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에서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상물 속 반기독교적 코드를 읽어냈던 저자가 이번에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미디어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다룬다.
책에서 말하는 알고리즘은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개념보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를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한 설계, 그 과정을 말한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던가. 자기 전 휴대폰을 열어 쇼츠를 하나 눌렀다가 한참을 계속 화면을 위로 밀어내면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거나, 뭘 하나 검색하면 금세 인터넷 사이트 곳곳에 내가 검색한 상품과 비슷한 상품 광고들이 잔뜩 뜨는 그런.
이런 알고리즘은 어떻게든 사람들의 주의를 오래 잡아끌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 반복적인 자극을 추구하고, 반복적으로 오래 그런 것들에 노출되다보면 사람들의 뇌에도 분명 영향을 준다. 이제 우리는 조금만 긴 이야기에도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런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건 수익을 내기 위해 일을 하는 기업이다. 결국 그런 알고리즘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돈과 시간을 바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의미.
사실 이 책은 이런 일반적인 알고리즘 종속의 문제를 넘어, 신앙적 차원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훌륭하게 분석한다. 예를 들면, 정보를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기술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요새 유행하는 건 3분, 1분 안에 핵심을 전달하는 쇼츠형 설교 콘텐츠이다.
이 ‘즉각성’, 즉각적 만족에 매인 태도는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즉각적인 답변이나 요약된 진리 속에 있지 않”으며, “침묵과 기다림, 질문과 씨름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때로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들의 연속이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니고,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느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들은 충분한 축적이 있은 후에야 뭔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알고리즘적 즉각적 응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를 선택하는 기준도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징들에 좌우되곤 한다. 교회가 갖춘 인프라, 교육 시스템, 온라인 서비스의 제공 여부, 찬양팀의 규모와 실력 같은 것들이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신앙생활도 ‘좋아요’를 누르는 콘텐츠화가 되어 버리는 것.
책 전반에 걸쳐서 알고리즘을 강요하는 현대의 디지털 문화에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지만,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이른바 “블렌디드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기존의 전통적인 신앙생활의 형태와 새로운 디지털 환경을 섞은(블렌디드) 형태의 전망을 하는 것도 독특하다. 개인적으로는 내용상 앞의 것들과 좀 어울리지 않는다 싶긴 한데, 책 자체가 너무 반문화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저자는 교회가 단순히 디지털과 멀어져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지 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실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4장의 마지막 절에는 아날로그적 삶이 주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반 디지털 쪽으로 기우는 것 같기도 하다. 내적 갈등이었으려나...
이 시점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주제였다. 책에도 언급된 것처럼, 급격히 변하가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는 그저 상황을 뒤쫓아 가기에 급급했던 면이 있다. 이미 AI라는 도두가 우리의 신앙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이지만, 늦었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 늦을 테니까.
애송이들의 소꿉장난.
앞서 나왔던 영화 “길복순”은 센세이셔널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본 듯한 클리셰들이 잔뜩 있긴 했지만, 이런 스토리의 영화를 우리나라 배우들과 한국어 대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전도연과 황정민이 칼싸움을 하는 영화를 또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그 영화의 속편이 나왔다고 해서 어느 정도 전편에 근거한 기대를 갖고 보기 시작했는데, 이건 무게감이라든지 분위기가 확실히 이전만 못하다. 주인공 킬러 역에 임시완이라는 배우가 잘 어울리는지는 좀처럼 확신이 안 들고, 상대역인 신재이 역을 맡은 박규영 역시 깊은 고민이나 내면의 복잡한 감정 같은 걸 표현하기에는 아직 좀 더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 오히려 카메오로 잠깐 얼굴을 비친 전도연의 몇 마디가 더 임팩트가 있었다고 하면 좀 가혹한 평일까.
전작 길복순이 흥미로웠던 건, 거대한 킬러 회사와 그들로 구성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설정만이 아니라(이건 존 윅 시리즈에서 훨씬 더 잘 구현되어 있다), 업무 외의 시간에 복순의 가정사가 묘사되는 과정에서의 갭 차이도 중요한 몫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게 없다. 주인공 사이의 썸 비슷한 게 있긴 한데, 그것뿐이라면 한국 드라마 특유의 고질병(회사 다니면서 연애하고, 법정에서 연애하고, 병원에서 연애하고..)의 반복일 뿐.
스토리는 또 왜 산으로...
영화는 전작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길복순은 일을 그만두기 위해 회사를 상대로 홀로 전쟁을 시작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이제 이 킬러들의 세계관을 창조한 전임 회장이 죽은 상황에서 조우진이 연기하는 독고라는 인물이 복귀해 다시 회사와 킬러 세계의 질서를 수습하려는 상황.
