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3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다행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국회의 빠른 대처로 금세 무산되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사법 절차의 진행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동시에 폭동까지도 조장하면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또, 심지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당은 자신들도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내란을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대통령 탄핵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이 책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쥐고 흔드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든 극단적인 무리는 더 눈에 띄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대 대표되기 마련이니까.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가끔 남미나 아시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깨드린 예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행되던 초기에는 참고할 만한 예도 부족했고, 그래서 정권교체라는 것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굉장히 겁을 냈던 것 같다. 정권을 이대로 넘겨주면 자기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당한 선거의 결과마저 부정하고자 하는 내적 요인이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체 하고 있지만 내심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프랑스의 보수정당이었던 “공화연맹당”은 점차 극우 단체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공식적인 정당의 구성원과 폭력적인 활동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나중에는 청년애국당이라는 극우 폭력집단을 당의 “돌격대”로 지칭하더니, 1934년 2월 6일 발생한 폭동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건 남 일 같지가 않다.
책의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애초에 미합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었고,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덕분에 민주적인 절차나 제도보다는 합중국에서 이탈하려는 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도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렸고, 저자들은 그것들을 가리켜 “미국은 언제나 반(反)다수결주의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책의 제목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反)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소수의 종신 대법관 제도(의회의 다수가 통과시킨 법안을 소수의 지명직 판사들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가 있고, 비슷한 제도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강력한 권한을 지닌 상원의 존재(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 모두에서 다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구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각 주별로 2명씩 배당된 상원의원 제도,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입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 작은 주에 특혜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더 적은 득표를 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선거인단 제도, 상하원 모두의 2/3가 찬성하고 전체 주의 3/4가 비준해야 가능한 어려운 헌법 개정 요건 등이 포함된다.
책 후반에는 이런 미국의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이 등장하지만, 문제는 이런 개혁도 헌법 개정사항들인지라, 앞서 말한 개헌의 높은 문턱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서는 힐러리 보다 적은 수의 표를 얻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리고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도) 명백히 후퇴했다. 책 말미에 저자들은 “미국인들은 지난 7년 동안 탈진 상태에 빠졌다”고 적으며 한숨을 돌리지만, 이제 또 다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깡패 짓을 시작한 지금, 저자들은 뭐라고 할까.
제목이 확 땡겨서 폈지만, 어떤 민주주의 일반의 후퇴와 해법을 제시해 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미국의 정치 상황에 국한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살짝 실망스럽다. 그래도 역사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곤 하는지라, 책 초반에 실려 있던 다양한 반 민주주의적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해 보는데 도움이 되려나(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오랫만에 기독신문에 이름이 나왔네요..ㅋ
자세한 기사 내용은 아래 링크로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500527
동성애자를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지와 동일하다.
바로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찾으라는 동일한 초대이며,
삶을 바꾸는 깊고 놀라운 사랑과 용서에 대한 동일한 제안이다.
- 샘 올베리, 『하나님은 동성애를 반대하실까』 중에서
신앙과 이성은 서로 배치되는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로 한 동안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떤 이들은 철 지난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다.(특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격한 언사로 신앙을 조롱하던 신무신론자들이 활개 치던 영국에서는 더욱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종종 이런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자신들의 신앙을 공공의 영역에 드러내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 맥그래스는 그런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로 대표되는 신무신론자들의 과격한 신앙에 대한 조롱은 실은 그들 자신이 가진 논리의 빈약함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사적인 뻥카에 불과한 것이고(21),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비판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 것도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신앙은 비이성적인 이들이나 스스로 변론하지 못하는 단순한 태도라는)를 갖게 만들 수 있는 부족한 태도다(22).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지성과 제자도, 즉 그리스도인됨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강조다. 1장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2장에서는 기독교 신조가 가진 중요성(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좋은 지도가 될 수 있다), 3장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동체, 즉 교회의 중요성을, 4장에서는 좋은 책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를, 그리고 5장에서는 제자도가 지닌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2부에서는 지성과 제자도 사이를 멋지게 구현하고 설명해 낸 네 명의 인물(도로시 세이어즈, C. S. 루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에 관한 소개가 나오고, 마지막 3부에는 저자가 여러 자리에서 했던 설교문들을 네 편 모아두었다.
소위 덮어놓고 믿는 식의 맹신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이성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지에 관한 집요한 강조가 인상적인 책이다.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C. S. 루이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니 더욱 편안하게 읽힌다.
확실히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성적 사고를 북돋는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기독교인”이라는 단어가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떤 면으로도 그리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나 요즘에는 “음모론 신봉자” 따위의 좀 더 추접스러운 이미지까지 씌워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책이 그런 일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살짝 아쉽기도 하다. 전반적인 구성이 탄탄하게 서로 장별로 연계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고, 각 장별로 별개의 내용들을 그냥 하나로 긁어모은 것 같은데, 실제로도 장별로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강연이나 연설, 대답 등을 정리한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구성에 있어서 좀 산만하다는 느낌을 주고, 특히 3부에 실린 설교문들은 물론 각 원고들은 깊은 통찰이 보이기도 하지만 꼭 여기에 실려야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물론 여러 장들에서 단편적으로 중요한 통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는 책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