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십자가 -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짐 월리스 지음, 강봉재 옮김 / 아바서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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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요약 。。。。。。。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현실 순응적 기독교이다.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은 타락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 속에 나타는 다양한 문제들 이 책에서는 주로 빈부의 격차와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폭력과 억압 등을 지적한다-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존재론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만들었으나, 교회는 그 타락한 구조와 타협하고 연합한다면 그들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개인적 차원으로 가둬둠으로써 제자도 없는 은혜라는 이단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95) 반면 진보적임을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계시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같은 기독교의 독특한 기초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그들의 메시지에서 영적인 기초를 상실시켜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99-100)

 

     저자는 철저하게 계시에 기초하면서도(진보적 한계 극복),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인으로 선포하는(보수적 한계 극복) 방법을 통해 이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단지 이론이나 운동으로서만 해결할 수 없으며, 영적인 차원에서의 바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이것을 위해서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해법은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새롭고 강한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 얻는 내적인 힘으로(187), 파괴적인 원리를 숭배하는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교회는 적극적으로 분쟁의 현장 가운데로 들어가 화해와 반성, 치유의 사역을 해내야 한다.(189)

 

 

2. 감상평 。。。。。。。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책이다. 그 옛날 박해를 받았을지언정 조롱의 대상은 되지 않았던 기독교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적대감은 분명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국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교회라는 본질의 문제가 놓여 있다.

 

     교회의 본질이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앎과 그 실천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보수적인 사란들은 바른 앎의 내용에 집중했고 진보적인 이들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한쪽에만 천착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 사이 양편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데 애써왔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은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론적 기초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된 메시지에 철저하게 기초해 교회다움을 정의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는 월리스를 좌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가 정의하고 있는 기독교나 복음은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정통적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딱지 붙이기 같은, 세속 정치인들이 권력획득을 위해 심각하게 망가뜨려놓은 틀로 교회를 재단하려는 태도야 말로 정통적이거나 복음적이지 못하다.)

 

 

     그가 발견한 복음은 사회 변혁적 복음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게 제자도라는 말의 의미다. 물론 제대로 된 앎 없이, 그저 행동만 따라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에 부합하는 삶 없이, 복음의 내용을 쉼 없이 되뇌기만 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지경일 것이다. 전체 그리스도인의 10%만 제자도에 충실하게 살았어도, 오늘날처럼 교회가 조롱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쩌면 지금은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미국의 기독교를 바라보며 40년 전에 쏟아 냈던 이 선지자적 외침이 여전히 우리나라 교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메시지라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슬픈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닳고 닳은 경구가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건 분명 진실의 한 조각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본질로부터의 일탈이지 본질 자체가 아니라는 건 이 책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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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면 행복해질까
이철환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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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연탄길이라는 이름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써서 크게 명성을 얻은 작가가, 자신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는 에세이집.

 

     어린 시절의 가정불화는 작가 자신에게 유형, 무형의 영향을 주었고, 성장해서는 멀쩡하게 일하던 직장을 내려놓고 작가가 되기 위해 오랜 불안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지나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이명 증상. 1365, 쇠를 긁는 끔찍한 소리를 들리고, 증상이 심할 때는 어지러움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지경이지만, 작가는 책의 성공으로 번 돈으로 재단을 세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여기엔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려는 그의 신앙이 큰 영향을 끼쳤다)

 

 

2. 감상평 。。。。。。。

 

     미안하지만 400만 권이 넘게 팔렸다는 연탄길이라는 책을 본 적도, 심지어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그 책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겼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대략 그 책의 느낌이 어떨지 그려지기는 한다. 조금은 슬프고, 하지만 따뜻한 이야기? 딱 이 책의 느낌이 그렇다.

 

     천 회 이상 강연을 다니고,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책도 벌써 몇 권이나 써 낸 작가답게 말을 참 잘한다. 일상의 작은 일들로부터 깊은 생각을 이끌어 내고,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잘 녹여내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책의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고통을 자기 안에 삭혀냈던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다크한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뭐 그런 부분이야 나한테서도 잔뜩 묻어나오는 면이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그보다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문체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익숙하고, 좋아하던 종류의 글들과 좀 다르기 때문에 드는 이질감 비슷한.

 

 

     책 제목인 예수 믿으면 행복해질까라는 물음에 대해 저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여전히 이명으로 고생하고 있고, 덕분에 어딜 가든 지팡이를 짚어야 하지만 그게 창피해서 등산스틱을 들고 다니려고 늘 등산화를 신고 다니는 그지만, 적지 않았을 인세 수입을 불우이웃을 돕는데 다 써버리고 본인은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다니고 있지만, 그런 그가 그렇다고 말할 땐, 확실히 어떤 무게감이 느껴진다.