그런데 이 정도까지 묵직한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걸 깨려는 쪽도 그에 상응하는 무게감을 지녀야 어울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질서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재이의 행동 뒤에는 그저 ‘재미있어 보여서’라는 이유로 돈지랄을 하는 벤자민 조라는 캐릭터가 있을 뿐이다. 애초에 킬러들의 세계에서 신재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모르지만, 어디서 물주 하나 물고 왔다고 해서 저렇게 건방지게 행동하는 걸 나머지 조직들은 멍청하게 그냥 보고만 있다고?
심지어 신재이가 독고와 싸우러 가는 것까지는 억지로 이해해 보려고 하는데, 내심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주인공 이한울이 그녀와 함께 독고에게 달려드는 건 도대체 뭐 때문인지 감도 안 잡힌다. 이게 이른바 MZ식 사고라는 건가? 안 그래도 여리여리 캐릭터라 언제 개그가 튀어나올까 조마조마한데, 이런 식으로 스토리까지 무너지면...
스타일리시한 액션?
그나마 전작을 계승한 건 스타일리시한 액션씬 정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나 다들 킬러들이라는 설정상, 살상용 무기를 들고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칼 대신 주인공 이한울은 사마귀라는 별명답게 일종의 낫을 변형한 무기를 들고 있고, 독고의 경우 톤파를 개량한 살상 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존 윅 식의 총이라는 편리한 무기를 왜 사용하지 않는 건지는... 우리나라에선 총기규제가 심하기 때문인 걸까? 애초에 이 정도의 대규모 암흑세계가 존재하는데, 단지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공권력이 모른 척 할까. 우리나라가 멕시코 같은 갱단에 지배되는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이 수도 없이 잘리고 죽어나가는데, 그 장면이 단지 멋있다 정도로만 묘사되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
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딱 좌파처럼 생겼다”면서 빈정대는 악플이 달린 적이 있다. 책소개를 하면서 윤석렬의 불법 계엄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일반적인 비판을 넌시히 돌려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거기에 긁혔나 보다. 안 그래도 무속정권 추종자들답게 관상으로 세상을 보느냐고 일침을 놓고 차단해 버렸다. 은근 이 정도의 수준인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 온라인이라는 무대다.
그런데 사실 나는 보수적인 편에 가깝다. 작성된 지 2천 년이 훨씬 넘는 글에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보수적인 게 아니라면 누가 보수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내뱉는 언사가 전혀 보수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런 종족에게 미약하나마 내 한 표를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 계열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늘 옳은 말, 좋은 말만 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보수라는 단어가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게 우리만의 상황은 아닌가 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이 보수주의라는 것이 그 정확한 함의를 잃고, 막연한 인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주된 원인은 이른바 진보주의에 있다.
애초에 보수주의는 자생적인 사상이 아니라 진보주의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튀어나온 (의존적) 사상이다. 그런데 최근 이 진보주의가 길을 잃고 태생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념 중심의 사상답게, 현실 세계에 긍정적인 변혁을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또한 그런 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게 된 것들(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포함된다)도 많고. 그렇게 진보주의가 사상적으로 약화되자 보수주의 역시 함께 그 성격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사실 보수주의라고 해도 그 형태가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게서 시작된 “보수주의”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반혁명(프랑스혁명), 반사회주의, 반큰정부라는 형태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 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해 보여준다. 이 흐름 속에서 일관되게 남아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주류가 된 네오콘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분화와 분석은 역시나 앞에서 말한 진보주의의 몰락과 함께 점차 투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가치의 중심점을 어느 쪽에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 결국 비슷한 것들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보수주의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방성과 유동성을 아울러 갖춰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 정당, 혹은 보수 정치인들은 (그리고 자기들이 무슨 ‘보수의 자존심’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일부 지역의 유권자들은) 애초에 보수가 뭔지 1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인습에 박혀서 온갖 부패하고 무능력한(최소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정치인들을 거수기처럼 뽑아 국회로 밀어 넣는 건 공동체에 대한 범죄에 가까워 보인다.
이건 이 책의 저자의 나라이기도 한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세력이라는 역설”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온다. 이거야 말로 우리의 보수를 설명하는 촌철살인격 어구다.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현실적으로 우리의 “보수”란, 정관계에 잡초처럼 퍼져서 온갖 부패와 협잡을 일삼으며 공동체의 양분을 뺏어먹다가, 마침내는 친위쿠데타까지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몰락 중인 부패공동체다. 애초에 보수란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의미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수에서 그 지킴의 대상은 자신들의(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권일 뿐인 경우가 많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보수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도 그쪽에 표를 주게 될까?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교류에 몸을 내맡긴 상태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자기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