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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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떻게 해서 백인들은 기독교도임을 공언하면서도

여전히 흑인들을 노예로 소유하거나 교회와 사회에서 분리시킬 수 있었는가?

이는 흑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심각한 오류요, 역설이었다.

 
 

. 요약 。。。。。。。                      

 

     제목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책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으로 평생을 동료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살다 간 두 사람이지만, 제목에도 나타나듯(vs.), 두 사람의 일생은 많은 부분에서 대조적이었다. 이 책은 그들의 삶에 나타난 대조점들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그들의 사상의 중심을 살피고 있다.

 

     이 두 사람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별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들은 마틴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고, 맬컴은 ‘사악한 검둥이’라고 불렀다. 1장과 2장은 이 두 사람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룬다. 3장부터 6장까지는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미국 내 흑인운동의 양 갈래의 투쟁을 다룬다. 마틴 루터 킹을 중심으로 한 통합주의자(흑인과 백인의)들과 맬컴 엑스를 중심으로 한 흑인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이다. 필연적으로 마틴은 비폭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맬컴은 방어를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게 된다.

 

     7장과 8장은 두 사람의 마지막을 그리는 장들이다. 흑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목적은 같았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취했던 두 사람. 하지만 의외로 평생 동안 두 사람은 부딪히지 않았다. 오히려 생의 말기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의 입장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투쟁을 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런 기대는 두 사람 모두 암살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9장은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며, 두 사람이 걸어온 투쟁을 요약하는 장이고, 10장에서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지적한다. 11장은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오늘날 계승해야 할 부분들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 감상평 。。。。。。。                    

 

     처음 생각과는 달리 제법 학술적인 냄새가 풍기는 책이었다. 마틴 루터 킹과 관련된 책은 두 권 정도 읽은 경험이 있지만, 대개 그의 연설이나 설교집이어서 한 인물을 종합적으로 살피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또, 말컴 엑스에 관한 내용도 매우 자극적으로 편집된 어떤 책의 한 챕터를 통해서만 가볍게 접했던 터라, 이 책은 이 두 인물에 대한 나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줄만한 책이었다.

 


     책을 통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두 사람의 ‘행동’이었다. 둘은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만 반복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믿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말을 한 대로 살았고, 때문에 그들이 갖는 힘은 결코 작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철저한 도덕성은 그들이 가진 큰 자산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도덕적 이유로 비난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과연 어떤 요건들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열매는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들처럼 말만 하고 행동은 없는, 거기에 도덕적인 결함들까지 엄청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과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한편 그들의 그러한 삶에 종교적 신념이 끼친 큰 영향도 주목할 만하다. 마틴은 기독교, 맬컴은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배경’으로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 “하나님이 홀로 모든 것을 다 하시지는 않습니다. 방관하는 교회는 정말 위험한 교회입니다.”라는 마틴의 말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많은 관심과 그에 뒤따르는 실천들, 그리고 훌륭한 리더가 갖춰야 할 여러 조건들 등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이라 하겠다. 또,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이분법적인 대결구도가 아니라, 미국 흑인운동이라는 큰 조류 안에 있는 두 흐름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 등은 이 책이 갖는 독특한 공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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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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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 평양에서 도망가는 신하들을 향해 백성들이 한 말



 

. 요약 。。。。。。。                      

 

     징비록. 책 제목이 쉽지 않다. 이 어려운 제목은 ‘지나간 일을 뉘우치고(懲), 훗일을 위해 근신시킨다(毖)’는 뜻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의 요직에 있었던 유성룡이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글로 남긴 책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안일한 정부의 대비부터 시작해, 왜적들이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데도 물구하고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저 도망가기 바쁜 선조와 중신들의 생생한 모습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많은 의병들과 충무공 이순신의 활약 등이 책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 감상평 。。。。。。。                    

 

     책을 읽는 내내 울분을 토하게 된다. 글줄이나 읽을 줄만 알고 자기 한 몸보신하는 데만 눈이 밝았지 나라나 백성들의 삶은 아예 관심권 밖에 두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왜 500년이나 지났는데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당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대의 흐름을 정학하게 읽어내지 못했던 당시 지도층들의 어두운 눈 때문이었다. 당리당략에만 집중하면서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상대 당파를 헐뜯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실제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히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중요한 지휘계통의 통일과 지휘권의 독립이라는 기초적인 부분도 확보되지 못했으니 속절없이 왜적들에게 밀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눈앞의 작은 것만 쳐다보고 있으니, 큰 그림을 볼 수가 없었을 터.
 

