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칼빈주의 -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칼빈주의자의 모든 것
제프 A. 메더스 지음, 김태형 옮김 / 좋은씨앗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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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한 칼빈주의라는 독특한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일종의 반어법으로, 소위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집스러움, 그리고 종종 과도한 엄격한 모습을 가리키는 제목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단어는 진정한 칼빈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목표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책 전체의 구조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저자는 우선 소위 칼빈주의자들의 부적절한 처신들비타협적인 모습들, 분열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특정한 교리에 대한 과도한 헌신 같은(칼빈주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절치 않음을, 유쾌하지만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주의를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저자도 칼빈주의자다) 대신 저자는 칼빈주의가 본래 무엇인지를 풀어냄으로써, 앞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것은 도르트 총회에서 결의된 그 유명한 다섯 가지 칼빈주의자들의 선언인 튤립 교리다.

 

 

     솔직히 말하면, 튤립 교리에 담겨 있는 다섯 가지 선언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였다. 아르미니우스와 그 후예들에 의한 교리적 혼란으로부터 정통적인 교리를 지켜내기 위해 신중하게 구성된 단어와 문장들이었다. 당연히 이 교리를 굳게 붙잡으면, 애초에 그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결기 같은 것에 물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전투적으로 정리된 교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새롭게 조명해 준다. 저자의 이 흥미로운 작업을 따라가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고, 그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도르트 총회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거기에 담겨 있는 교리는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맞다.(비단 튤립 교리만이 아니라 모든 바른 교리는 결국 그런 목적지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전적인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으로 이어지는 이 다섯 가지 교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애초에 도르트의 선진들은 이 다섯 가지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려고 했었고, 여기에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상정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붙잡고, 원한이나 분노, 분열을 일으킨다면, 그건 정말로 은혜의 교리라고 할 수 있을까.(이런 차원에서 저자의 주장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 재주를 가진 저자다. 다만 지나치게 현대적인 (그리고 미국적인) 농담에 살짝 거리감이 생길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칼빈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개의 영문자는 튤립TULIP이 아니라 예수님Jesus이다.”, “튤립TULIP 교리는 본래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망원경이다.”처럼 눈에 쏙 들어오는 문구를 떠올릴 수 있는 재능까지 있다.

 

     저자는 교리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는 교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복음적 관점에서 교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의 시선을 환기시켜주고자 한다. 특별히 수없이 분열되어 있는 한국 장로교(이 중 상당수가 칼빈주의자들을 자처한다)에 필요한 교훈이 아닌가 싶다.(물론 애초에 그 사람들이 칼빈주의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더라면 이런 일들도 없었겠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책. 특히 이제 갓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 사역에 나온 젊은 사역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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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논쟁 - 지옥에 관한 네 가지 성경적.신학적 견해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8
데니 버크 외 지음, 스탠리 N. 건드리 외 엮음, 김귀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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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문화와 종교 가운데 지옥과 비슷한 개념이 존재한다그만큼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공의의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다는 증거일 것이다분명 이 세상은 사람들이 행한 선하고 악한 일들에 대한 응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이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면 그 다음에라도라는 생각.


     흔히 기독교의 지옥관도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되기도 한다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에 대한 충분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곳하지만 성경에는 생각만큼 이 주제에 관해 충분히 자세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매우 단편적이고때로 상징적인 언급만 있을 뿐이니까이 쪽에 대한 설명이라면 불교나 무속신앙 쪽이 훨씬 자세한데(영화 신과 함께를 보라), 그 때문인지 저쪽의 지옥관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이 과정이 꼭 의식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지옥에 관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이 책에 기고한 네 명의 저자들은 모두 지옥이 실재한다는 것과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믿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옥에 관해 서로 크게 다른 관점을 보인다.


     먼저 데니 버크는 지옥이 영속적인 의식적 고통의 장소라고 본다그들이 영원한 고통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그들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또 그것은 악을 무던히 넘기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다.


     존 G. 스택하우스 2세는 이와는 조금 다른 지옥관을 제안한다그 역시 지옥이 의식적인 고통을 당하는 장소라고 보지만그는 지옥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점을 부정한다그에 따르면 지옥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장소이지만그 대가를 치른 후에는 그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빈 A. 패리는 한 발 더 나아가지옥에서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며결국에는 그들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심지어 인간의 악함도막을 수 없으며그분의 획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제리 L. 월스는 앞서의 주장들과는 조금 그 유형이 다른 내용을 전개하는데그가 집중하는 주제는 연옥이다기존의 가톨릭적 설명에서 연옥은구원에 이르기 위해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인 보속 개념과 연결된다면월스의 연옥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성화의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기 위한 영역으로 제안된다.(그는 종교개혁자들의 편에 서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각각의 주장들 뒤에는 나머지 세 저자들의 논평이 간략하게 실려 있다개인적으로는 그 논평에 대해 다시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재 논평이 붙어 있었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러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질지 모르니까입장이 갈리는 상황에서서로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설명하는 구성이 좋았다.


