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간의 첨예한 긴장이 흐르는 서해 백령도.

 

부근 바다에는, 천연기념물 제331호로 지정된 잔점박이 물범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물범들은 천연기념물 지정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천진난만한 표정들이다. 그렇다. 당사자들이 무엇에 지정돼 있는지도 모르는 채 잘 지내도록 해주는 것이 천연기념물 지정의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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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애들은 세 살 터울의 남매다.

남매가 어릴 때에는 좁은 아파트에 살아도 별 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나이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나가 4학년이 되자 남동생이 1학년으로 입학했는데, 혼자 쓰던 공부방을 동생과 같이 쓰게 된 누나가 이런 경고를 했다는 것이다.

, 앞으로 이 방에서는 절대 떠들거나 장난하면 안 돼. 왜냐면 내 방에 네가 세를 든 거니까 말이다.”

직장에서 막 퇴근한 나를 붙잡고 아들애가 못내 억울한 낯으로 전한 경고의 내용이다. 그러면서 물었다.

아빠, 정말이야? 내가 누나 방에 세를 든 거야?”

셋방살이를 오래한 탓에 생긴 희극 같아 우스웠지만 아비 마음 한 편으로는 서럽기도 했다. 기억은 분명치 않은데 아마 이렇게 아들애를 달랬던 듯싶다.

누나 말이 맞다. 네가 속상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지금 다른 동네에 방 많은 우리 집을 새로 지으려고 하니 말이다. 아빠가 약속한다. 집을 짓고 나면 네 방을 따로 하나 줄 테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토지공사에서 택지를 하나 샀었다.

 

그런 언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1년 뒤 지금의 단독주택을 짓고 우리 가족은 그 아파트를 떠났다. 물론 이사 오자마자 딸애와 아들애한테 방 하나씩 주었다. 방마다 평수가 달라서 딸애가 누나이므로 아들애보다 조금 더 넓은 방을 주었다. 누나 보다 좁은 방을 쓰게 된 아들애가 혹 불평할까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별 말 없이 아들애는 그 방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이 단독주택에서 21년이 흐른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앳된 상고머리 얼굴로 그 방에 들어간 아들애가 얼마 전 서른 나이 청년 모습으로 그 방을 나와 분가했다. 취직하게 되면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갈 참이다. 돌이켜보면 21년 동안에 아들애가 그 방을 비운 때는 딱 삼 년이었다. 2년은 군대 가 있을 동안이고 1년은 어학연수 차 외국에 가 있던 동안이다. 그 외 18년은 그 방에서 아들애가 지낸 셈인데 사실 그 방은 당사자가 부재한 3년간에도 변함없이아들애 방이었다. 항상 아들애의 옷들과 책들과 잡동사니가 빈 방을 지켰다. 대학 시절 락밴드 활동에 빠졌을 때의 이상한 물건들(별나게 넓은 혁대, 요란한 디자인의 시계, 은빛 쇠줄이 달린 청바지, 짝짝이 색깔의 신발 등)도 항상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 빈 방을 지켰다. 아들애가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우리 내외는, 그 방의 물건들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녀석이 무사하게 제대하기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듯싶다. 비행기로 12시간을 가야 하는 먼 타국에 가 있을 때에도 우리 내외는 그 빈 방의 문만 보면 녀석이 그저 무사하게 일 년을 보내고 귀국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심지어는 내외간 말다툼을 벌일 때에도 그 방의 문만 보면 부모라는 사람들이 이러면 안 되지. 아들애가 먼 데 나가 있는데하며 마음들을 다잡기까지 했다.

 

아들애는 분가하면서 그 방의 자기 물건들도 챙겨갔다.

이제 그 방은 아비의 낮잠 자는 방이 되었다. 사실 그 방은 다른 방에 비해 좁은 편인데다가, 옆에 보일러실이 있어서 간간이 보일러 작동 소리도 나니 그다지 쾌적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 몇 달 간 아비가 낮잠 자는 방으로 써 보니까 의외로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렇다. 좁은 만큼 역설적으로 아늑한 맛이 있었다. 이불 펴고 누우면, 마치 내 몸에 맞춘 듯 불필요하게 남은 공간 하나 없으니 그저 안온한 잠에 빠져들 수밖에. 아들애가 대학 시절 밤새워 락 밴드 활동을 하다가 귀가만 하면 쥐죽은 듯 방에서 잠자던 모습이던 게 비로소 이해되었다. 간간이 들리는 보일러 소리조차 귀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터 따듯한 자장가처럼 여겨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 너무 조용하기보다는 간간이 소음이 있는 방이 낮잠 자기 좋았다. 좁고, 간간이 기계 소리가 나는 곳임에도 녀석이 아무 말 없이 만 18년간을 잘 지낸 까닭이 있었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난 뒤 나는 아들애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몸이 늙으면서 체력이 달리는 때문인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낮잠을 자야 버틸 수 있다. 요즈음은 화창한 봄이 돼 보일러를 틀지도 않는다. 간간이 들리던 소음마저 사라진 아들애의 방. 겹겹의 고치 속에 누운 누에만큼이나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나는 달게 잠들었다.