     아울러 ‘평시’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해버린 것도 큰 피해의 원인이었다. 국방을 위해 군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데 실패했고,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을 그저 고수하려는 완고함은 적절한 시기에 무기의 개량과 군편제의 개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연히 전쟁에 임하는 조선의 자세는 시종일관 임기웅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끌려 다니는 형국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 유성룡은 알지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왜란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자기가 속한 당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이익까지도 제쳐두었던 그들은, 이후 남인과 북인, 소북과 대북, 노론과 소론 등으로 나뉘어 그 끊임없는 싸움을 계속하지 않았던가.

 



     이 책이 묘사하고 있는 그 때와 오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때문에 당시 국가가 처한 어려움에 있어서 백성들은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그저 지배층들의 무능력 탓이라고 마음껏 비난하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국가가 처한 어려움에서 국민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무능한 지도자들을 뽑은 것은 무능한 국민들이니 말이다.

     허구한 날 욕설과 비방만 해대는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텔레비전의 화면과 이 책의 내용이 오버랩되면서 갑자기 나라 걱정을 해보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좋은 옛 것을 배워 오늘에 맞춰 사용하고(溫故知新), 실패한 과거를 경계로 삼아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他山之石). 올해 말의 대선, 그리고 내년에 있을 총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아는 멋진 국민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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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
유성준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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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큰 규모는 실제로 효과를 반감시킵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문화적이기 때문에

깊이를 가지고 문화로의 중독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세이비어교회는 숫자를 통해서 오는 힘의 유혹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 요약 。。。。。。。              

 

     대형 교회가 곧 좋은 교회로 여겨지고 있는 요즘, 이런 추세와는 정반대로 나가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 있다. 바로 ‘세이비어 교회’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작다. 교인으로 등록된 사람이 고작 수십 명(지금은 좀 더 늘어났을지 모르겠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작은 교회가 다른 수 천, 수만의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세이비어 교회만의 철저한 훈련과 올바른 비전의 제시가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세이비어 교회를 탐방한 저자가 그 교회에서 받은 감동을 나누고, 교회의 몇 가지 사역들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무보수로 매년 7,000시간씩 봉사를 함으로써 운영되는 무료 병원인 ‘콜롬비아 로드 진료소’, 노숙자들을 돌보고 보듬어주기 위해 세운 ‘그리스도의 집’, 마약과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의 집’, 인근의 낡은 아파트 두 동을 구입해 집이 없는 이웃들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보급하기 시작해 이제는 수십 동의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게 발전한 ‘희년 주거사역’. 빈민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만나 주거사역’ 등, 이름만 들어도 크고 놀라운 일들을 어떻게 그 작은 공동체가 추진하고 있었을까를 설명하는 1장과 2장이 지난 후, 저자는 잠시 논의를 밖으로 돌려서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공동체 운동의 흐름을 살피며 세이비어 교회와 같은 시도가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3장) 4장부터 6장까지는 저자가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바람직한 교회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 감상평 。。。。。。。          

 

     오랜만에 멋진 교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소위 ‘성공하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인 숫자가 많이 늘고, 큰 건물을 지은 교회들을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정작 성경에 나온 정신과 비전에 충실한 교회를 소개하는 책은 생각보다 드문 것이 현실인데, 이 책은 달랐다.

 

     세이비어 교회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교회의 외형보다 본질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을 안하는 수준이 아닌, 아예 사람이 늘어나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고든 코스비 목사의 생각은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물론 나는 교인이 늘어나는 현상 자체까지를 부정적으로는 보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세이비어 교회의 폭넓은 사역이다. ‘나눔과 섬김’이라는 비전 아래 이루어지는 여러 사역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현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이비어 교회와 같은 시도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고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이비어 교회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도전을 주는 책이지만, 책 자체로서의 구성이라는 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세이비어 교회의 사역들을 설명하는 책인가, 아니면 세이비어 교회에 관한 저자의 감상을 쓴 책인가. 저자는 이 책의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책을 만들고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사역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저자의 감동과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교회의 인물들의 자서전에 자신의 자서전을 끼워 넣기도 한다. 때문에 책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듯 한 느낌이고, 책이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로 교회사에 관한 저자의 사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감리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저자이기 때문에 감리교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까지는 뭐라 하기 어렵지만(사실 감리교가 영국사회에 일으킨 혁명적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고대의 몬타누스와 같은 인물까지 호의적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책이 설명하는 내용은 참 좋지만, 저자의 약간은 성가신 개입이 몰입을 살짝 방해하는 책. 과유불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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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 책갈피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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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러한 갈등을 푸는 길은 오직 하나,