     네 편의 글에 대해 서로 논평을 하는 형식이 반복되는지라자연스럽게 각 저자들의 성격이 드러난다성경의 직접적 언급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버크나다른 어떤 주제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패리중재적 입장을 자주 취하는 스택하우스의 인상들 같은.


     개인적으로는 보수적인 신앙전통 안에서 자란지라 넷 중 버크에 의견에 심정적으로는 가까웠지만성경구절에 관한 그의 강조가 자칫 문자주의로 기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물론 신학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철저한 주석적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구절을 누가 더 많이 찾느냐는 식은 아니니까.(그런 식으로라면 우리 모두는 안식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 스택하우스나 패리의 주장이 좀 감상적으로 치우친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불쌍하고안타깝고사랑이 많고 하는 이야기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우리의 감정이라는 건 너무 쉽게 바뀌는 법이니까.(반대편 입장에 설 때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도 있다)


     보속이 아닌 성화의 관점으로 연옥을 설명하는 월스의 관점은 흥미롭다애초에 그걸 꼭 연옥이라고 부르지 않았더라면 일부의 반대는 좀 더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잠깐 든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해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다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속한 전통만이 아니라 다른 전통에 속한 이들의 이야기도 주의 깊게 들으며나의 관점이 가진 약점과 빈틈을 차근차근 메워가는 작업도 필수적일 것이다그런 차원에서 이런 책들을 읽어가며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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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십자가 - 중국 5대 제국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그리스도교 역사
송철규.민경중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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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홍보 키워드가 세 가지 있다. “1,400”, “중국 5대 제국”, 그리고 로마-중국-한반도.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전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갔으며, , , , , 청이라는 다섯 제국이 들어서는 동안에도 그 명맥을 유지해 왔고, 그 가운데 인접한 우리나라에도 기독교적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땡기지 않을 수 없는 설명이다.

 

 

     두 명의 저자들은 수년 동안 중국 각지를 직접 다니면서 다양한 취재를 한 듯하다. 각 장의 말미마다 저자들이 방문한 지역의 교회 탐방기와 현지 목회자나 교인들과 나눈 인터뷰의 내용이 실려 있다. 직접 방문한 사람들만이 채울 수 있는 내용들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개된다. 그 성실한 구성은 분명 플러스 요인.

 

     다만 책을 소개할 때 사용한 키워드들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솔직히 약간 아쉽다.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1,400년 전 중국에서 활동한 기독교에 관한 좀 더 다채로운 내용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는데, ‘경교라고도 불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아시리아 기독교)의 중국 전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장과 원나라 황실 내 기독교인에 관한 짧은 언급을 담은 2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이야기들은 대개 근대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한 충실한 내용은 필요한 경우 참고할 만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

 

     여기에 기독교의 우리나라 전래에 관한 내용도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커넥션을 기대했건만,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고 대부분 근대 선교사들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물론 책 자체가 중국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우리나라에 관한 언급은 적은 것도 자연스러운 구성이고, 사료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도 한 가지 사유겠지만... 그래도 왠지 살짝 과대선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역사를 다루면서도 책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공간을 중심으로 한 전개를 선택했다. 시계열적 변화를 통해 역사적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포기할 정도로 공간을 중요시한 것. 결과적으로 보면 이건 준비한 내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저자들이 방문했던 지역에 관한 언급을 늘리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책은 역사책보다는 기행문적 성격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지고, 한 번 나왔던 내용들이 여기저기서 반복적으로 재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역시 애초에 역사적 자료를 구하려 했던 독자라면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저자들이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별 관심사가 아니니까. 그곳에서 새로운 사료를 발견했다거나, 그것들을 제대로 정리했거나 하는 부분이 중요하지, 어디서 누구를 만다고 하는 건 기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차라리 저자들의 방문경험을 부가적으로 붙였더라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형편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책은 짜임새 있게 쓰였고,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읽는다면, 예를 들어 중국 근현대 기독교 선교역사라든지, 현대 중국 기독교의 현황과 같은 내용에 집중하려고 한다면, 이 책은 매우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몇몇 중요한 내용들을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사이의 관계라든지(요즘은 등록교회와 미등록교회라고 불린다고 한다), 중국 현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꽤 중요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는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책 본문은 아니지만, 뒤에 붙어 있는 중국 기독교사 연표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의 중요한 사건들이 연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여기에 주제와도 연관되는 현대 중국의 종교 관련 법률문서도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어서 관련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이런 종류의 책에 꼭 필요한 찾아보기도 붙어 있다.(기본적으로 난 찾아보기를 충실하게 갖춰놓은 책은 일단 점수를 1점 더 주고 본다.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이야기니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목표, 즉 중국 중세사 속 기독교의 흔적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을 원한다면, 오래 전 나온 김호동의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을 보는 걸 추천한다. 관련 내용을 거의 종합해 두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의 책이다. 사실 이 책(대륙의 십자가)에 나온 내용들의 대부분이 그 책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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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 -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교회에 대한 확신
존 R. 스토트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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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토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논리적으로 정론을 펼쳐 가는 꼿꼿한 노() 신학자. 그런데 이 책의 표지에는 아마도 존 스토트의 젊은 날로 보이는 한 남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 그리고 의지가 담겨 있는 굳게 다문 입의 소유자. 그리 많은 책을 본 건 아니지만, 그 안에는 또 냉철한 논리만이 아니라 따뜻함도 담겨 있었다. 특히 교회에 관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균형감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양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야가 좁아져서 한 가지만 고집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교회에 관한 모습을 정리한 이 책에서도 이런 균형감이 돋보인다.

