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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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살이 멈춘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 깊이 뿌리박힌 증오가

언제 또 다른 폭력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질없는 보복을 막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 용서의 신성함을 깨닫게 하는 길뿐이었다.

 

 

 

 . 줄거리 。。。。。。。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아니 상대를 사람이 아닌 뱀이나 바퀴벌레로 여기는 일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백 명, 천 명 단위가 아닌 수십 만 명에 이르고, 한 번 그렇게 비인간성을 보여준 공동체는 씻을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계속하게 될 위험에 빠졌다.

 

 

 

     르완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르완다 내전에서 살아남은 ‘임마꿀레’라는 이름의 한 여인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공존하며 살아가던 르완다에 벨기에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그러했듯, 벨기에는 르완다의 식민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두 종족 사이를 갈라놓았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독립 후, 다수이면서도 오랫동안 억눌렸던 투치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잔인한 인종청소가 벌어진다.

 

     임마꿀레는 후투족 소녀이다. 후투족 여자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받았다. 그녀의 가족은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정부는 투치족을 선동해 후투족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둘째 오빠, 남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임마꿀레는, 한 투치족 목사의 도움으로 그 집의 욕실에 다른 여섯 명의 여자들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그가 믿는 하느님을 찾으며 힘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끝난 대학살. 하지만 임마꿀레에게 남은 일들은 적지 않았다.

 

 

 

 . 감상평 。。。。。。。                     

 

     아프리카 판 안네의 일기를 읽은 느낌이다.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비이성적인 대학살의 한 가운데서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는, 무슨 특별한 미사여구나 아름다운 문장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을 폭도들의 손에 잃었고, 더구나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임마꿀레가 느꼈을 충격과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무엇이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을까? 무엇이 어린 아이들까지 사람의 목숨을 벌레 목숨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잔인성을 갖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이웃이 이웃을, 동료가 동료를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웃고 떠들 수 있게 했을까?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 비단 그녀가 아니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으리라.

 

     사실 르완다 내전이 아니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만 잠시 보더라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잔인한 범죄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성년자를 감금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파렴치범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를 성추행하고 범행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는 인면수심의 악한들도 있다. 공사비를 떼어먹기 위해 부실공사를 하고 그 때문에 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이 되는가 하면, 조직 폭력배를 동원한 보복폭행으로 대기업의 회장이 구속되기도 한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인류가 무엇인가 명백히 큰 잘못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C. S. 루이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정말로 인류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과학과 이성을 새로운 신으로 믿으며 달려온 지난 1, 2백년을 지나면서 인류는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살인자들에 대한 임마꿀레의 근본적인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살인자들이 악마성에 지배를 당했을 뿐, 사실은 그들도 또 하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들의 타락한 심성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마땅히 가해자로서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해결책에 있어서는 임마꿀레의 그것과 같은 생각이다.

 

     임마꿀레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진정한 용서’를 제시한다. 극한의 사건을 경험한 임마꿀레가 이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의 순환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 파괴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아마도 그 유일한 방법은 ‘용서’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에는 그녀의 종교적 신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신을 믿지 않으면서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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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7-06-0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일단 임마꿀레는 종교적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그들을 용서했어요.
관점은 약간 다르지만, 푸른숲에서 나온 희망여행을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서로 용서하는 과정이 있어요. 종교적 관점을 떠나, '용서'를 생각할 수 있답니다. ^^

노란가방 2007-06-0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단은 공통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테니까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용서'라는 방법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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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혁명적 부는 창의적인 기업가들과 사회, 문화, 교육 부문의 기업가들에게

수많은 기회와 새로운 삶의 궤적을 제시해 줄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빈곤에 대한

참신한 해결책도 던져 줄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적인 미래로의 초대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경고가 담겨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위험이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 요약 。。。。。。。                      

 

