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철학 - 몰입과 성장을 이끄는 스탠퍼드 마지막 인생 수업
빌 버넷.데이브 에번스 지음, 이미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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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요새는 좀 다른 이야기들도 나오지만,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직장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비전이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꼭 어떤 종류의 직업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직장이 늘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들어가기 전에는 어떻게든 합격하기를 바라지만, 정작 입사한 후에는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고, 때로 회의를 느끼다가 결국 그만두는 경우는 적지 않다. 예전과는 다르게 평생직장 같은 개념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 이런 과정은 좀 더 빨리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이 별 영향이 없다는 의미는 또 아니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스탠퍼드 대학의 디자인스쿨에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이란 무언가 제품이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디자인한다는, 좀 더 인문학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직장을 재디자인 해보자, 이 책의 주제다.


두 명의 저자들은 우리가 직장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면 실제적인 변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건 우리 쪽의 생각을 바꿔나가고,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도 바꿔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지만, 그게 꼭 상황의 변화까지 이를 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우리는 애초에 수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던가. 그 가운데서 우리의 생각이 변화될 수 있다면 그 또한 분명 유익한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게 우리가 하루 중 1/3이상의 시간을 사용하는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면.


중요한 건 그 생각의 재구성이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건, 돈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고, 최고만을 바라는 완벽집착이 아니라 지금 실행 가능한 최고의 선택지를 고르라는 것과, 회사 내에서 바르게 영향력을 쌓고 사용하는 법, 심지어 잘 퇴사하는 법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향의 조언들이다.





중요한 건 심리적인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시야가 좁아지고 잘못된 생각과 선택을 하기 쉽다. 저자들은 우리의 일을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팁을 제안하면서 이 작업을 돕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대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책을 읽으려는 노력조차 필요 없을 테니까. 말 그대로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들이다.


직장 초년생들에게 권해주면 좋을 듯한 책이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된 이들에게도 제법 와 닿는 지점이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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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름다움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만은 아니며,

실재의 본성을 향해 열린 창문과 같은 것이라고,

그것도 아주 중요한 창문이라고 믿습니다.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사랑이 미움보다 낫다는 것을 저는 분명하게 압니다.

저는 이런 도덕적 통찰이 어쩌다 제가 살게 된 이 사회의

문화적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제 유전자를 더 효과적으로 퍼트리기 위한

어떤 묘한 전략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 존 폴킹혼,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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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다.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렇다.

사별도 많이 겪어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추억에 눈물이 나고 가슴속에는 고독이 점점 더 두텁게 한 겹 한 겹 깔린다.

고독이 우리를 에워싸고 세상과 괴리시킨다.


베로니크 드 뷔르, 『체리토마토파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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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 차이를 품되 구별되어 세상을 섬기다
팀 켈러.존 이나주 외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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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분열의 시대다. 그건 대통령 탄핵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까지 옹호하며 나라를 분열로 몰아가는 우리 정치 갈등의 근원에는 박정희 독재시절 정권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킨 지역감정이 깔려 있다면, 외국의 경우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갈등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인종과 종교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을 편들면서 다른 쪽을 비난하는 방식이 전부일까. 아니면 언제나 양측의 중재자 입장에 서서 화해를 시키려는 쪽을 선택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대책 없는 양비론을 주장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 일들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단순히 골방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기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 못지않게 극심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이런 분열과 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고백과 그들의 삶에 대한 보고를 담고 있다. 대표 저자로도 실려 있는 팀 켈러는 목회자이지만, 가수와 음악가, 법학 교수나 정신과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선을 긋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선명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여기에서 그리는 세상의 이미지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신학자인 키르시틴 디디 존슨은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라는 상징을 꺼내든다.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충분한 물과 양분을 확보해 가지를 넓게 뻗고, 이때 이 가지들은 다른 나무의 가지들과 겹치게 된다는 것. 즉 자신이 속한 전통에 충분히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면, 다른 뿌리에서 나온 전통과 겹치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공통 분모로 삼아 함께 유익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을 모험가라고 소개하는 IVF 대표 톰 린은, 대만계 미국인이다. 최초의 유색인종 대표였던 그는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향 감각 상실과 낙담은 “가족 캠핑 여행만 떠나본 이들이 진짜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받게 되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우세인 (미국) 문화권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사회가 다원화 되면서 경험하는 당혹감을 말한다. 우리의 상황에 맞춰서 조금 바꿔보자면, 교회 안에서만 지내던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경험하는 방향 감각의 혼란과 비슷하달까.


여행을 가서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이 익숙한 상황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그런 사람은 그냥 집에만 있는 게 낫다. 괜히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보다는. 하지만 젖먹이 어린아이 시절에야 그런 것이 가능하지, 다 큰 성인이 그렇게 한다면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르면서 주변의 걱정을 살 수밖에 없다.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인이 되려면 결국에는 집밖으로 나와야 하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여기에 필요한 다양한 태도와 준비자세들, 요령들을 소개해 준다. 한 명의 저자가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내용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들 속 겹치는 내용들을 포착하는 것은 가능하다. 겸손과 포용, 경청,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책 속에 한 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글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면서, 정의의 추구를 단지 “올바른 해시태그 사용이나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표명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도덕성을 과시하는 일과 혼동”할 때가 많다. 정작 중요한 건 진짜 사람들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이, 또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중 하나라도 실재로 내면화해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부 목회자들이(그리고 “자칭” 목회자들이) 자주 엉뚱한 망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조금 짐작되기도 한다. 그들은 실제 세상 속에서 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 적도, 그들 속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안전한 성에 갇혀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리니, 온 세상에 음모가 가득하고, 오직 자기와 지지자들만이 마지막까지 남은 생존자라는 괴상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디 세상에 좀 나와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럴 용기가 없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인간과 가장 다른 존재인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두려워하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오늘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하나님을 수하처럼 부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가 만났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은 실은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다른 게 아니었나 싶은 깊은 의혹이 든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비슷한 감각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해야 하는 일과 국가적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는 존재한다. 교회가 하는 일과 국가가 하는 일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없다고 보지 않는다. 또, 분명 어떤 차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의 의지를 꺾지는 않는다. 비록 상대가 우리와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라도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겸손은 나약함과 다르다. 그건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주려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가진 뿌리의 단단함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관용과도 잇닿아 있다.


기독교인들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사회는 점점 더 다원적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다. 물론 일부의 반동적 노력들이 잠시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단일적 문화적, 민족적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독교는 다양한 문화들이 섞여 있는 로마제국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양한 배경들은 교회를 채색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교회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유전적 동질성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작은 바이러스로 단번에 멸종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교회는 이 위기를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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