카이사르가 결국 암살을 당한다는...
사랑은 9할이 미움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법이다.
- C. 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중에서
제 생각과 사상은 계속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생각이라는 것은 계속 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일관된 모습 못지않게 변화하는 모습도 자랑스럽습니다.
- 파울루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중에서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대가로 표를 얻으려고 하는 그와 같은 정치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 책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못지않은 수준미달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는 현 시점의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고, 교회 또한 이런 타자에 대한 외면에서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해 준다.
저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타자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자’란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완전한 타자,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저자는 기독교의 설교의 목표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위협적인 ‘타자’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대로 그들을 바라볼 것을 권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자를 경계한다. 그건 우리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던가. 저자는 교회가 “두려움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라고 말한다. 교회는 우리 안에 깊이 박힌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극복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보게 만든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저자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문제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온간 종류의 헛똑똑이들이 내놓는 통계와 사회 면 뉴스들이 증거로 제안된다. 그러나 온전히 개인의 삶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온 결과가 무엇인가. 각자도생의 정글과 같은 사회, 부익부빈익빈이 고착화되어 가고, 힘이 있는 소수의 특권을 위해 사회 전체가 봉사하는 계급사회로의 회귀이지 않았던가.
책은 미국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상황과도 자주 오버랩 된다. 물론 개인윤리 차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친절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이미 철저하게 개인주의화 되어 있다. 온갖 선동적이고 혐오가 담긴 구호들이 선거 때마다 넘쳐나고, 오직 내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만이 선거에서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결단인 양 선동을 한다. 장로니, 목사니 하는 사람들의 성적 비위나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강조하던 헌금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은혜롭게” 넘어갈 방법을 찾기 바쁘면서,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몇몇 전직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이 시대의 보수적인 교회의 전형이니 말 다했다.
무엇보다 이런 시대의 교회 사역자들은 안전한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이런 관행에 날카로운 경고를 날린다. 어떤 목회자가 기존의 교회 성도만 돌보고 위로하면서 그들의 심부름꾼으로 시는 데 만족한다면, 그는 교회 지도자의 직분을 그저 ‘집 지키기’ 정도로 격하시키는 셈이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교회가 실은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그들’을 환대할 여지가 없음을 드러낼 뿐일 수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령의 한 가운데 새겨진 명령이다. 저자는 이를 단순히 선교의 명령으로만 읽는 경향에 도전해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 동족들과만 어울리지 말아라.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라. 가서 모든 이를 제자로 삼아라!”라는 타자 환대의 명령으로 읽는다.
무엇보다 책 말미에 소개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새로운 해석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라는 메시지를 읽지만, 저자는 이야기 속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분은 당대의 주류로부터 타자로, 외부인으로 정죄되었다. 그런 그분이 죽어가는 이를 살리셨다. 이야기는 이렇게 수미쌍관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