     저자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아니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혁명적 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이 책을 썼다. 인류가 이제까지 누려보지 못했던 엄청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 인류가 당하고 있는 큰 어려운 가운데 하나인 빈곤과 결핍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말한다고 잔뜩 바람을 잡고 있기에, 이 책을 진지한 마음으로 손에 든 독자라면 다음 내용이 기대가 되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어서 이 혁명적 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심층기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2장) 저자가 말하는 혁명적 부의 심층기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식. 이어지는 장들(3-5장)에서는 이 각각의 심층기반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해 부를 창출해 내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미래 사회의 경제 형태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프로슈머와 데카당스)을 설명한 뒤(6-7장), 이것들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을 예상한다.(8장)

 

     저자가 보는 미래의 모습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혁명적 부로 말미암아 지난 시대의 발전 양상이 그러했듯, 미래에도 큰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9장) 이 모든 것들이 가져올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10장) 책을 마친다.

 

 

 

. 감상평 。。。。。。。                    

 

     언제나처럼 앨빈 토플러의 책은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 두껍다. 늘 마음은 있지만 섣불리 읽기를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다가, 지난 겨울방학을 맞아 알라딘에서 ‘이 주의 서평’에 뽑혀서 받은 적립금으로 확 구입해버렸다. 방학 동안 한 번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서였지만, 웬걸.. 방학 내내 겉장조차 넘겨보지 못하다가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읽기 시작했고, 여름방학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드디어 다 읽어냈다.

 

     책은 분량만이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책이 주로 ‘경제’라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어려움 가운데 하나다. 나처럼 경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전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역시 괜한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처음 가지고 있던 어려움은 금새 사라져버린다. 저자는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매우 작은 단위로 잘라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자주 놓쳐버리게 만드는 수 페이지짜리 문장 따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 저자의 글쓰는 방식도 신문에 실려 있는 칼럼 수준의 평이한 문체를 즐겨 사용하고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이 점에 관해서는 어쩌면 번역자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요 개념이자,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개념들은 ‘(시간과 공간의) 비동시성’, ‘프로슈머’라는 개념, 그리고 ‘지식’의 특성과 작용에 관한 새로운 조망들이다. 많은 요소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현대에서, 그 각각의 요소들이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만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비동시성의 개념은 오늘날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이다. 프로슈머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방법으로는 측정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의 무보수 생산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이어지는 지식의 개념과 연결될 때 혁명적 부의 근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시대의 흐름을 살피면서 구조를 읽어내고,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찾아내는 저자의 예리한 관찰력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자는 인류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은 진보를 향한 역사였다고 진단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흐름은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한 경고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과거에도 있었던 것들이고,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매우 낙관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이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은 거의 전적으로 논리적 추론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믿음에 근거한 주장이다. 물론 소위 ‘미래학’이라는 분야 자체의 특성이 ‘예측’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의 믿음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저자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은 매우 강한 확신과 함께 제시된다. 이런 면에 있어서 저자의 생각은 과학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던 근대의 이상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부 창출 구조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정도. 여기에 저자 특유의 애국심이 더해지면서 미국이 선도하는 혁명적 부가 만들어낼 유토피아를 찬양하는 데까지 이른다. 바로 이런 점이 저자의 주장을 신나게 따라가다가도 그 의견에 완전히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저자는 현실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저자가 분석해 놓은 도구들은 매우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상당부분 간과하고 있으며, 대부분을 물질적인 것들로 설명하고 있다.(이런 유물론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나 현대의 과학만능주의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저자의 예측에 매우 큰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전체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따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현명한 독자라면 유물론에 근거한 이런 낙관론을 주의하면서 저자의 주요한 고찰들을 지혜롭게 이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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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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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겠지만,

인류는 명백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 줄거리 。。。。。。。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 S. 루이스의 작품이다. 루이스가 살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만연한 반기독교적 조류와, 그와 반비례적으로 강력하게 부상한 세속주의, 이성주의와 같은 사상과 같은 배경을 이해해야 본서의 내용을 좀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지금 강력한 세속주의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깎아 내리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기독교의 순수한 교리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다른 작품 ‘고통의 문제’에서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두려움, 혹은 경외감인 ‘누미노제’로부터 신 개념을 이끌어냈던 루이스는, 이번 책에서는 역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옳고 그름에 관한 보편적 관념’으로부터 그 기준의 제정자인 신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낸다.

