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1974-75년 일제전범기업 연쇄폭파사건
마쓰시타 류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힐데와소피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 7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시기였다. 익히 알려진 프랑스의 68혁명이 그 중 하나이고, 미국에서는 히피들의 반전운동의 기세가 강렬했다. 4.19 혁명으로 60년대의 문을 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곧 박정희의 장기독재 아래 들어가지만 독재자의 암살로 70년대의 마지막 해를 장식했다.


바로 그 시대 일본에서도 한창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 적국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은 유명하고, 전공투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학생운동도 연일 이어졌다. 이들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일제가 벌인 만행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들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잘못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모습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자민당 장기집권 아래서도 제대로 된 항의나 반발 없이 굴종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 책은 전공투가 소멸되고 그 파생조직 중 하나였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단체와 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옮긴 책이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재구성한 일종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글이다. 사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이름과는 달리 조직원은 겨우 네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 자신들이 이 이름의 투쟁을 독점할 수는 없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기다리며 “늑대”라는 이름의 활동조직명을 따로 취한 이들이다.(후에 “대지의 엄니”와 “전갈”이라는 또 다른 자발적 조직들이 같은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이 당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특징은 과격성에 있었다.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색깔의 하이바를 쓰고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은 전공투를 상징하는 형상이었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조직원들이 선택한 방식은 폭탄테러였다. “전선”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범기업들과 전후 경제침탈에 나선 여러 기업들의 사옥에 폭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주고자 했다. 저자는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왜 그런 방식의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투쟁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민한다.


“전선”은 이들이 단순히 일제가 벌인 침탈에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 당시 저항 대신 일제의 계획과 명령에 복종했던 보통의 일본인들마저 함께 범죄의 당사자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은 이들이 보기에 헛소리였다. 당시 시점에서 “일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죄책을 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폭탄 테러라는 방식은 강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상정하지 않았던 부작용이었다. 그들은 폭탄을 터뜨리기 전 반드시 사람들을 피신하도록 경고하는 전화를 걸었다. 다만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빌딩에 설치한 최초의 폭탄은, 5분 전 경고 전화에도 불구하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많은 인명이 사사당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조직원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비록 폭탄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지만 젊은이 특유의 단순함과 과몰입, 그러면서도 순진한 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인명피해를 일으킨 행위는 분명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같은 행위라도 우리는 상황과 목적에 따라 조금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척은 우리에게 “의거”로 남아있고,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나마 친일파들을 권총으로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환희를 느끼지 않던가.


그래서 이 책이 좀 더 어려웠다. 일제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민족의 후예로서 우리는 “전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일으킨 가공할 만한 전쟁범죄의 최종 책임자이자 S급 전범이었던 일본 천황까지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의 시도가 정당하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리고 희생된 민간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감상주의적 태도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과연 "정의로운가" 묻는다면 그 답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박해를 받지 않거나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만약 박해를 받고 있다면,

정말 그리스도를 위한,

의를 위한 박해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미로슬라브 볼프, 라이언 매커널리린츠, 『행동하는 기독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의 정체 가능성에 대한 리카도의 암울한 그림은

오늘날의 논쟁에도 시사점이 있다.

최근 몇 십 년 사이 금융 분야가 비대하게 팽창하고

투기로 막대한 지대를 가져가면서

생산적인 산업에 투자할 인센티브를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몇몇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금융 부문이 실물 경제(산업) 부문에 비해 너무 커지면

성장이 둔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이윤은 재화와 서비스를 새로이 산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그 재화와 서비스에서 나오는 돈을

단순히 이전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마리아나 마추카토, 『가치의 모든 것』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