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신학자들이 비난한 가장 추악한 이 교만 죄가
현대 ‘휴머니스트들’의 갈채를 받아왔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율적 개인주의는 세속 사상가들이 그토록 빈번히 제창한
‘인권’ 운동의 비옥한 토양이었지만,
결국 합리화된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 제라드 리드,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 중에서
서양의 분노청년이 자국 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변혁의 주체로 나서려 했다면,
중국 분노청년은
오직 중국의 적이라고 생각되는 집단에만 분노한다.
- 김인희,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중에서
이전 세대들이 ‘동성애’라고 불렸던 심리적 상태를 요새는 다양한 영문 이니셜로 표시하는 것이 유행이다. LGBT에 요새는 Q까지 더하고, 심지어 여기에 몇 개의 알파벳을 더 붙이거나 앞으로 누군가 주장할 다양한 성적 지향에 열려 있다는 의미의 +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자신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성적소수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 종류는 이쪽이 훨씬 더 다양한 것 같다.
사실 이들이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외부인들이 뭐라고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중요한 기준이나 원칙들마저 자신들의 주장에 맞춰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속적) 학계의 지지를 받아 이들의 주장은 어느 샌가 “보편성”, 혹은 “인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 도전이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성경의 곳곳에는 동성애를 명백히 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약자와 소수자로, 핍박받는 이들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잘못을 주장하는 것이 마치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앞서 말한 보편적 인권 문제로 이 상황을 정의하는 점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주제에 관해 적어도 당사자성을 갖고 한 마디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는 동성애적 지향을(책에서는 “동성간 끌림" same-sex attraction, SS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갖고 있는 성공회 사제이다.
저자의 접근은 모든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개하고 천국을 받으라.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이건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요청이다. 오늘날 많은 성소수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성적 지향이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비슷한 착각은 페미니스트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은 우선 그를 구성하는 여러 종류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고, 나아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핵심이 아니다.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 속 동성애 정죄를 다양한 논리로 약화시키거나 해체하려고까지 시도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아마 성경 시대에는 없었을=성경의 저자들은 생각하지 않았을) 다양한 논리적 기교가 필요하다. 이에 반해 저자는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좀 더 문법적이고 문화적이며, 분명한 방식으로 읽어낸다. 성경은 분명 그런 행위를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건 단지 부가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하나님 백성)의 삶의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경고다.
이 두 가지 기초 아래 저자는 빙빙 돌리지 않고 분명하게 이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 SSA가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것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충동은 우리를 죄로 이끈다(그런 충동이 생기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SSA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건 기독교에서 성과 관련되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이 두 가지 상태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결혼 관계 속에서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절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부분에 관해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설명의 과정이 억압이나 강요의 성격이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SSA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의를 진전시키는 것과는 상관없다. 우리는 그들 또한 우리처럼 온갖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당연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문제를 가지고 대화할 자리는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이고, 단순히 그건 잘못 됐다고 외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보통 그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법은 거의 없다),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그들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성경적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이런 조언은 개인적 관계로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SSA를 지닌 이들을 만날 때 취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좋다고 본다. 다만 이 문제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넘어 한 사회의 제도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는 이런 수동적인 포지션으로 충분할까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책이 아주 콤팩트 하다. 때문에 아주 깊은 논의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 담아야 할 내용은 충분히 담아낸 것 같다. 어차피 학문적 접근이 목적이 아닌 이상은 이 정도 내용이면 충분히 교회 안에서 대화와 공부에 사용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