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그냥 너 하나면 돼 -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는 젠틀 위스퍼 그림 묵상 에세이
젠틀 위스퍼(최세미)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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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온라인상에 그림과 글로 자신의 묵상을 나누던 작가가 지난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림 신앙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전체적으로 글과 그림으로 채워진 페이지가 반반 정도 되는 것 같다.

     각각의 장마다 두세 장으로 구성된 짧은 에피소드가 모여 있는 형태인데다,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면서 은혜를 새롭게 되새기는 식의 비슷한 내용들인지라, 총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 구분되는 느낌은 아니다.

 

 

2. 감상평 。。。。。。。

     일단 글자가 많지 않아 금세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림이 많은데, 복잡하게 그린 게 아니라 펜 그림 정도의 단순한 선들로 되어 있어서 보기에 편하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예수님의 얼굴은 적당히 볼이 빨갛고 뭉툭한 코가 솟아 있는 귀여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책의 안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도 비슷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편하게 볼만한 수준과 내용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손에 든 건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여기에 실려 있는 작가의 고백이 단순히 책을 내기 위해 만들어 낸 내용이 아니라, 깊은 묵상과 기도, 그리고 깨달음이 배어 있는 문장들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수 만 페이지의 책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감각이다) 잘 보이기 위한 어려운 용어와 문장들을 억지로 꾸며 쓰는 대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떠오른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예쁜 그림과 함께 배치한 책이었다. 그 덕분에, 처음에는 금방 읽어내고 말 것 같았던 이 적은 내용의 책을 보는 동안, 포스트잇을 몇 개씩이나 붙여가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솔직한 고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가의 성향이 파악되어 버린다. 자신만만하게 나서기 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런 성격. 당연히 이 책도 그런 섬세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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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 강령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손기화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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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목회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가 주축이 되어 시작했던 반혁명당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는지를 정리 해 쓴 책이다.

     반혁명당이라는 이름 가운데 있는 혁명18세기 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퍼가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그는 입헌군주국인 네덜란드 왕국의 왕인 빌럼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각론에 있어서 카이퍼는 공정한 선거제도, 지방분권 같은 의제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혁명의 근본에 있었던 무질서와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 나아가 무신론적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이 결국 국가적 독재, 혹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우려했고(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카이퍼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비롯한 각 영역에 자체적인 권위를 부여하셨기에, 국가는 가정이나 학교, 사회의 각종 기구에 전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영역주권론이다. 그는 철저하게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분권적, 연합적 국가관을 표방한다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세금, 사법 제도, 예산안과 교육 등 국가 운영의 각 영역에 있어서 반혁명당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2. 감상평 。。。。。。。

     10년도 훨씬 전에 읽어봤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원전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손에 들었다. (사실 이 책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이름이 선택의 이유였다) 그가 보여주었던 개혁주의 정치학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역시 편집본이나 발췌보다는 원적을 직접 읽는 맛이 있겠다 싶은 기대도 있었고.

     미주나 참고문헌 같은 페이지도 거의 없는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도 만만치 않았지만, 번역이 참 답답한 수준. 물론 대체적으로는 읽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의 선 이해를 갖고 때로 적당히 넘겨짚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편집자 서문의 한 문장(11)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시대와 동등한 증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도전을 제시한다.” 이게 우리나라 말이긴 한가? 본문의 각주 중 하나는 뭔가 중요한 조사가 빠져 있다.(“카이퍼는 기억으로부터 인용하는 있다.” 401)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세속정치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 때까지 기독교인들은 현실정치에 휩쓸려 어느 한 정파를 지지하거나, 영적 조언자로서의 영향력을 주는 정도였지만, 카이퍼는 아예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다. 물론 그의 이론에는 현실을 수용하는 면적 적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체계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만 그의 정치이론은 기독교인이 70%를 상회했던 네덜란드의 인적 구성을 배경으로 하고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일요일에 영화상영이나 여행, , 카지노 같은 업장들의 운영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전통이 없는 세속국가나 지역에서는 쉽게 관철시키기 어려운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카이퍼는 자신의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국민들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자유롭게 하라. 일단 정부가 잡초를 뽑기 시작하면 밀을 가라지로 오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136) 카이퍼가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정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권한이 전능한 데까지 이르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지방 분권의 필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이 즈음, 카이퍼의 이론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컨대 선거제도에 있어서 카이퍼는 다수가 소수를 두 번 이상 이기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반대한다. A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1만 명이고, B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9천 명이라고 해 보자. 선거구는 3,500명의 A정당 지지지와 3,0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고, 선거구에는 4,0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2,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선거구엔 2,5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3,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다면, 선거 결과는 2:1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 정당의 지지자 비율인 10:9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실제 의회의 의사결정에는 사실상 2:0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카이퍼는 이런 상황이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분열을 증폭시킨다고 본다. 시민들의 직접참여로 이루어지는 선거제도 자체가 반드시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혁명의 열정 안에서 때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서도 다수의 억압, 나아가 전체주의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런 태도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꽤나 사려 깊은 통찰이다.

