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독자들이 쓴 나무 2
강창모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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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미있는 시도의 책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작가이고, 독자는 그 책을 읽는다는 전형적인 공식을 뒤집는 기발한 상상의 책이었다. 바로 독자가 쓴 책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직후, 베르베르가 새로운 책을 썼나보다 하고 주저 없이 빼서 펴보았지만, 웬걸 이 책은 베르베르의 작품이 아니었다. 전작인 『나무』를 읽은 그의 한국 독자들이 베르베르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쓴 것들을 모아 놓은 글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책 가운데서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은 이 책을 만든 방식이다.

 

        저자들의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다양하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수 백편의 글 가운데 뽑아서 엮어진 글들인 만큼 하나하나 기발한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마추어 작가들의 글이라서 그런지, 베르베르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인간성에 관한 심오한 고찰이나, 사회 전반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우스개를 섞은 비판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표면적인 풍자나 비판의 선에서 그치고 마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늘 서평을 쓸 때마다 인용해 놓고 하는 한 두 개의 멋진 문장을 이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풋풋함이 또한 읽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요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도 작가 목록에 끼어있다는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책을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고등학생들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친구들이 잘 성장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멋진 작가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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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루스 다미아니와 중세의 교회개혁운동
김봉수 지음 / 그리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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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아니가 개혁의 추진과정에서 주된 개혁의 대상에 성직자를 갖다 놓은 사실은

그를 동시대 개혁가들로부터 갈라놓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요약 。。。。。。。                      

 

     이 책은 중세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개혁운동들과,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페트루스 다미아니, 훔베르트, 힐데브란트(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등의 인물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후자들이 전자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추적해 나가는 논문이다.

 

     저자는 당시의 교황청 안의 개혁세력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온건파로 불릴 수 있는 다미아니와 강경파의 훔베르트가 그것이다. 당시 교회 안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악덕들은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순결문제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제에 집중하면서 개혁의 방법에 대한 다른 해답을 제시한다. 온건파인 다미아니는 성직자 순결문제에 집중하면서 성직자들 개개인의 자질향상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강경파인 훔베르트는 성직매매문제에 천착하면서, 그 주요 원인으로 세속 군주가 성직수임의 권리를 갖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교회를 그러한 세속군주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문제의 해결방식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전자는 내부에서, 후자는 외부로부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 책의 저자는 다미아니라는 인물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서술을 진행한다. 비록 그가 중세의 교회개혁운동의 한 복판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다미아니의 본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세속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서 좀 더 깊은 영적인 세계에 헌신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런 다미아니의 내부적 욕망과 외부적 역할에 대한 의무감 사이에서 일어났던 고민을 설명하는 데 처음의 한 부를 할애한다.

 

 

 

     두 번째 부에서는 훔베르트와 힐데브란트의 강경한 개혁정책들을 소개하고, 그들과 다미아니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힘겨루기가 ‘교황선출칙령’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다미아니 사후 선포된 ‘교황수장령’에는 필연적으로 강경파의 의견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마지막 부는 일종의 부록으로, 중세교회의 여러 면면들을 짤막하게 서술되어 있다.

 

감상평 。。。。。。。                     

 

     학부에 다닐 때 일곱 학기 동안 일곱 개의 강의를 들었던 교수님의 책이다.(물론 학점은 모두 A+) 그 교수님이 새로 내신 논문을 책으로 엮으셨고, 직접 사인까지 해서 한 권을 주셨다. ^^



     우선 논문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자세한 주가 인상적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에 그 연구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중세 교회의 독특한 분위기를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흔히 ‘중세 교회’라고 하면 교황권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모든 것이 신학의 시녀가 되는 상황을 떠올리지만, 사실 실제의 모습은 매우 달랐다. 중세 내내 세속권력자들(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 프랑스 등의 왕들)은 사설교회 형태의 교회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종교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성직자로 군주들에 의해 임명되곤 했었다. 자연히 그에 맞는 자질을 소유 했을 리 만무하다. 성직매매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각종 도덕적 부패들은 이런 관행에 기인한 바가 컸다. 자연히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왔고, 그 중에 나름대로의 성과를 남겼던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 다미아니와 동시대의 훔베르트,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등이었다.

      그냥 뭉뚱그려서 ‘중세 교회가 어쩌구~’라는 식의 말을 하기보다는, 우선 그 부분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특히 당시 교회가 내외의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개혁을 추진했었는지, 또 루터가 주장했던 개혁의 내용들이 그보다 수 백 년 전에 주장되었다는 실제의 예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다만 책이 논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좀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책의 3부는 약간 내용이 느슨하고, 전체와의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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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이야기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9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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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곳을 떠나는 최초의 가족들 중에 하나였다.
정권을 잡은 보어 인들은 요하네스버그에 백인만 살기를 원했다.
우리 동네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모조리 떠나야 했다.




