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순수하게 이성으로만 증명하지 않는다.

그의 방식은 훨신 더 흥미롭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앞세우지 않는 대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내면의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보라고 말한다.

변증가 루이스의 비범한 재능은

인간의 일반 경험에 대해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

특히 그가 한때 열렬히 신봉한 무신론보다

기독교 세계관이 더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능력에 있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C. S. 루이스와 점심을 먹는다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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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함의 용기 - 나는 수용자 자녀입니다
성민 외 지음 / 비비투(VIVI2)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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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세계의 절반은 차지하는 존재이고, 청소년이 되어서도 그 비중은 크게 줄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가 어느 날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남겨진 자녀들에게는 어떤 충격이 가해질까. 이 책은 열 명의 수용자 자녀들의 수기를 모은 책이다.(수용자란 확정판결을 받아 수감 중이거나, 미결 상태로 구속되어 있는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여기 나오는 케이스는 대부분 전자인 것 같다.)


책은 부모가 교도소에 들어간 후 남은 아이들의 삶에 집중하고 있지만, 사실 적지 않은 경우 이미 그 전부터 가정의 유지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다양한 상처들을 주는 역기능 가정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부모가 결국 범죄자가 되면서 더 큰 충격을 받게 된 아이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우울감과 위축된 자의식이 보인다. 특히나 한 이야기 속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범죄를 겪게 된 아이의 심정이 어땠을 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강력범죄와 달리 사업의 실패 같은 경제사범의 경우 조금은 도덕적/윤리적 가책이 덜어질 수도 있지만(누구나 사업에 실패하고 빚을 질 수는 있으니까), 그것도 어린 자녀에게는 별 구분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장의 넓은 집이 반지하로 바뀌고, 무엇인가에 도전하는데 필요한 비용(예를 들면 학원비라든지)이 부담이 되는 건 아이들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동들에게 가장 의지할 수 있고,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할 가정이 무너지면서, 이들이 마음을 두지 못하고 떠도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들 중 하나였다. 그런 아이들을 품어주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 이 책은 “세움”이라는 이름의 기관이 이 역할의 일부를 감당해 왔음을 보여주는데, 여기 실린 에세이를 쓴 작가들은 세움의 도움을 받고, 지금은 성인이 되어 또 다른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에 조금 더 공감이 되었던 건, 나 역시 오래 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공장이 부도가 났고, 한 동안 도피생활을 하시다가 결국 잡혀 수감되셨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간 현상수배 전단이 수십 장 붙어 있고,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하는 일들을 나 역시 직접 겪었었고, 꽤 오랫동안 어머니가 홀로 집안 생계를 꾸려 가셨던 기억이 있다. 집이 압류되어 몇 달씩 아는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도 그 기간을 잘 버텨올 수 있었던 어머니의 존재가 컸다. 당신은 아직까지도 해 주신 게 없어 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지만, 그 시기 새벽부터 나가 일을 하시면서 두 자녀를 키워내신 건 단연 어머니셨다. 덕분에 나 역시 크게 엇나가는 일 없이(주차위반과 속도위반 과태료 두 번이 전부다) 생활해 왔었고.





사실 문학적으로 각 이야기가 잘 쓰였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마추어 작가인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다들 그 안에 진심을 꼭꼭 눌러 담았다는 느낌이다. 어두운 터널을 잘 통과해 온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물론 이 책 자체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겠지만, 혹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다면, 이들이 의지했던 “세움”의 문을 한 번 두드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뭔가 좀 도움을 더해줄 수 있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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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이 ‘데모크라티아’라고 불렀던 정치체제는

무엇보다 그것이 기능하도록 만드는 역량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테네인은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해왔다.

페리클레스는 교묘하게도 실제로는 ‘홀로’ 지배했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희 모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아테네 민중은 ‘홀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페리클레스 뒤에 나타난 지도자들이

모두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밀려난 사실이 그 증거이다.

아테네의 민중은 지도자를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두각을 드러내면 그 순간 망가뜨리고 말았다.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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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 - 문화 변혁의 기독교 세계관 선언서 Abraham Kuyper Series 2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박태현 옮김 / 다함(도서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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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이자 목사, 정치가(수상까지 역임했다)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를 받아 칼빈주의(칼뱅주의)를 주제로 여섯 번의 강의를 했다. 칼뱅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그것이 종교와 정치, 학문, 예술에 끼친 영향, 그리고 미래 전망까지 종합적으로 다룬다.


카이퍼의 강연을 옮긴 이 책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번역되어 왔었다. 개인적으로는 학창시절 레포트 도서로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카이퍼 자신이 네덜란드인이다보니 네덜란드어로 했을 강연임에도 초반에 나왔던 책들은 그 강연을 영어로 옮긴 책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이었다. 원문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리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고, 네덜란드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네덜란드어에서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한 명의 번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강연들 사이의 통일성을 살릴 수 있었다는 서문 내용이지만, 사실 내용이 쉽지는 않다. 신학뿐 아니라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별다른 설명 없이 바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없다면 내용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듯하다. 확실히 “신학책”이라는 느낌.


이런 어려움을 한 발 넘어설 수 있다면, 비로소 카이퍼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온다. 저자가 이 일련의 강연에서 강조하는 바는, 칼뱅주의가 가지고 있는 포괄성 성격이다. 물론 당시에도 칼뱅주의가 하나의 교단이나 교파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긴 했지만, 저자가 말하는 칼뱅주의는 그보다 큰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의미.


카이퍼는 칼뱅주의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져왔고, 종교의 참된 의미와 기능을 되살렸으며, 정치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회복시켰다고 말한다. 그건 단순히 종교적 신조를 모아놓은 일련의 교리들이 아니었다.


물론 살짝 무리한 해석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술과 관련된 부분인데, 저자는 칼뱅주의가 교회권력과 지원에 종속되어 있던 예술을 해방시켜, 본래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가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신학적 해석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칼뱅주의의 전제들에서 이끌어낸 해석이지, 칼뱅주의 자체가 예술을 어떤 식으로 부흥시키거나 장려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은 무리해 보이는 것도 사실.





마지막 강연에서 카이퍼는 칼뱅주의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데, 확실히 칼뱅주의자들을 둘러싼 상황이 당시에도 녹록치 않았다는 점이 여실히 느껴진다. 굉장히 강력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고, 심지어 칼뱅주의자들 안에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고 있기도 하니까.


카이퍼는 더 철저하게 칼뱅주의를 연구하고, 그 원리에 따라 소망으로 살아가자고 권한다. 그의 연설이 행해진지 거의 130년 가까이 지난 오늘, 과연 그 연설이 행해졌던 미국 땅에서 칼뱅주의는 성공했을까? 그리고 칼뱅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주 입에 올리는 우리나라의 보수교회들의 상황은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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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인이 단 하나의 사례로 더 큰 추세를 반박하려 들거든

이것이야말로 나쁜 과학의 전형적인 특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문해보자.

그 반대 사례 하나가 정말로 전체적인 개념을 깨뜨릴 수 있을까?

우리 지도자들의 발언 뒤에 과학적인 뭔가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 데이브 레비턴, 『과학 같은 소리 하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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