 

     취향을 좀 탈 수 있는 책이지만, 진실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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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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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인터뷰라는 형식을 사용해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 운동을 비판하고,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시도를 담은 책이다. 책의 전반은 유신론적 진화론의 가능성, 나아가 타당성을 주장하는 데 할애되어 있으며, 후반은 주로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힘을 주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관한 문학적 해석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유신론적 진화론이 성경의 기록과 모순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힌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주의 모습이 바뀌어 왔고 보다 복잡한 종이 출현했다는 것(진화)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41)이라면서 진화는 자연 현상 그 자체(38)라고 본다. 그러나 진화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무신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닌데, 신이 진화라는 도구를 사용해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

 

     여기에서 저자는 진화 자체와 진화이론, 그리고 진화주의 사이의 구분을 시도한다. 이 세 가지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진화 자체)과 그것에 대한 과학적 설명(진화이론),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세계 이해(진화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 진화와 진화이론을 받아들이더라도 무신론적 세계관인 진화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신앙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진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창조과학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지적설계 운동은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 즉 진화이론을 부정하는데(179), 바로 이 점이 저자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다. (쉽게 말해 과학으로 진화는 이미 증명되었는데, 그걸 부정하면 어쩌자는 것이냐는 식.)

 

 

2. 감상평 。。。。。。。

 

     아마도 진화, 진화이론, 진화주의의 구분은 이 책의 논리의 핵심에 있는 도식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저자는 진화이론과 진화주의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함으로써, 진화라는 논리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무신론적 입장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성경의 창조기사에 대해 문자주의적 해석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책은 저자의 입장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다. 책에서 소개되는 반대 이론들의 약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저자의 주장은 그것들을 완전히 능가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이 책 안에서 오직 저자의 입을 통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었던 반대 입장에 서서 저자의 주장을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저자는 과학을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지지하지 않는 중립적 입장(68)에 서 있는 도구로 본다. 과학을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로 이해한다면 원칙적으로 이 주장은 옳다. 망치(도구)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못을 잘 박을 수 있느냐(제대로 기능하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실제로 과학은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현대의 복잡한 과학은 과학자들 상호간의 교차검증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자기 연구 분야가 아니면 어지간해서 다른 사람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만큼의 식견을 갖추기 어려울 정도로 연구는 전문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과학계 전반에 걸쳐 있는 권위주의의 문제와 결합할 때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발생한다. 소위 그들의 휴리스틱을 받아들이지 않는 연구자들이나 그들의 주장은 더 이상 공인될 수 없는지경에 이른 것이다.(저자도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오늘날 어떤 이론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을 갖춘 학술지에 실리거나 인용되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에 실리기 위해서는 이미 그 편집자들, 혹은 그 학술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과학자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진화에 반대되는 연구를 담은 논문이 작성되더라도 소위 자연주의적 세계관 위에 서 있는 주류 학술지에서는 절대로 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반대 입장을 담은 주장이 그들만의 리그 밖에서 자주 인용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또, 저자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진화라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 분명하고, 진화이론은 그저 현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산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실제 일어났던 일들과는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특정한 세계관을 먼저 갖고 난 뒤 그에 따라서 연구가 진행된다. 과학 발전에 관한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설명과는 달리, 다윈은 갈라파고스의 특이한 동물들을 보고 유물론적 진화론으로 회심한 것이 아니라, 유물론적 전제를 가지고서 그에 맞는 증거들을 수집해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관의 이런 () 이론적인 성격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주류 과학계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상태고, 그들은 모든 증거를 자신들의 세계관에 맞게 해석하고 발견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선 이론적 전제들이 개입되지만, 그것들은 대개 비판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전제를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말하는 소위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자연주의가 아니라는 말은 이런 어려움을 반영하는 불가항력적인 변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을 잠정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여전히 대통일이론은 발견되지 않았고, 인류는 우주의 10%도 다 연구하지 못하고 있다.(그게 10%일지 1%일지는 알 수 없지만)

 

 

     저자의 성경해석, 특히 창세기의 창조기사 해석 부분도 비판할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 기사를 문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문자적으로 현대의 과학적 발견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태도가 자칫 과학주의적 태도, 혹은 짐짓 엄격한 증거주의로 변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과학적 서술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과학주의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적 희생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명제는 과학적인 연구결과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분이 보여주셨다는 많은 기적들은 다시 한 번 문학적 장치들로 보아야 할까?

 

     저자에게서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를 읽어내는 건 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개인적으로 창조과학계가 가진 가장 큰 문제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본다. (아마도 이런 태도 덕분에 성경의 기사를 과학적 도구로 입증해 내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게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저자에게서도 거의 동일한 태도가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저자는 창조과학에 관해, 한편으로는 과학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153)고 비판하지만,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자는 한편으로 성경의 문자적인 서술을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에 의존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는 식으로 비판을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내용은 저자가 틀렸음을 증명해내려는 시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저자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는지 아닌지 판단할 위치에 서 있지 않으니까. 또 저자의 신앙이나 인격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저 위에 계신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쪽도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나름 지적하려는 것이다.(그냥 궤변을 길게 늘어놓은 것일지도..)

 

     어쩌면 그 나라에 이를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을 따르던 사람들과 문자주의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 같은 자리에서 만나 멋쩍게 웃으며 악수를 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양쪽 다 믿음을 포기하라는 세상의 도전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할 테니까.