 

     저자는 바로 그 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자에게 성급하게 그 하나님을 고백하고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기독교인들이 믿는 교리와 행동의 원칙들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내용들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기독교가 사실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정상적이면서 인류의 본래의 순리에 따르는 것임을 논증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모두 설명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필연적으로 ‘좀 더 깊은 내용’을 다뤄야만 한다. 제 4장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저자는 애초의 목적 - 기독교가 충분히 믿을 만한 것임을 논증하려는 것 -을 앞서의 내용을 통해 달성했다고 생각했는지, 이 부분은 굳이 저항감을 갖는다면 읽지 않아도 괜찮다고 본문을 통해 여러 번 언급한다.

 

 

 

. 감상평 。。。。。。。                                 

 

     책 제목인 ‘Mere Christianity’에서도 드러나듯,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들을 매우 자상하게 설명해줌으로써, 불신자들, 특별히 기독교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거나 정당한 근거 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이켜 볼 것을 유도한다. 이 책의 장점은 이 과정이 매우 ‘신사적’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강제로 주장하기 보다는 여유롭게 권하는 방법을 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간략하다거나 깊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해의 깊이는 책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단지 신학적 교리를 나열하고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저자는 문학을 전공한 이력(영문학 전공)을 잘 살려, 매 경우마다 적절한 비유나 상징들을 사용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를 통해 매우 많은 것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누구나 인정할만한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에 이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이런 전제는 이미 로마 카톨릭의 아퀴나스적인 신학방법이기도 하고, 그것은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적어도 ‘논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반박을 받았다. 그러나 ‘논리적’인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 예컨대 우리는 아침에 자신을 깨우는 중년의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논리적 추론이나 근거 없이도 바로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 저자의 이런 시도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점은 이 책을 빛나게 해 주는 장점 중 하나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글쓰기에 적용될 때,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저작이다. 꼭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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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페르시아 왕후 에스더의 비밀 일기
진저 가렛 지음, 김윤창 옮김 / 베이스캠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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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게 여러분의 힘이나 돈을 보태려 하지 마세요.
내게 여러분의 연약함을 보태세요.
여러분이 기도와 고통으로 나를 하나님께 인도한다면,
나는 금지된 일이라 할지라도 왕에게 갈 거예요.
죽게 된다면 죽는 거죠.



. 줄거리 。。。。。。。                                

   주인공인 에스더는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은 유대인 소녀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도시들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얼마 후 그들을 지배하는 나라는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바뀐다.

   에스더는 혼란 중에 부모를 잃고 사촌인 모르드개의 가게에서 일을 하며 산다. 그 곳에서 만난 키루스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 에스더는,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설렘 중에 보낸다. 하지만 키루스의 아버지는 더 많은 권력과 지참금을 줄 수 있는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원했고, 비열하게도 마침 새로운 왕후를 뽑기 위해 제국 전역에 내려진 황제의 간택령에 에스더를 넘긴다.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왕의 하렘에 들어가 일 년 동안 왕의 부름을 위해 준비를 시작하게 된 에스더. 그녀는 수 백 명의 다른 경쟁자들을 이기고 왕후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지척까지 영향을 끼치는 음모의 손길은...



