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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
어느 날, 별다른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아내,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 2년여가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싶었던 그에게, 한 사람이 나타난다.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어쩌면 아내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남자는 미하일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게 되고, 마침내 사라진 아내까지 만나게 된다.
소설을 1인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주인공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의도적인 듯, 이야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주인공을 단지 ‘선생’이나, ‘당신’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철저하게 주인공의 시각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내면에 대한 성찰’이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리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서술방식이다. 물론, 의미있는 심리적 변화의 순간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빠지면, 아무리 좋은 서술방식이라고 해도 그 빛이 바래버리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글의 첫 머리에서 아내의 실종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밖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하지만 자유가 뭔가?
오랫동안 나는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왔다. …… (중략) …… 투쟁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별난 권리를 옹호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갔다. 부모의 욕망의 노예, 타인과 ‘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결혼생활의 노예, 체중계의 노예, 정치체제의 노예, 금방 포기하게 될 무수한 결심들의 노예였다.
이 개념은 이야기의 끝까지 지속된다. 주인공은 에스테르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원래 바라던 무엇인가를 점차 잃어버리고 결국 완전히 관습과 상황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또 에스테르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사랑)을 위해 여타의 모든 부수적이며 옭아매는 것들로부터(‘결혼’까지도 포함하는) 자유로워지기를 원해서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이제 아내를 찾아 나서지만, 아직 버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히르였다.
자히르는 사람을 강력히 빨아들이는 무엇인가다. 어떤 사람이 한 번 보거나 만지고 나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래서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자히르였다. 주인공에게 자히르는 아내였던 에스테르. 주인공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야만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지만, 아내를 향한 꺼지지 않은 사랑으로부터도, 곧 자히르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된다. 딜레마였다.
하지만 마침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새기게 된 주인공은 아내와 다시 재회를 한다. 아내가 다른 이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주인공의 ‘깨달음’을 '증명'했다.
연금술사에서도 읽어 낼 수 있는 저자의 내적 성찰에 관한 의도가 거의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여전히 저자는 인간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고결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이번에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였다. 인간 외부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모습은, 근대 이후 신을 버리고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자 노력하던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완전한 자율, 신으로부터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오류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재를 가져다 사용한다.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소재에 빠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될 테니 말이다. 저자는 아마 어떤 종류의 권위도 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것들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며,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하일과 그의 동료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사는 모습들은 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지처럼 구걸을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복장에, 한 밤중에 술을 연신 들이키며, 빈 건물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자유’였다. 이상이 미하일의 도시 친구들이라면, 중앙아시아의 친구들은 보다 ‘영적’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초원의 종교’를 믿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그런 식으로 발현되었다.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추구하던 이들이 결국 또 다른 종교적 형태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종교의 규칙에 따라 행하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 꽤 흥미롭지 않은가?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는다면 온갖 종류의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인간 내부에서 지고의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고,(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반대된다) 역시나 그런 전제 아래 나온 결론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다.(사실 세계관은 종교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러한 신념에서 나온 결론은 결코 온전한 것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냥 사랑 이야기로만 읽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약간 깊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