. 요약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던 인종분리, 아니 인종차별정책을 이르는 말인 ‘아파르트헤이트’. 이 책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일어났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은 일종의 모음집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모두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어린아이들의 눈을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우월주의 정책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가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 감상평 。。。。。。。                     

 

     19,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과학기술의 폭발적인 발전과 그에 따른 삶의 질의 급격한 개선은, 이제 곧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품고 있는 이상주의자들은 이대로만 간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과학과 기술만 발전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장미빛 기대.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깔아뭉개버린 사건 중 하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도 어이없는 정책이다. 유럽에서 이민을 온 백인들에 의해, 오로지 백인들을 위해, 백인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만들어진 이 정책은, 단지 인간을 피부색으로만 구분하고 판단하고, 재단하고, 차별과 비난, 모욕을 하는 멍청한 법률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의식의 발전과 함께 나가지 못할 때 나타나게 되는 비참한 현실은, 자유와 인권을 향한 외침(의식)을 총(과학과 기술)으로 억누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 책이 남아공에서 있었던 그 반인류적 정책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고발하는 르포 형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그 땅에서 일어났던 그 차별과 폭력을, 그다지 강력한 비난의 어조나 흥분된 없이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구성에서 각 이야기의 화자가 어린 아이들이라는 점은 사태의 심각성을 역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벽에 부딪히고, 상처받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더 큰 공감대를 갖게 된다. 다만 어린아이의 시각을 사실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글을 통한 강한 정서적 감동이나 전이가 약하다는 점이 아쉽다.(좀 많이 잔잔하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문제 해결에 관한 중요한 시발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인간들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읽었던 ‘내 이름은 임마꿀레’라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르완다 내전에서도, 소위 서구 강대국이라고 하는 유럽의 열강들이나 미국들은 자국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팔짱을 낀 채 르완다 정부의 대량학살을 방치했고, 오늘도 여전히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정식 재판절차를 밟지도 않은 채 단지 미국 정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도 미국은 침략전쟁을 통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을 기분 내키는 대로 살해하고 있다. 중국은 티벳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하고 있고, 북한의 당국자들은 수많은 양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군대를 키우는 데 만 온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과학의 발전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물질적인 무엇에만 계속 집중한다면, 우리는 제 2의 아파르트헤이트, 제 3의 르완다 내전 등을 쉴 새 없이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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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천사 하얀 악마 - 검정과 하양의 문화사
김융희 지음 / 시공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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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이건 색의 정체를 한마디로 밝히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불가능한 일이다.

색의 정체는 색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색과 색이 만나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색과 만나는 우리들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감지되고 서명되고 소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색의 정체를 탐색해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 요약 。。。。。。。                      

 

     제목만 보면 ‘다빈치 코드’ 종류의 신비주의를 가미한 통속소설로 보이지만, 사실은 미술사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검은 색과 흰 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을 소재로, 인류의 미술사에 그것들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사용되어왔는지를 비교,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서론에서는 두 색의 공통점인 ‘무채색’이라는 점에 관한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하고, 1장(하얀 천사와 검은 악마)에서는 두 가지 생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관념-신성, 선의 대표색으로서의 흰색과 악의 상징으로서의 검은 색 -을 다룬다. 2장에서는 이와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두 가지 색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3장(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난, 쉼표 같은 색)에서는 두 가지 색에 관한 약간은 철학적인 상념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4장(우주의 원리를 담은 흑백의 본질)에서는, 앞서의 논의들과는 달리 동양적 사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색의 의미를 설명한다.
 

. 감상평 。。。。。。。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릴 때, 가끔 내 전공과는 영 거리가 있는 책들을 한 권씩 빌리곤 한다. 물리학이나 수학, 음악 등에 관한 책들이 그것이다. 늘 읽는 기초 인문학 관련 책들만 계속 읽다보면 솔직히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머리가 자꾸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이 책도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 뽑아 든 녀석이다.

 

      책은 앞에도 설명했듯이,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들의 독특함과 그 독특함에서 파생해 나온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색깔 자체야 ‘나는 이런 색입니다’라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냐 만은, 똑같은 색을 두고도 시대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부여하는 모습이 제법 재미가 있다. 저자도 말했듯이 ‘색의 정체를 탐색해 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 미술에 관한 책답게, 저자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많은 수의 그림 보조 자료들을 사용해 ‘보는 재미’도 함께 느끼게 해 준다.(물론 덕분에 책값은 상승?!) 역시나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실감하겠다.

