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찾다 - 기독교 세계관 여행
김재영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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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의 전반부는 일반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다룬 책들과 마찬가지로 세계관이 무엇인지, 그리고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주요 주제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이 세계관을 노동과 결혼, 인간의 마음과 정치, 선교라는 주제로 적용시켜나간다.

 

 

2. 감상평 。。。。。。。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들을 나름 많이 읽었다. 이 책도 처음에는 그런 책들 중 하나로 여기고 읽기 시작했다. 책의 초반부는 다른 책들과 비슷한 과정을 밟아 나가서 딱히 특별한 감흥이 없었는데,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이 책만의 매력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세계관에 관한 책들은 다양한 세계관들을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발전에 따라 소개하면서 기독교 세계관만이 갖는 전포괄적인 관점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기술되는데,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계관이 실제 삶에 어떤 모습으로 적용점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의 진가는 이 부분이다.

 

     다만 책 내용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이 분야에 관한 책을 자주 읽어서인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느낌도 약간 든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논의에 익숙한 독자라면 굳이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과감하게 관심 있는 부분들만을 간추려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 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나, 앞서 요약한 내용들에 등장하는 적용점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책일 듯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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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지음, 김진섭 옮김 / 이레서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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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비록 그 실제적인 함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 설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모든 학자와 목사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지(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은 구약 성경 본문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왜 구약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지(1-2장), 역사적으로 이를 위해 사용되었던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각각이 가진 장단점은 무엇인지(3-4장)를 되돌아 본 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어떻게 구약의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를 선포했는지(5장)를 거쳐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한 실제적인 지침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6-8장).

 

 

 

2. 감상평 。。。。。。。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오르던 이삭이 등에 지고 있었던 나뭇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오늘날에도 종종 들을 수 있는 이런 모형론에 대해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나뭇단과 십자가 사이에는 재료상의 동질성만 있을 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보아야 할 성경 내적(內的), 또 해석학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해석을 용납하다보면 결국 설교자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성경으로부터 뽑아 낼 수 있다는(주로 이단들에서 하는 식의) 결론밖에 남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바른 해석학적 원리를 먼저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주요 공헌 중 하나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전한 해석학적/ (동시에) 실제적 원리들을 제시해주고, 그 실제 적용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를 시작하는 사역자들이나, 이미 오랫동안 설교를 해왔던 목회자들 모두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두 번째 공헌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점을 바르게 강조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 성경 내적인 예들과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예들을 차분하게 따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가 글을 쓰고 있는 서구 교회와는 달리, 아직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중심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기에 좀 과도한 강조처럼 느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오히려 앞서 예시한 것처럼 과도하게 그리스도를 추출해내려는 시도가 자주 발견되곤 하는 상황이니까. 물론 구약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전제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근거를 찾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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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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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방언을 은혜와 능력을 받는 통로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비밀의 열쇠로 여기고, 그래서 하늘의 언어 운운하는 김우현 씨가 쓴 책 『하늘의 언어』를 겨냥하고 쓴 책이다. 시종일관 체험 중심의 논리를 세워갔던 앞서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저자는 방언을 교회가 설립되는 특별한 시기에, 표적을 중요시했던 유대계 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독특하고 유일한 은사였다고 본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란 오직 외국어 방언뿐이었고, 오늘날 일각에서 말하는 ‘영적 방언’, 혹은 ‘하늘의 언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방언과 관련해 가장 많은 직접적인 교훈/언급이 등장하는 고린도전서를 연구해 볼 때, 이미 교회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이 존재했는데도 바울이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바로 방언에 관한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 안의 방언은 그런 세속적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은 점차 그쳐가고 있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와 시기적으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서에 은사의 종류로 방언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방언의 역할은 성경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였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아울러 오늘날 방언이라고 행하여지는 것들은 사실상 일관되게 통역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학적으로 무의미한 음성들의 연속일 뿐이며, 나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방법 상의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2. 감상평 。。。。。。。                  

 

     앞서 『하늘의 언어』라는 영지주의적 교훈을 담고 있는 책에 관한 서명을 쓰면서 내가 말했던 ‘재미도 없고, 공격적인 말투로 인해 욕먹기 딱 좋은’ 작업을 해 낸 책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민감한 쟁점에 대해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에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의 내용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정확한 이유와 분명한 논리가 필수적이다. 비록 저자가 아직 정규 신학과정을 수료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신대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떤지는 모르겠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해석과 성경문맥에 따른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와 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아니더라, 누구에게 들은 얘긴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따위의 한심한 비난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해서는 온당하지 못한 평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논리에 끼워 맞춘 불쌍한 책” 운운하는 밑도 끝도 없는 100자평을 달아 놓은 사람도 있던데, 누가 더 불쌍한 건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다. 지성의 사용이 줄어들면 자연히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경험이라는 건 태생적으로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주관성이 강조된다. 쉽게 말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랬고,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요 16:2-3)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면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냥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의견을 단순히 은사중지주의자의 생각으로 치부하고 나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특히 분명한 이유와 명확한 논리도 없이 따지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건 그냥 자신이 얼마나 성경과 예수님,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증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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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언어 - 하늘문을 여는 열쇠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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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방언을 하늘의 언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로 여기는 저자가 자신의 삶을 간증으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을 하는 곳에서 놀라운 일들(능력?)이 나타나고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저자는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으며, 또 방언을 해야 한다는 방언 일반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 - 지적인 교만 내지는 무지 - 으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2. 감상평 。。。。。。。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다. 우선은 책의 내용이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거기 담겨 있는 저자의 관점이 거의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럴 경우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평가를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글은 재미도 없고 필경 공격적인 문장들로 마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어쩌겠나.. 