아들애가 남기고 간 어느 한때 방황과 꿈속에 누워 아비가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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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생활이 막 십년을 넘었을 때다. 3 담임을 맡았는데 매달 모의고사를 치른 뒤 채점결과를 갖고 반 학생들을 일부, 격려도 하고 책망도 해 주었다. 웬만하면 일부가 아니라 모든학생들을 상대로 그랬어야 하는데 워낙 맡은 수업시수가 많아 여유시간이 없었던 탓이라고 나 자신을 변명해 본다.

일부학생 중에 A군이 있었다. 당시 교직생활 십년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공부 잘하게 생긴 A군이 뜻밖에 하위권 성적이라 담임인 나는 안타까웠다. 그래서 모의고사가 다가올 때마다 A군을 별도로 불러 이번에는 상위권에 들도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거라고 독려했다. 그럴 때마다 A군은 영리해 보이는 눈빛으로 , 알겠습니다!’하며 남다른 각오를 보였다.

하지만 모의고사를 치르고 난 뒤 채점결과를 보면 A군은 변함없이 하위권 성적이었다. 몇 달 간을 그랬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A군은 외모만 공부 잘하는 학생 같았을 뿐, 원래 공부가 안 되는 잡념 많은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학생의 똑똑해 보이는 외모만 믿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외모는 꼭 장난꾸러기 같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교직생활을 했다.

교사는 절대 학생들을 외모 하나로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청순한 얼굴 생김으로 시청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던 모 처녀 탤런트가 유부남과의 불륜에다가, 마약 복용 논란까지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추락한 사건도 있었다. 그녀의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에 빠져있던 시청자들이 얼마나 실망이 컸고 환멸감 또한 대단했던지, 그녀가 몇 년 후 조심스레 TV 드라마의 한 역으로 재기하려 했을 때 철저히 외면함으로써 좌절시켰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물론 사람의 외모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모가 곧 그 사람이란 등식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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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구애와 교접 행동을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을 보았다. 처음에 발정기 암컷을 만난 수컷은 그 주위를 맴돌며 따른다. 암컷이 별 관심 없는 듯 행동하다가 웬 일로 호응하면서 둘은 함께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둘은 짝짓기 한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우리 사람들의 결혼 과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처음에는 총각이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 주위를 맴돌며 따르기 마련이다. 어줍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핑계를 만들어 커피 한 잔 함께 마실 계제를 마련하고자 한다. 처녀는 처음에는 사양도 하며 거리를 두듯 하다가 얼마 후 총각에게 마음을 열어 데이트를 한다. 그런 뒤 결혼식을 올리고서 부부가 되는 것이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동물의 짝짓기 장면과 우리 처녀 총각의 결혼식 장면과의 차이점이다. 동물은 짝짓기를 하는 순간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은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개 짝짓기의 시간이 벼락같이 짧은데 그 순간 천적에게 기습받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대응인 듯싶다.

우리 처녀 총각의 결혼식은 동물과 경우와 너무 다르다. 친척들과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축복 속에 천천히 이뤄진다. 요즈음에는 30분 만에 끝나는 초고속 결혼식도 있어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그래도 동물의 벼락같은 순간보다는 훨씬 길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환호하는 가운데 치러지는 우리 처녀 총각의 결혼식이야말로 벌판의 동물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여유중 하나다.

그런 여유가 인간만이 누리는 문화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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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야산을 오르다가 한 마리 개와 맞닥뜨렸다. 주인도 보이지 않고 혼자 산길을 어슬렁거리는 그 모습이라니. 주인이 방심한 탓에 제멋대로 가출해 떠도는 개 같았다. 개와 나는 좁은 산길에서 약 10미터 거리를 두고 조우(遭遇)한 것이다. 그렇다. 결코 만나려는 뜻이 없었다.

나는 머리털이 일제히 솟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강아지도 아니고 중개라 부를 만한 크기의 개. 만일 내게 적의를 느끼고서 덤벼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데 다행히 개가 먼저 옆의 숲속으로 사라지면서 원치 않은 조우 상황이 마감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나는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고 뒤돌아 부지런히 하산해 귀가해 버렸다.

 

아득한 옛날 인류 주위에서 기웃거리며 음식을 받아먹던 늑대 중 일부가 지금 개들의 조상이다. 그렇기에 개들에게는 늑대의 야성이 숨어있다. 잘못 건드리면 맹수로 돌변하는 게 그 때문이다.

그렇게, 개의 유래를 재확인해 봄으로서 그 날 야산에서의 대단한 공포를 이해해 봤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깨달았다. 내가 그 날 그 개와 맞닥뜨렸을 때 대단한 공포에 휩싸인 까닭 중 가장 큰 것은 그 개가 통제를 벗어난 모습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류사란, 사람이 주위의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확장의 역사가 아닐까? 산과 들에 나고 피는 식물들 중 필요한 것들을 선택해 통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식량자급에 이르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물들 또한 잡아서 가축화하거나 애완물로 삼는 데 성공함으로써 식량자급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의 위안까지 얻었다. 어디 그뿐인가. 땅바닥에까지 눈을 돌려 석유 같은 에너지원을 얻는가 하면 각종 편리한 기기들까지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눈에 뜨이는 사물들마다 통제하여 마음대로 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 날 내가 야산에서 맞닥뜨린 개는 현 인류사에서 있을 수 없는 모습통제를 벗어난 모습이었기에 나는 대단한 공포감에 휩싸였던 거다.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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