. 감상평 。。。。。。。                                

   구약성경 '에스더'의 이야기를 현대식으로 꾸며 놓은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큰 플롯 구조는 모두 에스더서의 것을 따라가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책의 앞에 삽입되어 있는 이야기 - 고대의 에스더의 비밀 일기가 발견되어 출판 준비 중이라는 신문 기사 -다. 과연 그 기사 형식의 글이 진실인지, 그리고 이 책이 그 '비밀 일기'를 토대로 만든 것인지, 결정적으로 그 '비밀 일기'가 진짜 에스더의 글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아무튼 그 내용은 이 책에 대한 확실한 흥미를 제공해 준다. 어쩌면 움베르토 에코가 잘 써먹었던 '진실과 상상을 섞어 글쓰기'(소위 팩션이라고 부르는)의 일환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에스더의 시점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여러 일들을, 과연 그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을 지를 제법 개연성 있게 적어 내려가고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몸을 섞어야 하는 운명적 사건에 대한 에스더의 번뇌, 그리고 왕실에서 벌어지는 암투(사실 이 부분은 약간 약하긴 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미련 등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 수 있을 만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들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성경 하면 일단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설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흔히 역사 드라마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와 같은 문제가 여기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에스더서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 성경 자체가 담고 있는 본문의 의미, 문맥, 구조적 특징 등이 많이 훼손될 여지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본문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지나치게 현대적인 감이 없지 않다는 점도 약간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특별히 여성에 대한 시각은 흐릿하게나마 페미니즘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크게 우려가 되는 정도는 아니다.)



   몇 가지 조심스럽게 보아야 할 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읽어나간다면, 매우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이런 책과 같은 시도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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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공급 살인사건 소설로 읽는 경제학 1
마샬 제번스 지음, 형선호 옮김 / 북앤월드(EYE)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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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아내와 함께 휴가를 떠나온 한 경제학자. 살인사건과 같은 살벌한 일들이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평화로운 휴양지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늘 고압적인 자세로 함께 하던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했던 데커 장군이 죽은 것이다. 놀러 왔던 사람들은 일순간 모두 긴장에 빠질 법도 한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는 미국적인 분위기라서 그런가.

        하지만 이어지는 푸트 판사의 죽음에는 사람들도 슬슬 걱정이 시작되나 보다. 섬에 있는 유일한 경찰인 빈센트 형사가 수사에 뛰어 들지만, 생각만큼 진전을 보지는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한편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처음 말했던 경제학자, 스피어맨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경제적인 원칙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경제이론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해보고자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이번 사건에서 그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질이라면 값이 더 싼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소보다 절반 가격에 음료를 파는 ‘드링크 타임’이 되면 사람들은 다른 시간대보다 더 많은 음료를 주문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수요공급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그런 이유들을 추적해가다보면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맥락이다.

        과연 이 흥미로운 작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범인은 누구일까. 스피어맨은 어떤 단서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낼까.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이런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 감상평                                    

        경제학과 추리소설의 만남.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 저자가 단지 경제학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대학에서 실제로 경제학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더욱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내용은 실제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듯 하다. 생각만큼 정교한 논리적 추론 과정은 보이지 않고, 일반인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수준의 내용들만 등장한다. 소설 상의 탐정 격인 스피어맨에게서 나타나는 ‘뛰어남’이란, 냉철한 논리적 추론 과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섬세한 ‘관찰력’ 뿐이다. 사실 이런 정도 수준의 관찰력은 이미 애드가 앨런 포우 이래의 모든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소설의 형태로만 보자면, ‘본격추리소설’에 해당하는데(추리소설은 크게 본격추리소설과 도치추리소설로 나뉜다) 본격추리소설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긴장감 조성‘에 실패를 하고 말았다. 사건의 전개가 매우 느슨하고, 주인공인 스피어맨의 추적과정도 슬슬 집 주변을 산책하듯 너무나 여유롭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있는데, 소설 상 등장하는 탐정이 접하는 모든 정보를 독자에게도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완전히 속아버리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래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충실하게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추리소설작가로서의 가망이 영 없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라리 저자들의 전공을 살려서, 약간은 전문적인 내용들이나 경제학과 관련된 금언이나 과거의 실제적인 사건들의 예를 좀 더 넣어서 소설을 구성했다면, 훨씬 더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좀 아쉬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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