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 가운데 하나가
세상 냄새 나는 지혜로 가득하여
거룩한 어린이다움은 물론
천진난만한 인간미마저 사라져 버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의 얼굴입니다.
어린이다움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 조지 맥도널드, 『전하지 않은 설교』 중에서
유명한 신학자 몰트만의 마지막 책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먼저 들어왔던 책. 지난 201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노령의 신학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물론 그가 이전에 부활이라든지, 영생 같은 주제들에 대해 사유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평생을 함께 해 온 배우자의 죽음이란 조금은 다르게 와 닿지 않았을까.
때문에 책 초반의 논지는 죽음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 죽은 이들이 두 번째 존재해 있다면 남은 이들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본인 자신을 향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은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이 유지되는 기간을 늘리는 것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동성으로 가득한 강렬한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다. 그분은 정말로 죽음을 멸하셨다!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 또한 그분이 시작한 부활의 행렬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저자는 이 부활의 시작 시점에 관한 독특한 의견을 제시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는 것. 정확한 문장은 "우리는 우리의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이다. 이는 통상 죽음 이후 일정한 기간이 흐른 후 혼 세상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부활한다는 기독교 내 인식과 차이가 있다. 몰트만은 어떤 유예기간이 없이 죽음과 동시에 부활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물론 이런 주장이 몰트만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인식할 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저자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누가복음 20장 38절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영원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죽지 않았다.
논문이라기보다는 신학 에세이적 성격이 강한 글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며 다양한 성경구절로부터 지지를 구한다. 물론 이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의 부활과 영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또한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인정한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런 부활신앙은 단지 우리의 미래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고, 또 온 우주적 완성을 기다리는 일이긴 하지만, 또한 미래로부터 오늘 우리에게로 침투해 들어오는 무엇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미 우리의 오늘 또한 주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끝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이사야와 바울을 아름답게 조화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빛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완전히 빛 속에 서 있을 때까지 창조 세계에서 어둠을 마침내 몰아내는 빛의 도래를 희망 속에서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 어둠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빛을 증언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가 보이는 윤리적 실패는 이런 영생에 대한 믿음 없음의 결과는 아닐까.
카이사르의 삶을 재구성한 역사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여섯 번째 시리즈인 ‘시월의 말’ 두 번째 이야기다. 이번 편에서 마침내 카이사르의 암살이 벌어진다. 폼페이우스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독재관이 되어 로마의 일인자로 활동하던 카이사르는 점차 피곤함을 표현하는 장면을 자주 보인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최고 권력자의 삶이란 의외로 피로를 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는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을 꽤 공을 들여 묘사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그야말로 깜짝 등장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콜린 매컬로는 그가 일찌감치 카이사르 옆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물론 아직은 그저 수습군관 정도였지만), 카이사르가 그를 총애했다고 설명한다. 확실히 좀 더 주목을 받게 하려는 장치.
여기에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에 관한 악평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진 엄청난 빚을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인 카이사르 암살을 시도하러 관저의 담을 넘으려 하기도 했고(그가 죽으면 자신이 상속자가 될 거라고 착각),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등의 암살 일당들과도 사전에 분명한 교감이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냥 말 그대로 멍청하고 감각도 없는 인물로 그려질 뿐.
암살과 관련해서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표현은 훗날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고대에 관련 자료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대신 작가는 그의 죽음을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식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꽤나 리얼하게 신체의 이곳저곳(특히 얼굴, 눈 부위)이 흉기에 찔려 손상되는 장면도 보이니 조심.
그리고 역시 3.15 사건(카이사르 암살)을 이야기하자면 암살의 주모자들의 동기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의 대략적인 합의는, 그들 사이에 무슨 대단한 공화정에 관한 이상 추구와 합의가 있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욕망이 얼기설기 엮여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식이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대부분은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의 의사에 의해 집정관을 비롯한 고위 정무관들이 정해지는 상황을 불쾌해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난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명예로운 관직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을 우려해 일을 저질렀다는 식이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상속받은 돈으로 막대한 빚을 해결하려는 꿍꿍이가 있었다.
역시나 가장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인데, 흔히 몽상가 정도로 그래도 나름 공화정에 대한 대의에 집중했던 몇 안 되는 인물로 묘사되던 그를, 작가는 탐욕스럽고 줏대 없는 인물로 평가절하해 버린다. 사실 이 빌드업을 위해 몇 권을 할애해 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읽다 보면 퍽 한숨이 나오는 인물. 앞서 반쯤 미치광이처럼 묘사된 카토의 딸과 결혼까지 하면서 이번에는 자기 부인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뭐 하나 제대로 준비한 것 없이, 카이사르를 죽이면 단번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던 음모자들이 초래한 위기는 곧 또 다른 충돌과 혼란으로 로마를 몰아넣는다. 물론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부당한 권력구조를 유지시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타당하지만, 카이사르의 정치가 제1계급의 최고위층 이외의 다른 계층에게는 퍽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소위 “해방자들”의 살인은 역사상 수없이 등장했던 기득권층의 반동적 만행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넘어서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