 

 

     책에 담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19세기 이래로 부흥했던 기독교 영지주의의 재판(再版)이라고 하겠다. 초대교회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가, 박해의 시기가 지나며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건강한 교리를 재확인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던 이 사조(思潮)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다시 크게 부흥했다. 능력과 성결, 더 높은 삶, 영적인 비밀과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다. 물론 저자는 이걸 ‘사탄이 교회에 침투해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의와 지식으로 대치해버’린 것(235)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방언을 ‘인간의 이성적인 무엇보다 더 고차원의 영적 지식의 통로’(96)로 여기는 저자의 생각은 정확히 이런 영지주의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기도를 하며 성령의 목소리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냈다는 (성경 어디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그는(119), 방언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올라가’기를 구한다(120). 방언을 통해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비밀’, ‘예수 이름의 비밀’, ‘교회의 비밀’, ‘깊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와 같은 비밀구절들의 의미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구절(210)은 영지주의적 공동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부분이다.

 

 

     특정한 비전(秘傳)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결정체다. 처음부터 기독교의 주변부에서 싹이 텄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많은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게 해 왔다. 일상적인 것들보다 더 우월한 무엇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사모는 영적인 계층을 만들었고, 이 계층을 지켜내기 위한 비밀들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성경은 비밀들과 영적인 계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은 이미 다 풀렸는데, 그분의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에 또 어떤 비밀을 덧붙이려 하는 저자는 성경의 저자들도 감히 넘보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대신 그 자리를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들이 차지하고 있다.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게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87)이라는 설명이나 모든 영적 은사는 방언을 기반으로 나타나기에 방언은 은사의 기본(108)이라는 주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방언을 했기 때문에 영적 충만함을 누리며 강한 능력을 경험했다(110)는 부분, 방언에 대한 ‘지식 없음’이 방언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했다(175)는 구절 등은 저자의 주장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유와 경험에 기반해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니엘이 방언을 할 줄 몰라 그의 기도가 사탄의 세력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방해했다는 식의 지적을 담고 있는 부분(88-89)은 기가 차다.

 

 

     모든 것을 방언이라는 중심을 떠받드는 시종으로 만드는 시도는 방언에 대한 경계를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상상에 올려놓는 자의적 해석(216)을 낳기까지 하고 있다. 저자가 그토록 자주 참조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를 위한 내용이지만, 방언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성경구절을 정확히 반대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고린도 교회는 공동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깨어진 상태에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개인만을 위하고 자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방언과 예언의 대조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건 방언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원문에는 끊임없이 ‘호 데’, 즉 ‘그러나(but)’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그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18-19절)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A도 좋지만 B가 더 나아’라는 말을 듣고서 A도 좋다고 했다는 부분만 가져다 쓰는 꼴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저자가 영지주의적 이단에 속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법들이나 단어들, 사유의 논리는 영지주의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의 용어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동일한 출판사에서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영성에 속지말라』라는 책을 펴낸지 2년 만에 이런 책을 출판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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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영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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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미국제 영성’을 영지주의적 신앙과 동일시한다. 바른 교리보다 특별한 감정적 고양의 상태를 더욱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노력으로 절대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으며 종종 이를 위해 주술적 형태의 신앙행위를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를 가르치면서도 성/속, 영/육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이미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오늘날 이 영지주의적 신앙이 어떻게 교회 안에 부활해 사람들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인간의 생각에 기초한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방식과 기준에 따른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2. 감상평 。。。。。。。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분에 관해, 이 세상에 관해 말씀해주신 계시의 내용을 근거로 성립된 신앙체계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다. 기독교 신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것 안에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실제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사유해왔음에도 신학 전 분야에 걸쳐서 여전히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인죄론에 관해서는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관해, 구원론에 있어서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교리들이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애매함과 불가해한 부분을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한 ‘신비’로 인정하고 그들의 무지함을 겸손하게 인정해왔다. 영지주의는 바로 이런 신비를 인간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이해 가능한 수준의 설명을 제시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이런 시도는 어제 오늘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다를 어항에 담으려는 시도는 잘 해야 실패로, 최악에는 어항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는데도, 모든 것을 인간 지성으로 담아내려는 이러한 시도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문제다.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기독교에 대한 관점들(특별히 영지주의적 접근, 즉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치 않고, 인간 중심의 종교로 재배열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쉽게 오염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제 영성’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인간본위의 신앙행태는 우리에게 너무나 편하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때문에 단시 신학적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 저자가 경고하는 대로 성경의 계시가 말해주고 있는 방식과 한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파괴적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다만 영지주의 자체가 워낙에 잡다한 사상들을 통칭하는 이름이기에 ‘아닌 것은 모두 영지주의’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느낌이 드는 부분과, 수사적인 표현들이 종종 등장해 내용이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은 부분이 보이는 것은 좀 아쉽다. 전자야 영지주의 자체가 가진 문제이긴 하지만, 후자 쪽은 전작과는 달리 저자가 좀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걸까 싶다. 물론 주제와 동떨어진 내용을 덧붙인 것과는 다른 부연이긴 하지만 말이다.

 

     책 속의 어느 구절처럼 ‘진리보다 솔직함을, 실재보다 감정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한, 기독교는 더 이상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바른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면서, 이 주제에 관해서 가장 실제적이고 분명한 교훈을 담고 있는 좋은 책이다. 읽고, 위기에서 탈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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