노동자들이 착취의 효과에 맞서는 싸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수단을 손에 넣고 노동력 판매를 끝장냄으로써 아예 착취의 싹을 도려내는 것뿐이다. 


1. 요약 。。。。。。。                      

 

     책 제목에 나온 것처럼 ‘도대체 사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존 몰리뉴는 실제로 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당원이며,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매우 강렬한 필치로 설명을 해 나간다.

      제 1장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2장에서는 사회주의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설명을 한다. 나머지 장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사항들에 대해 교정을 시도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생각보다 강력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어서 약간 뜨끔했다. 사실 처음 책을 선택한 이유는 사회주의도 제법 타당한 면이 있음을 완곡하게 설명하는 책으로 생각했었다.

 

     저자의 현실 인식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본주의라는 악이다’라는 명제에 근거한다. 사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자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는 이미 우리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이니, 저자의 주장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소위 ‘완전자유시장경제’의 가장 큰 폐단이 아닌가. 경제 공황으로 인해 값이 폭락한 멀쩡한 목화를 창고에 쌓아두다 못해 모두 불태우면서까지 값을 올리려고 했던 대자본가들의 눈에는 당장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 따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 식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시장경제라는 환상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로 인해 ‘자본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생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뭐하나,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자신에게만 유리한 무엇으로 만들어버릴 텐데. 저자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면서 사회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탈린 같은 인간이 사회주의 치하의 국가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제도의 허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저자는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간단히 반론을 펼지 모른다. 하지만 인류 역사 언제, 단 하나의 사상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던가? 그런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아니 몽환적인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혁명을 위한 폭력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제체제와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식이다. 이래서야 비싼 집 가진 사람에게 세금 좀 더 걷겠다고 말하는 정부더러 빨갱이니, 좌파정권이니 하는 식으로 욕설을 해대는 우리나라의 모 정당이나 수구언론들과 무엇이 다른가. 둘 다 철저하게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믿는 바를 주장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도 비난할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생각을 신봉하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히 그 사상도 당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제시되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당성도 인정받고 있기에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국가가 자본주의 요소에 사회주의 요소를 첨가한 ‘수정자본주의’를 근본 정책으로 택하고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극단적으로 신봉할 때 나타났던 많은 문제들과 유사한 것들이 사회주의를 극단으로 이끌고 갔을 때도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어나갈 수록 더욱 강하게 든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책의 문장들은 참 깔끔하게 쓰였다. 일차적으로는 번역자와 저자 모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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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구속 - 20주년 확대개정판
알버트 월터스.마이클 고힌 지음, 양성만.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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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오랫동안 고대했던 그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또한 그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시하는 것이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특히 행하시는 예수님은 그 자체가 바로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였다.

 

 

     

. 요약 。。。。。。。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목차를 보면 대략 내용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저자는 우선 ‘세계관’이란 무엇인지를 논하고(1장), 이어서 세계관적인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을 한다. 저자는 특별히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 가지 주제들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설명하고(2-4장), 5장에서는 그 실제적인 적용을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여준다.

  

 

   

. 감상평 。。。。。。。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 가운데 한 권이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는 ‘세계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유익이다.

 

     특별히 ‘구조와 방향의 구분’이라는 한 장(章)을 할애해, 기독교 세계관의 직접적인 적용의 예를 다루고 있는데, 비교적 초기에 쓰인 이 책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매우 탁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에 익숙해서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까? 거의 일 년 간 세계관에 대해 공부하고 나름대로의 연구를 지속해 온 내게 이 책은 참 익숙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도리어 이 책의 면면에 대한 분석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사실 책의 비중 상 진작 읽었어야 했다)

 

     논리적으로 잘 짜인 순서대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쉽게 제시하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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