 

     다양한 면에서 기독교적 정치세력이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참고해 볼 수 있는 작품. 이 정도의 보편적 정서를 갖추어야 집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한심한 자칭기독교 정당들의 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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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 인가 -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
유해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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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가장 먼저는 마르틴 루터, 장 칼뱅(책에서는 칼빈으로 표기), 불링어(책에서는 불링거로 표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교에 대해 했던 발언들, 저작 속 내용들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종합하면 당시 유럽의 기독교계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열심에 대해서는 일부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의 문제점을 강력한 어조로 비판했다.

 

     ​책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실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2부에서는 이슬람 국가 안에서 살았던 기독교인들(딤미)이 어떤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었는지 잠시 설명한 뒤, 할랄 제도가 갖는 신학적 함의로 넘어간다. 하지만 딤미에 관한 논의는 주로 오래 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할랄은 현대적 의의에 집중해 구성상 매끄러운 연결은 아니다.

 

     ​3부는 최근 들어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보고로 시작한다. 나아가 선교사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답게, 이슬람교 선교를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제시한다

 

  

2. 감상평 。。。。。。。

 

     ​어떤 책을 낼 때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목표가 세 가지 있다. 1) 새로운 정보 전달, 2) 저자의 주장 설득, 3) 작가의 감동/감상 전이가 그것. (오로지 개인의 만족을 위한 출판이라면 논외다.) 이 책은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목표로 했을까? 대략 1)에 집중을 하려 했던 것 같지만, 여기에 충실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자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 가며 2)의 영역을 더해버린다. 물론 이 둘이 좋은 구성 아래 적절히 조화가 된다면 나름 성과를 낼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쉽지는 않다

 

     ​이 책이 갖는 비교우위는 종교개혁자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관점을 잘 정리해 내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책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점을 좀 더 부각시키려면 책의 제목과 부제가 서로 바뀌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이 제목이 되고, ‘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부제로.

 

     ​책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가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을 이렇게 생각했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그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식인데, 이 논제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우선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믿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의 주장을 잘 정리해서 소개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더라도 책의 평점은 1점 이상 올라갔을 것. 그 뒤에 저자 자신의 주장을 부록처럼 덧붙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구성 면에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슬람교도들을 무작정 적대하기 보다는 친구로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가진 독특성을 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어느 정도 어울리지만, 전체적인 분량이라든지 하는 부분으로 보면 앞서 내 제안처럼 가는 게 좀 더 나았을 듯. 물론 더 중요한 문제는 책의 방향성을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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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기독교
제라드 윌슨 지음, 전병철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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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종교적 감각(선하게 사는 사람은 현세와 미래에 복을 받는다)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 지를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책은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들의 제목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관해 던지는 (반쯤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론 이 질문들은 무작위가 아니라 신중하게 선정된 것이다. 저자는 이 질문들을 도리어 기독교 교리가 갖는 독특함을 드러내는 기회로 바꿔낸다.

 

     ​책 전반에 걸쳐 선물(은혜)로 주어진 구원이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여기에는 구원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죄의 문제의 심각성, 그리스도의 사역의 독특하고 유일한 가치, 나아가 타인을 위한 희생(선교)에 대한 옹호 등이 포함된다.

