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속독법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물의 흐름이 빠르면 손과 발을 더 빠르게 움직여서 헤엄치면 된다.
힘으로 해결하는 이 기술은 그다지 권할 만하지는 않다.
- 가마타 히로키, 『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 중에서
IBM(연구원)과 삼성전자(부사장), SK텔레콤(사장) 같은 IT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작가가 살아오면서 듣고 겪은 여러 일들을 기독교 신앙적인 시각으로 풀어놓는 에세이집이다. 확실히 여러 인력과 사업들을 관리하는 위치에서 오래 일해 본 사람들이 갖출 수 있는 넓은 시야가 곳곳에 묻어 나온다.
사회 경력뿐만 아니라 교회에 속해 신앙생활을 해 온 기간도 적지 않았으니, 자연히 교회 내 행정이라든지 여러 운영 방식에 관한 경험도 많았으리라. 이 부분이 잘 드러나는 내용 중 하나가 각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세밀한 기록과 여기에 근거한 보다 밀착된 영적 케어의 필요성을 말하는 부분이다.
물론 요새는 개인정보 보호가 워낙에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어서 이런 기록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염려도 되긴 하지만, 일반 기업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장치와 도구들이 교회 안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퍽 동의가 되는 부분이다. 최근에 여러 경영학 이론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그 중 적지 않은 부분들이 교회의 운영에도 유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교회의 운영이 지나치게 주먹구구식으로 되고 있다는 느낌은 이런 작가의 눈에는 더욱 잘 들어왔으리라.
책 전반에 걸쳐서 저자가 어떻게 진득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가 잘 드러난다. 고난을 광야로 풀어내고, 예수쟁이들이 세상에서 겪는 외로움에 관한 경험이 있는 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온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전반적으로 난해한 문장이나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아서, 편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에세이 류가 대개 그런 느낌이긴 하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기도 하는구나 하는 점을 잘 보여주는 듯.
어째서 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조금이든 많이든 필요로 한다고 드러내는 순간에
상대는 멀어지는가?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중에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이래로, 로마는 벌써 오랫동안 내전 상태였다. 지중해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어졌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그 잔당) 사이의 내전이 간신히 끝났지만, 카이사르의 암살로 다시 한 로마는 내전에 말려든다. 자칭 해방자들은 지리멸렬한 채 암살 이후 정국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유언장에 의해 카이사르를 계승하게 된 옥타비아누스와 힘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안토니우스의 주도로 결성된 제2차 삼두와 두 번째 내전을 벌인다.
실력과 명분을 가진 삼두 쪽 리더와 달리, “해방자”들 쪽에서는 그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 두 번째 내전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양측을 이끄는 지도자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보인다. 군사적 재능이 제로에 가까웠다는 건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의 공통점이고, 군사적 재능은 있지만 냉정함이 부족했던 건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니까.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브루투스 따위가 지니지 못한 냉철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브루투스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었고, 이런 태도는 전투 중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어버렸다.
양측의 충돌은 필리피 전투에서 사실상 끝나고 만다. 양측의 네 명의 사령관 모두 군사적 재능이 A급은 아니었기에 전투는 깔끔하게 끝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양측 모두 사상자 수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결정적인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공화파의 패배로 끝난다. 그렇게 BC 1세기 로마의 두 번째 내전은 끝나는데, 곧이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세 번째 내전이 또 벌어진다. 이 시대 로마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세상 망하는 줄 알지 않았을까...
이번 권에서 자주 언급되는 건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 부분이다. 마침 당시 지중해 전역에 걸쳐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의 수확량이 매우 줄었고, 단기간에 많은 인원들을 먹여야 하는 군단을 소집한 상황에서 이는 굉장히 큰 문제였다. 소위 해방자 진영은 이 문제를 매우 간단하게 해결하는데,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쥐어짜는 식으로 전비를 조달했던 것.
물론 고대의 제국 운영이란 대체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과도한 수탈은 반발심만을 키우게 되고, 기회만 된다면 오늘의 압제자들에 저항하는 내일을 그리게 될 테니까. 해방자들의 근시안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면 군대는 물론 수도 로마의 시민들에게 나눠줄 밀까지 구해야 했던 삼두파(중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한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후 지중해 서부 해상을 누비던 그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협상을 통해 밀을 구입하기로 했고, 이는 당장의 문제로부터 한숨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것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때문에 그냥 겁을 주려고 함부로 운운할 것도, 더구나 한 나라의 최고 결정권자가 전쟁을 쉽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그런 일이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리더가 일으킨 전쟁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어찌어찌 이기더라도 그 과정에서 남긴 상처는 적어도 그 리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정말 최악의 지도자가 있었음이 이즈음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통치자의 자격이 혈통과 돈에서 나왔던 고대 로마에서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지도자가, 하물며 민주적 권력 위임을 통해 통치하는 현대에 그런 망상에 빠진 엉터리가 대통령 노릇을 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위기였다 싶다.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사용하는 간략화된 “복음 소개 책자”와는 달리, 이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수많은 요구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목록은 계속 늘어난다. 물론 때로 그런 요구들 중 어떤 것은 별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중요한 게 분명해 보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많은 요구들을 “제대로” 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적 목표를 세우면 세울수록, 우리는 더 자주, 더 크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앙적 패배주의에 젖어들게 된다. 이 패배주의에는 여러 별명들도 붙기도 하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현실주의나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어서 스스로 뭔가 이룰 수 없다는, 좀 더 영적으로 보이는 변명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태도가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라 애쓰다가 결국 실패를 맞닥뜨리고 좌절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제자의 삶은 고난을 동반하지만, 패배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명령(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라는)을 하시는 분일 리 없지 않은가.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기 이전에 일부의 우려에 대한 단서조항을 붙인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니까.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이는 교회 내에서 특정한 사역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선교는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그렇게 앞장서는 사람들을 후원해야만 하는 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도가 신실한 기독교를 규정하는 유일한 특징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목회자들은 자주 자신들도 미치지 못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떠들 때가 있다. 자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더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교인들의 어깨에 더 무거운 영적 짐을 올려두어도 괜찮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을 내는 헌신보다 성품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진보적인 생각인 것처럼 유행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십자가 처형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 책임은 모든 고위직 관리나 모든 유대인, 또는 이후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지 않았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재촉하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매일 그것을 성취할 수 있고, 그 성취의 결과를 맛보며 살 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성취가 완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의 성취물이 예술가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불쾌해하는 부모는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실 만큼은 강하지만 죄로 물든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한 반쪽짜리 구세주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은 기억해 둘만한 문장이다.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같다 붙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좋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쉽게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 같다.
책 말미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성취를 칭찬했는지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분명 지나치게 현실주의,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본문일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긍정의 힘 식의 사이비 번영신학과는 분명 다르니 오해하지 말자.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말씀 따위는 내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