 

      저자는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가지 소재가 담고 있는 다양한 상념을 한 권의 책으로 엮고자 노력했다. 나름대로 주제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반대로 때로는 서로 반대되는 진술들이 고작 몇 페이지만을 사이에 두고 나오기도 하니 약간 혼란을 느낄 만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완전 정반대의 내용으로 두 번에 걸쳐 실려 있다. 요런 건 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어서인지 문장들은 매끄럽다.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니 쉬어 가는 기분으로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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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 처한 교회음악 - 기독교인을 위한 필독서 101
프랭크갤럭 외 지음, 홍성수 옮김 / 두풍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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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음악)가 젊은이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음악이 주는 메시지의 가치기준과 메시지의 성격이 반복을 거듭하면서

젊은이의 마음은 감동받기 쉬운 상태가 될 것이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강력하면서도 감정적인 음악의 매개체에 노출됨으로써

그 메시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 요약 。。。。。。。                     

 

     저자는 현대의 교회음악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전제 아래 책의 내용을 진행시킨다. 구체적으로 그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록 음악을 교회음악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록 음악’이라는 수단 자체에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노래가 주는 영향력에 있어서 그 가사보다는 음악 자체(멜로디와 리듬)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록 음악의 경우에는 그 음악 자체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바꾸어도 교회 안에서는 사용하기에 어렵다는 것이다.

 

 

. 감상평 。。。。。。。                   

 

     어떤 것들을 대할 때, 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성’까지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에는 동의한다. 때로는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용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법이니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하루에 여섯 시간씩 강력하면서도 감정적인 음악의 매개체에 노출됨으로써 그 메시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들(이 책은 공저로 되어 있다)은 록음악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입장을 취한다. ‘위험에 처한 교회음악’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런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들이 보는 ‘위험’은 록음악이 교회음악 안으로 들어오는 현상을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록 음악이 가지고 있는 ‘관능성’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감정은 악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역시 악하며, 록음악이 그런 기능을 하므로 그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삼단논법을 사용해 자신의 주장을 매우 확고한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주장은 매우 극단적인 반문화적 견해나, 혹은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고 전자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하던 고전문화 이론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선 저자의 논지의 핵심적인 전제인 ‘어떤 감정은 악하다’는 문장은 과연 옳을까? 이 문장은 ‘어떤 감정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감정 중 본질적으로 악한 감정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어떤 감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치 못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분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분노조차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을 ‘미워하고’, 사탄을 ‘대적하라’고 강하게 권하고 있다. 즉, 분노와 같은 파괴적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절한 방향을 향해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악을 향해 있을 때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관건은 ‘구조’가 아닌 ‘방향’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오류는 어떤 음악의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때문에 특정 장르, 특정한 비트, 특정한 악기와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성경의 진술과는 모순된다.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악하지는 않으며, 다만 인간의 타락과 그 영향력으로 인해 그것의 방향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그것들을 비난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본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록 음악 자체가, 그것에 사용되는 악기나 특정한 리듬, 또는 전자적으로 소리를 변형, 증폭시키는 어떤 기구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주장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내 생각이 기존에 나와 있는 모든 록 음악을 교회 안에서 노래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록음악이 태생적으로 6, 70년 대 영국과 미국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 약물들, 극단적인 체제의 부정, 변태적인 섹스나 인간관계 등의 요소들을 안고 성장해 온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아 자신이 만든 음악에 그런 변태적이거나 건전치 못한 사상들을 섞어 짜 내려간 노래들이 많고, 이런 것들은 분명히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방향의 문제이지 본질이나 구조의 문제는 아니다.

 

     록 음악 안에 있는 타락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정련 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멀리하고 매장시키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개인적으로는 록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록 음악에 관한 변론 아닌 변론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르게 회복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꽤 극단적이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그리스도인들도 비종교적이면서 훌륭한 음악은 들을 수도 있고 또 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원론적인 태도가 묻어 있는 진술이다. 사실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는 그 자신의 종교적 신앙이 함께 나타난다. 특별히 예술과 관련된 부분에는 이러한 경향이 좀 더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비종교적인’ 무엇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문제 이외에, 현대의 교회 음악이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 인간 중심적 경향에 대한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 타당하다. 또, 매체 자체의 본질적인 악함이 아니라 작곡자의 경향성에 대한 비판 부분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구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 책은 구체적인 추론 과정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고, 대부분 단언과 유리한 어구들(성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만 나열하는 모습이다. 사실 이 책의 논리적인 연결은 최초에 등장한 몇 문장의 삼단논법이 거의 전부이다. 썩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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