 

 

2. 감상평 。。。。。。。

     기독교, 혹은 교회가 가질 수 있는 탁월함은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교리에서 나온다. (물론 이 말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이미 범한 잘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제법 여러 해 동안 교회는 그런 특유의 장점들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단순히 규모를 키우거나, 사회운동의 한 지류가 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써왔다. 얼마 전부터 다시 교리의 중요성에 눈을 뜬 움직임들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 책도 그런 종류의 책이다.

     저자는 보수적인 기독교단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이런 종류의 대답을 하는 데 익숙해 보인다. 책 속에 제시된 대답들은 정통적인 교리에 충실하면서, 현대적인 배경을 아울러 잘 담아내고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교리를 중심에 두고 전개해 나가고 있기에,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알고 싶거나, 제대로 정리하려고 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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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차원 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준호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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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초끈이론, 홀로그램 우주설과 같은 이론에 깊이 감동한 저자가, 이를 바탕으로 성경의 기록을 재해석한 책.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소위 천국, 새 하늘은 블랙홀의 2차원 표면적에 집적된 정보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그 정보가 일종의 홀로그램으로 표현된 것이다.

     원래 세상은 11차원으로 창조되었으며, 우리가 사는 3차원(+1, 시간의 차원)으로 둘러 싸여 있다.(43) 보통은 이 경계를 통과할 수 없지만, 중력은 고층우주와 저층우주를 넘나들 수 있다.(46)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영혼과 중력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영혼이 이 중력장과 결합할 때 소위 환상을 보게 된다는 식이다(59).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소위 나타나심의 신학을 주장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고층우주에서 저층우주로 내려오셨다는 주장을 기초로 세워지는 신학이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두 세계를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인류 또한 믿음을 통해 고층 세계를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2. 감상평 。。。。。。。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진지하게 읽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우선은 천체물리학(사실 초끈이론은 수학에 가깝다고 한다)을 기초로 신학을 재구성하는 시도 자체가 워낙에 특이하기도 했고,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신학이 이전의 전통적인 신학의 전제들을 거의 모조리 재해석하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는 정말로 이 주장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사실 이 초끈이론 신학, 혹은 홀로그램 우주 신학이 가진 맹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저자가 거의 확신하고 있는 전제가 되는 이론이 한 번도 증명된 적이 없는 이론이라는 점. 사실 물리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이 이론들에 대해 깊이 알기 어렵지만,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수학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대 이론에서 초끈이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저자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신학은 결정적으로 예전에 폐기된 가현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가 홀로그램이라면 예수께서 이 세계 안으로 오셨을 때 그 역시 홀로그램(진짜 세계의 모사)에 불과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또한 이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면, 죄를 보는 관점도 크게 달라진다. 실제로 저자는 홀로그램 우주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개신교적 유물론의 죄라고 부른다.(37) 죄는 이제 이해의 문제로 전환되어버리는데, 그럼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 것은 정당한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까?

     이 이론의 현실적 공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이 세계의 틈 안에 일곱 개의 차원이 감춰져 있는 이상, 맨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맨눈이 아닌 어떤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마찬가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이론은 검증되거나 증명된 적이 없다. 심지어 이 이론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를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자는 꿈을 통해 우리가 그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데, 모든 꿈이 중력파의 도움으로 고층우주로 가는 틀이라고 주장하는 건 과도한 해석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은 단순한 도그마의 반복이어서는 안 된다. 신학은 현실을 해석하는 틀이고, 따라서 우리는 성경만이 아니라 세속의 다양한 지식에도 눈을 떠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이론이나 발견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이전의 모든 틀을 재구성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저자처럼) 쉽게 붙이기 어려울 것 같다. 용어의 유사성이 내용의 유사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기독교는 단순히 교리모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기초로 세워지는 혁명적 운동이다. 과거 역사 속 신앙인들의 모든 삶을 무효로 돌려버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 한다면, 매우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아직 초끈이론이나 홀로그램 우주론은 그런 확실한 근거가 되기엔 너무 일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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