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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정체 가능성에 대한 리카도의 암울한 그림은

오늘날의 논쟁에도 시사점이 있다.

최근 몇 십 년 사이 금융 분야가 비대하게 팽창하고

투기로 막대한 지대를 가져가면서

생산적인 산업에 투자할 인센티브를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몇몇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금융 부문이 실물 경제(산업) 부문에 비해 너무 커지면

성장이 둔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이윤은 재화와 서비스를 새로이 산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그 재화와 서비스에서 나오는 돈을

단순히 이전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마리아나 마추카토, 『가치의 모든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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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공모 -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신의 생명사 시리즈 1
로버트 에릭슨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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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그 부역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무려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이 외에도 5백 만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더 있었다. 전쟁 중 사망자 이외에도) 이른바 “홀로코스트”다. 가히 인류가 행한 가장 잔혹한 범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홀로코스트에 단지 나치와 정신 나간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고생해 보이는 교회와 대학의 구성원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해 모았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목사들과 교수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경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매우 중요하고, 옳은 일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나치의 이상에 동조하거나 찬동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다수가 여기에 동조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의 우리나라 정국에도 빗대 볼 수 있는 부분인데,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겁박하고, 최종적으로 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쿠데타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의 탄핵을 막고 오히려 내란을 옹호하던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목사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다수는 중국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인에 대한 격렬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나치와 그 부역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만약 그들에게 나치와 같은 힘이 있고, 중국이 작은 나라였다면 실제로 행동으로도 옮겼을지 모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교회 내 나치 반대세력의 활동과 노력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대표적으로 본회퍼 같은 인물인데, 저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본회퍼나 고백교회의 활동범위와 영향력이 좁았음을 이유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려고 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정량적인 기준만을 사용하겠다는(혹은 중요하다는)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네가 뭘 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노력 따위 의미 없다는 식의 사고가 옳을까?


그리고 이 정도의 책을 내면서 교회나 대학 당국의 나치 부역행위에 관한 증거 수집이, 단순히 연설문이라든지, 입장문 같은 ‘말’이 주가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 볼만하다. 물론 이들의 주요 도구가 ‘말’이긴 하지만, 그리고 선전선동 역시 분명한 잘못이긴 했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도 그들이 직접 홀로코스트에 개입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치 당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저자가 교회를 비판하는 지점 중 하나는 히틀러와 나치가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 그러니까 초기에 교회의 저항이 단지 교회의 자유(종교활동의 자유)에 국한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좀 애매한 것이, 그렇다면 교회와 (아직 실현되기 이전의) 정권의 정치행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야 했다는 말일까? 그건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비판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사실 정책이라는 건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고, (이번 친위쿠데타 사건처럼) 그 정도가 과도할 때가 아니면 교회는 정치와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 두 장에는 히틀러와 나치가 몰락한 뒤, 급히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던 교회와 대학 당국의 행태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때로 그들은 나치활동에 꽤나 깊숙이 개입했던 이들마저 구해내려는 시도를 했고, 이 과정에서 명백한 거짓이 동원되기도 했다. 끝까지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래도 이즈음 우리네 비슷한 이들은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적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그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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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의 정신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2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IVP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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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옥스퍼드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은 여성들 중 한 명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사회는 극심한 인력부족에 시달렸고, 대학에서도 그때까지 허용하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학위 수여를 결정하게 된 것이라는 사정이 있었다. 물론 세이어즈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고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당시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 중 한 명이 바로 C. S.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이후에도 제자이자 동료로서 세이어즈의 오랜 교류를 한다.


세이어즈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했고,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주목받는 건 작가로서의 그녀의 업적이다. 양차 대전 전후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추리소설계에서도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고(체스터턴도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세를 얻은 걸 보면 확실히 그 시절 추리소설이 인기이긴 했나 보다. 루이스는?), 나중에는 희곡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유독 그녀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잘 담아 녹여낸 작품들을 썼기 때문이다. 드러내 놓고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기 보다는 문학 작품 속에 그 내용을 녹여내는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창조자의 정신”은 꽤 이례적인 책이었던 듯하다. 이제까지의 작품 활동과 달리 이번에는 기독교 교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책을 썼다는 반응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머리말에서 작가는 극구 그런 관점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책을 쓴 것은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드러내며 기독교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기독교가 진술하고 있는 교리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주석 작업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사실의 진술과 개인적인 감정 표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작가가 여기에서 시도한 작업은 요컨대 기독교 신앙은 그저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에 관한 이해라고 보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 정통 교리(특히 삼위일체에 관한)가 일상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이 작업을 저자의 직업이기도 한 작가와의 유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릴 때 그와 비슷한 현실 세계 속 무엇과 비교하면서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비슷한 것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작업(주로 시인이나 작가 같은)이라는 것이다. 창조라는 작업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인데, 예술가들이 하는 일(특히 시인과 작가들이)이 바로 그런 일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인 “창조자의 정신”은 하나님과 예술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다.


책 전반에 걸쳐서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예술가에 비견해 설명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이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록 삼위일체가 우리의 논리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 양식과 기능하는 과정은 충분히 일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범신론으로 설명하려는 오류에 관해서 “창조적 정신이 작품들을 하나씩 생산해 내지만 창조적 정친이 곧 작품 하나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작가와 그가 쓴 책이 곧 동일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며 빠져나간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속성을 예술가의 작업으로 빗댄 부분이 인상적이다. 창조와 예술 사이의 공통점에 관해서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발견되는데, 나니아의 세계는 아슬란의 노래로 창조되는 장면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정말로 좋아했는데, 세이어즈는 이 부분을 이 책에서 좀 더 설명적으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문학적으로 잘 그려낸다.


확실히 루이스가 인정했던 작가다운 글솜씨인데다,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루이스의 향기도 살짝 묻어 나와서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20세기 초중반 영국에선 루이스와 톨킨과 체스터턴과 세이어즈도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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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은

자신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옳고 당연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 방식을 따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기 십상입니다.


로완 윌리엄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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