 

     저자와 출판사의 도전이 향후 좋은 토론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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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 2015-10-3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열심히 쓰다니요ㅋ
 
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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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 규정이 단순히 하루를 쉬며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은 끊임없는 노동과 그 근본 동기로서의 탐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 결과로서의 불안이라는 파괴적인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자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책의 결론은 당연히 안식일의 회복이다. 물론 이건 모 유사기독교단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식의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안식의 참된 의미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분야에 확산시킴으로써, 앞서 언급했던 무한경쟁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저항해 나가야 한다는 것.

 

 

 

2. 감상평 。。。。。。。

     언젠가부터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죄가 되어버렸다. 학교를 가지 않는 청소년은 문제아가 되고,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젊은이는 잉여로 전락했다. 회사에서 일찍 퇴직하게 된 중년들은 조롱과 자조의 대상이 되었고, 은퇴한 노인들은 부담으로 여겨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경제를 측정하는 통계수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입에 국민소득 몇 만 달러,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하는 수치들이 자주 언급되더니, 그 수치들이 가리키는 실제 사람들의 삶보다 이런 숫자들이 더 중요해져버린 것 같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3, 4만 달러가 되어도, 물가가 함께 올라가고, 불공평한 분배와 특권층에 대한 특혜가 일상화되면 대다수의 삶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간단한 생각은 이단으로 몰린지 오래다.

     여기엔 낙수효과라는 거짓 교리와 일중독에 대한 찬양이 더해지면 완벽한 하나의 종교가 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에서 이는 분명한 우상숭배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물신숭배다

 

 

     잘 알려진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이 책에서, 이런 현대의 우상숭배를 깨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안식일 준수라는 오래된 전통을 꺼내든다. 더 많은 일을 통해서만이 자아를 확인받을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하나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인 안식일에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폭력과 착취가 들어설 자리가 이 날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안식일에 담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의미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쉼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존재인 것 같다. 책은 꽤나 흥미로운 내용으로, 그리 많지 않은 지면에 아주 빽빽하게 저자의 통찰이 담겨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분석해 내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정황이 성경시대의 그것보다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저자는 명백하게 두 개의 시공간(고대와 현대)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서술을 진행하고 있는데, 자칫 시대착오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현대주의적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자주 이런 오류에 빠지곤 한다) 이 점은 성경 시대의 삶의 정황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완될 수 있는데, 물론 저자가 저명한 구약학자라 이 부분에서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확실히 아쉬운 감도 있다.

 

     또, 번역 부분에는 아쉬움이 좀 생긴다. 사실 이 가벼운(내용이 아니라 분량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불편함을 느꼈는데, 문제는 문장이었다. 원래의 영어문장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번역된 문장 역시 소위 번역투인 경우가 너무 많아 대충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물론 번역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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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빙 다빈치 - 세속주의 문화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
낸시 피어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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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전작인 완전한 진리에서 사실과 가치를 서로 다른 인식의 층에 각각 가두어 놓으려 했던 현대의 세계관들을 날카롭게 분석해 냈던 저자는, 이번 저작에서는 이 분리가 단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위 세속주의는 이미 강단을 점령했고,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날마다 확장시키고 있다.(1~3)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미술과 음악 등 예술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이층적 세계관의 모습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덕분에 서양 예술사의 각 시대를 풍미했던 주의들이 왜 등장했으며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예술사책의 기능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역시 각각의 사조들이 가진 한계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세계관을 분석해내는 장면이다.(4~9)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내지 못하는 이층적 세계관은 인식론적 분열증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서양 예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끊임없이 앞서의 것들을 부정하며(대개 이들은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곤 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문화와 예술을 읽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세속주의에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소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재를 제대로 반영하는 세계관에 근거한 예술 활동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도 이런 안목은 필수적이다.

 

 

 

2. 감상평 。。。。。。。

 

     낸시 피어시 여사가 다시 한 번 일을 냈다. 이 책은 미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분석함으로써 보통의 분석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까지 들어간다. 수많은 컬러 도판들(이 책의 가격이 겨우 3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은 본문의 적절한 예시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미술관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이토록 튼튼하게 엮어낸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소위 난해한현대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가장 위층부터 차례로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2층과 3층 사이에서 아주 극단적인 분위기의 전환이 있다는 게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 눈에 느껴졌다. 2층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의 추상주의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키를 훨씬 뛰어 넘는 거대한 화폭에 알 수 없는 무늬와 색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옆에 적혀 있는 안내문을 봐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왜 삼성에서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85억이나 주고 구입했다던 만화 같은 그림(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이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는지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은 그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두려움은 날려버릴 수 있게 된다. 쫄 것 없었다. 그들은 그림이나 선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고, 말과 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그들의 주장을 읽어낼 수 있으면,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데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맞장구를 칠 필요가 없는 거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미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딱지를 붙이고 빈정거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더 나은 것을, 더 실재를 잘 반영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가치를 더 잘 빛낼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부분에 주목해 보자면,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참 부족한 상황이고.

 

     이 책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듯, 미술과 음악 속 메시지를 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전세는 많이 기운 상황이지만, 아직 낙동강 전선이 유지되고 있다면,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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