 

 

     1장에서는 교회의 본질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배우고, 돌보고, 예배하고, 전도하는 것.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각각 예배, 전도, 사역, 교제, 설교, 연보, 영향력이라는 주제를 설명한다. 어느 것 하나에 교회의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식의, (특정한 자리에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웅변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으나) 선동적 언사 대신, 각각의 요소들이 잘 갖춰질 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폭넓게 수용될 수 있는 내용들을 차근차근 제안하지만, 동시네 복음주의가 갖고 있는 약점들을 인정할 줄 아는 모습도 보인다. 예컨대 예배와 관련해서 그는,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잘 모르며, 이 때문에 그들의 예배는 때때로 꾀죄죄하며 기계적이고, 피상적이며 따분하다고 말한다. 다분히 신비의 영역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모든 것을 해설하기를 즐기는 그들의 경향에 기인하는 특성이다.

 

 

     교회와 관련된 사건, 사고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무슨 대기업 상속하듯,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아들에게 물려주거나, 교회를 정치의 도구로 삼아 사악한 선동질에 동원하거나, 최근에는 무슨 인분을 먹이고 공동묘지에서 채찍질을 하고 하는 사이비 집단에서 보던 일들마저 일어났다고 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다 교회를 아는 건 아니다. 교회를 피상적으로 관찰할 수는 있을지 모르고, 그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교회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살아있는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전통적인 형태의 교회로의 모임이 상당히 어려워지면서, 교회관의 흔들림, 혹은 균열이 곧 확산되는 게 눈에 띠지 않을까 싶다. 어떤 종류의 변화가 일어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무엇인지 찬찬히 살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여기에 딱 적당한 도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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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 거짓 신들에 맞서는 예수의 복음
톰 라이트 지음, 김소영 옮김 / IVP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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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오늘날 서구가 기독교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이교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군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기독교 사회에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부지중에 다양한 유형의 이교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다. (12)

 

      교회는 성속 이원론에 빠져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났고, 세속의 일원론자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오류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것도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분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하셨다. 이 부분은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

 

     ​사람들이 이교적 우상에 빠지는 이유로, 저자는 실제보다 크게 보이고 싶어 하는 심리를 지목한다. 이교적 우상 숭배의 원인을 자아의 팽창에서 찾는 지적은 흥미롭다. 사실 우리의 자아는 진작부터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었다

 

 

     책의 제목답게, 저자는 마르스와 맘몬, 아프로디테와 가이아 등의, 오늘날 세상에서 숭배되고 있는 거대한 우상들을 탁월한 방식으로 분석한다.(이 부분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은 폭력과 힘을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우상(마르스)과 경제지상주의라는 우상(맘몬), 성애의 신성화(아프로디테)와 이교적 자연주의(가이아)를 가리킨다

 

     개인적으로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주문이 실은 맘몬 숭배자들이 퍼뜨린 거짓말의 일부라고 선언하는 부분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중에는 자칭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다) ‘자유시장경제를 마치 신처럼 추종해왔던가. 마르스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무기제조업체 인근의 교회들의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부분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저자는 사태를 오히려 조금은 낙관적으로 보이는 듯한데,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저자의 신뢰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지금과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들다양한 방식의 예배 회복, 교회의 일치, 사회정의를 위한 교회의 도전, 치유사역, 말씀의 회복, 평신도 사역의 강화, 교회 내 다양한 카리스마적 사역 을 보고하는 부분이다.

 

     교회의 일치라든지, 예배의 형식(예전) 부분에 대한 깊은 관심, 그리고 기도에 관한 폭넓은 수용성 등은 성공회라는 저자의 배경이 짙게 묻어나오지만,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교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해 볼 수 있는 답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동방의 전례가 가지고 있는 풍성한 깊이 부분은 확실히 전체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이고.

 

 

     가장 큰 문제는 저자도 지적했던,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된 이교주의다. 과거 C. S. 루이스도 비슷한 지적을 했었는데,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자유주의였지만, 이제 톰 라이트는 좀 더 보수적인 집단에서도 (결과적으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교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책 전체에 걸쳐서 수많은 탁월한 통찰들이 담겨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정리하고 감상을 쓰는 것으로는 다 담지 못할 만큼.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이교주의에 깊이 빠져있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좋은 책. 문제는 이 책이 처음 쓰인 게, 1992,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이었다는 것. 그동안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자가 기대하고 있었던 교회 갱신의 불씨들이 활활 타오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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