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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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불안과 혼돈에 빠진 작가가 자신의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롤모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작가가 찾아낸 우상은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데이비드 스탄 조던이라는 인물이었다.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매우 중요했던 인물. 무신론적 유물론을 갖고 있었고(작가는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조직화 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어류 분류학에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고, 미국 서부의 중요한 대학교인 스탠퍼드의 초대 총장에까지 오른다.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작가는 데이비드의 그런 업적에서 자신을 둘러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요령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책 중간중간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간략하게 소개되는데, 소심하고 불안했던 그녀는 독립해서 생활하던 중 한 남자와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내용의 흐름상 분명 남자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는 동안, 술집에서 만난 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녀의 성적지향은 뒤로 미루고서라도 분명 바람을 피운 건데, 남자는 결국 그런 작가를 떠난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인 작가는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여자와의 관계는 끊지 않은 채) 자신의 불안감을 잠재워줄 데이비드에게 더욱 집착을 한다. 이 뭔....





데이비드는 확실히 대단한 자기애의 소유자였다. 첫 아내가 죽고, 사랑하던 아이가 죽은 뒤에도 곧 재혼을 하고 또 다른 아이를 낳았다. 그의 총장으로서의 경영은 매우 독재적이었고, 측근들만을 교수진에 고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류 분류학에 관한 그의 업적은 탁월했고, 1906년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그가 만들어 놓은 어류 표본들이 죄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망가졌을 때에도, 그는 다시 하나씩 그 표본을 복구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데이비드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아갈수록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어두운 모습이 점점 더 드러났다. 그는 우생학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였고, “좋은 인종”을 남기는 것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맹신에 빠져서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불임수술을 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데이비드에 대한 막연했던 동경을 점차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스탠퍼드의 공동설립자였던 제인 스탠퍼드의 독살의혹에 개입되어 있다는 내용까지 나오면서 이 철회는 결정적이 된다. 그는 그냥 고집센 악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데이비드를 보내주는(?) 것이 성에 안 찼던 것인지, 저자는 책 말미,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실을 적어둔다. 현대의 새로운 분류학자들은 “어류”라는 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어류로 묶인 생물종들 간의 차이가 의외로 크다는 말로, 무슨 철학적인 의미는 아니다). 작가는 이로서 데이비드가 평생을 바쳐 해왔던 일들이 실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일이었다고 한 방을 먹인다(물론 그는 진작 세상을 떠났지만).





결국 작가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우주가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 안에서 무슨 목적을 찾으려 하는 시도 자체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 책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듯, 우주에는 어떤 계획도, 목적도 없다. 그 안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우주론적 전제 위에서 자기 존재의 특별함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어류의 분류학적 개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데이비드의 노력을 비웃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애초에 분류학이라는 것 자체가 임의적 기준을 따라 만들어 낸 인공적인 구분이지 않았던가. 여기에 무슨 대단한 철학적 통찰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흐름의 최종 결과에는 인간과 동물,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고, 나아가 우주의 의미를 부정하는 유물론의 공허함만 남게 될 뿐일 테니까.


책의 결말부에서 작가는 나름의 안정을 되찾는다. 이제 앞서의 남자를 잊고 새로 얻은 “아내”와 함께 자신을 모르는 새로운 동네에서의 삶을 하루하루 영위해 나간다. 일이 여기까지 와 보면 애초에 데이비드의 삶에 관한 그 몰입은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문제들은 일정한 수준의 고생을 겪은 후에야 풀리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이제 우주의 모든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안정을 얻었는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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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다음 끼니를 제공할뿐더러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게 돕는 최상의 장기 전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만큼

그런 활동을 통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물론 죄와 타락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지만,

기업 활동과 교환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고안된 만큼

근본적으로 선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폴 스티븐스, 『일터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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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영화는 1971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속초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가 납치범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막으려던 조종사 중 한 명이 폭발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화 속 하정우가 연기한 태인이 바로 그 죽은 조종사였고, 납치범 역할은 여진구가 맡았다.


다만 영화 속 묘사와 달리, 죽은 조종사는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대한민국 공군기 조종사로 출격한 적이 없다고 한다(애초에 출격 자체를 안 했다고). 영화에서는 당시 태인의 선배가 납치된 항공기를 조종하고 있었고, 결국 후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정을 넣음으로써, 비극의 강도를 높이려고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여진구가 연기한 납치범 용대는 이른바 월북자 가족에 대한 당국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인한 분노가 범행의 계기가 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납치범의 동기는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가 범행 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




 

희생.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가치는 역시 희생이다. 희생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행위를 말한다. 요새는 가장 인기 없는 덕목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긴 하지만(뭐 어디 덕목들 가운데 요새 인기가 있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싶긴 하지만) 모든 것을 주고받기 식으로만 정확히 계산해서는 우리 사회라는 게 애초에 존재가 불가능하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희생은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를 위한 희행 역시 주고받음의 차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동료 시민들을 위한 군인들의 희생 역시 쉬운 계산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15:13).


오늘날 이 희생이라는 가치는 양면에서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쪽은 도킨스 식의 이기적 유전자론 같은 유사과학의 공격으로, 애초에 이타심이나 희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그저 다 장기적으로는 나와 나의 유전자를 위한 행동일 뿐이라는 식의 냉소주의다. 애써 신을 부정하려는 그 목적이 결국에는 인간을 단지 유전자들의 조합일 뿐이라는 식의 얄팍한 결론을 낳은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유전자자 자기’, 혹은 자기종족따위의 인식이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 퍽 천진난만해 보인다.


또 다른 공격은 애초에 희생 따위기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이 세상에 만들고자 하는 공상주의자들이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담당할 중앙의 행정기구의 비대화,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과 집행 과정에서의 비효율성 같은 것들이다. 모든 것을 행정과 예산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런 식의 사고는, 결국 행정비대화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고 말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의 심성까지도 함께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


답은 희생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에 맞는 명예와 존경, 사회적인 인식의 재고 같은 것들이 아닐까.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그런 모습은 동기를 너무 파헤치기 전에 우선 칭찬하고 찬사를 보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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