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래서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국 남에 의해서 끌려다니는 인생이 되고 만다.
가장 불행한 것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 문애란, 『출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에서
제목에 고양이가 들어있었다는 게 이 책을 도서관에서 집어온 결정적인 이유였던 거.. 맞다. 물론 대충 몇 장을 떠들어 보기는 했는데, 의외로 진지한 철학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민 없이 들고 왔다.
책은 고양이의 삶과 인간의 삶을 대조하면서, 인류의 철학사에서 제시되었던 주요 주장들을 고양이의 입장(으로 위장된 저자의 생각이겠지)에서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식의(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읽을 수도 있다) 논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책 초반 저자는 인간 삶의 대부분은 행복을 위한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양이들 사이의 행복은 그저 실제적인 위협이 사라지면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상태라고 말하면서, 뭘 대단한 걸 자꾸 이루려고 그러느냐, 그냥 지금 큰 위기 없이 살고 있으면 나름 행복한 게 아니겠느냐는 결론으로 이어간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식의 주장이 반복된다.
너무 태평스러운 말 아니냐는 반문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철학사 전반에 관한 요약 및 그 비평과 함께 들이미니 책의 수준을 가지고 쉽게 뭐라고 하기에는 또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또 하나하나 따져들어 가면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도 못할 건 아니다.
책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건 합리주의적 철학과 인류와 우주의 거대한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사유들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에 대한 강한 부정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친화적인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사실은 대단히 독단적인 전체주의적 철학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자는 세속의 일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하고 평론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건 도교 같은 동양의 철학에 약간은 호의적인 데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뭘 원하는 것이냐, 당신이 말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반 깊은 설명이 없으니, 딱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 모두 까기의 느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고양이의 삶에 관한 다양한 관찰들과 사유들은 흥미로웠고,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몇몇 문학 작품들 속 철학적 메시지와 철학사 전반에 관한 이해 등등 읽어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애초에 사람이 고양이처럼 살 수도 없는 법이고, 고양이에게 지나친 의인화를 통한 투영을 하는 심리 자체도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표출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과 기록관은
민주주의, 법에 의한 통치, 개방 사회를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그들이 ‘진실을 고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 리처드 오벤든, 『책을 불태우다』 중에서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되었던 명제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주로 바울의 글에서 이 결론을 도출해 냈고, 그건 온갖 변질된 공로주의로 점철되었던 당시 가톨릭교회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었고, 교정이기도 했다.
사실 교회는 중세 초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나 도나투스 등과의 논쟁을 통해 정립한 대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공로가 아닌 은혜의 절대성을 정통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고위성직자가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이 되면서 자리를 정치적으로 나눠 갖기 시작하고, 그에 비해 직접 사람들을 대면하는 하위성직자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이탈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의 정통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이 주장에도 변질이 시작된다.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는 가르침은,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우리의 행동과 결정이 구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일종의 행위무용론으로 이어졌다. 이걸 좀 더 대중적인 버전으로 바꿔 말하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뭔가 더 심오한 내용을 배울 필요도, 본성에 어긋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옳은 일을 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 없다는 식의 구원파식의 결론과 비슷해진다.
물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런 빈약한 구원론만을 갖고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실천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런 노력은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범죄들은 이런 잘못된(혹은 잘못 이해된) 구원론도 일부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흔히 바울의 핵심 주장이라고 알려진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에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고 말한다. 그 빠진 부품은 바로 행위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는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로마서를 중심으로 바울의 원래 주장은 행위무용론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위(개역개정에서는 ‘역사’로 번역)”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칭찬한다. 바울은 분명 행위와 수고, 그리고 오래 참음 같은 삶(행위)을 강조한다. 또, 흔히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 노력이라고 비판받는 할례에 대한 강조는, 저자에 따르면 할례 같은 외적 표지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영역을 등한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갈라디아 교회를 경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지점은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태도가 아니라, 단순히 율법을 자신들이 받았음을(그리고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하면서 정작 율법의 내용은 제대로 지키지 않는 모습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면 저자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하는가?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보인다. 언뜻 이 주장은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우스의 오래된 주장의 재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또한 저자는 우리가 “의롭게 될 당시 믿음이 행위를 동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299)는 점에서 좀 다른 입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행위와 동떨어진 다른 개념이 아니라는 부분이다. 행위란 “현재 우리의 삶을 달리 부르”는(21)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위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22)라고도 말한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었다고 해서, 우리 구원의 과정에 어떤 행위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299)
문제가 이렇게 된 건 용어의 혼란 때문이다. 애초에 “믿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성경의 용어에는 일체의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 정신적 작용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았다. 신약과 구약 모두 믿음으로 번역하는 말에는 행위의 신실함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59)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말씀 어디에도 우리의 삶이 엉망진창이어도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면 괜찮다는 식의,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애초에 용어를 정확히 했다면, 오늘날 보이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마 바울도 그런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와 그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믿음이라는 단어에 어떤 삶으로 드러나는 태도와 행위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였을 테니까.
확실히 우리 시대는 점점 윤리적 강조를 포기해 나가는 것 같다. 어떻게 살든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들도 확산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좀 다른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무슨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초기의 기독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실질적인 사회 개혁의 선두에 서 있었다.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약 3세기에 로마에서 해방 노에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즉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어느 정도 진정성 있는 행위였는가는 별개로 치더라도,
교회가 지닌 개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임은 틀림없다.
- 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