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아내와 함께 밭농사 짓던 체험이 바탕이 돼 쓰였다. 농사가 처음인 데다가, 동화의 한 장면처럼 우거진 숲속 밭이라 충분히 소설 감이 된다고 무심은 판단했다. 일주일 남짓해 소설을 완성했으니 비교적 수월하게 쓰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이 발표된 뒤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아내가 작품 속의 아내와 동일시되면서 주위 분들한테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된 복부인으로 오해받게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해명하건데 절대 무심의 아내는 복부인이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복부인이 못 된다.’

워낙 성격이 무심한 탓에 무심이란 호를 갖게 된 남편과 달리, 세상일에 유심한 아내이기는 하나 부동산 투기 같은 재테크보다는 집안 살림 밭농사 성당봉사활동 같은 건전한 부문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굳이 무심의 소설들 중에서 아내의 실제 모습에 가까운 여성을 고른다면외출에 등장하는 아내일 것 같다.

 

한 편의 소설은 반드시 작가의 상상력을 전제로 한다. 무심의 경우, 티베트의 천장을 소재로 한라싸로 가는 길100% 상상으로 쓰였다. ‘시신을 새들에게 먹이로 주는 천장 풍습이 티베트에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한 뒤 상상력을 발휘해 쓴 것이다. 월남전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한 사내를 소재로 한숨죽이는 갈대밭또한 80% 이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 소설을 쓸 때 무심은 월남은커녕 제주도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대학교 4학년생이었는데문학의 밤 행사에 발표할 꽁트를 하나 준비해 달라는 후배들의 부탁에 며칠을 고민하다가어느 날 밤갈대밭 초원 앞에 카빈총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사내를 상상하며 밤새워 꽁트가 아닌 단편소설로 완성한 것이다. 100% 상상력의 소산이라 하지 않고 80% 이상이라 한 까닭은 소설의 배경인깊은 산속 분교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명작가가 된 *** 선배와, 그 소설을 쓰기 전 해인 1972년 늦가을 일주일 남짓 그런 분교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 대학가에 갑자기 휴교령이 내려져 기약 없이 놀며 지내야 했던 시기다.

잡초의 경우는 상상력이 10% 정도 보태져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아내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순하고 평범한 주부로 그려서는 작품 맛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생각 끝에 아내를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돼 있는 복부인여자로 만들어 놓자순수한 농토마저 부동산 광풍에 휘말리는 이 시대의 폐단이 선명해졌다.

 

작가에게 현실은 창작의 재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작가가 상상력 하나 보태지 않고 현실 체험대로만 글을 쓴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나 수필이다.

여기서숨죽이는 갈대밭에 얽힌 일화 한 가지를 공개한다.

이 작품을 썩히기 아까워 세월이 몇 십 년 지났지만 세상에 제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문제는 빛바랜 문학회지에 활자로 인쇄된 것들을 어떻게 워드로 쳐 바꿔 놓느냐였다. 창작하는 일과 달리 그런 기계적인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궁리 끝에 대학생인 아들을 불러 부탁했다.

아빠가 대학 시절에 문학회지에 발표한 작품이 있는데, 워드로 쳐 다오. 그럼 용돈을 줄 게.”

아들이 용돈 욕심에 숨죽이는 갈대밭을 워드로 쳐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토리에 이끌려 호흡이 가빠지더니 워드를 다 치고 나자 소리쳤다.

아빠가 대학시절에 이렇게 소설을 잘 썼다니!”

그러더니 이런 소리도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자말이야, 우리 엄마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무심이 아내를 맞선자리에서 처음 대면한 때는 198358일이다. (그 사흘 전 어린이날, 중공민항기가 춘천의 미군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우리는 하필 중공민항기 직원들이 커피 마시며 쉬었다는 모 커피숍에서 대면했다.) 10년 전인 19735월에 쓴 소설의경자가 아내의 모델일 수가 없는 이유이다. 아들이 그런 말을 하고는 낄낄낄 웃었다. 아빠랑 함께 웃고자 한 말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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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을 마치고 귀갓길에 올랐다. 밭이 있는 교외를 떠나 도심으로 진입하려 하자, 도로는 퇴근 길 차량들로 가득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신호등의 신호 한 번에 교차로를 통과했을 것 같은데 오늘은 두 번이나 세 번 걸린다. 우리 동네까지 남은 거리는 약 5km. 우리 차는 다른 차들을 뒤따라 직진하다가 비보호우회전, 다시 직진으로 가며 보행자 전용도로의 점멸등도 살피며 교차로 부근까지 닿았다. 두 번째 파란신호등에 교차로를 지나 직진, 그러다가 좌회전 신호를 받고는 마지막으로 동네 어귀를 우회전으로 들어갈 참이다.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온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십여 분 전 일이다. 우리 차 앞으로, 옆 차선의 중형차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은 채 불쑥 끼어들었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그뿐 만도 아니다. 뒤의 어떤 차는 연실 경적을 울려댔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안다. 우리 차보고 너무 느리게 간다. 더 빨리 가든지 아니면 자기가 추월하게 양보해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방에 차들이 워낙 많아서 그 뜻대로 실행해주기 어려운 것을. 솔직히 우리 차가 경차가 아닌, 중형차였더라면 저러지 않았을 게다. 경차를 몰고 차도에 나서면 수시로 무시당하는 게 교통 현실이다.

동네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신호를 받는 교차로에서는 옆 차선의 차들과 잠시 뒤엉켜서 위험했었다. , 어쨌든 우리 차는 동네 어귀까지 무사히 왔다. 집까지 50여 미터 남았다. 차를 우회전하면서 어귀로 들어서려는 순간 불쑥 동네 안쪽에서 나온 다른 경차와 충돌할 뻔했다. 웬 중형차가 어귀 길가에 주차해 있어서 상대를 못 봤기 때문이었다. 천만다행이다.

집 앞에 다다랐다. 오늘도 무사히 밭일을 마치고 귀가했다. 교통전쟁에서 오늘도 무사했다.

사실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진다면 밭일이고, 교통체증이고, 경차고, 중형차고 다 엉망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 경차를 업신여겨 불쑥 끼어든 중형차 운전자나, 우리 차 뒤에서 연실 경적을 울려댄 다른 차 운전자나, 종일 밭일로 온몸이 땀에 젖은 우리 부부나 사실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아닌가. 이런 평화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끔찍한 전쟁이 우리 한반도에 절대 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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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10-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사고는 서로 조심하면 되지만 전쟁은....안되지요.
편안한 추석연휴 되세요~~

무심이병욱 2017-10-0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절대 제2의 6. 25가 나서는 안됩니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현재의 일상이 지켜져야 합니다.
 

 

 

 

  이 풍경의 주인공은 컨테이너 농막도, 여인도, 초록 파라솔도, 시커멓게 드리워진 땅 그늘도 아니었다. 화창한 초가을 햇빛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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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의 당사자가 TV 인터뷰를 했다. 주요한 의혹에 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경황이 없었거든요.”

경황이 없다란 시간이나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묘한 말이었다.

 

내 경우에 적용해 보았다. ‘내가 올해 들어 건강이 안 좋게 된 것은 경황이 없어서다.’ ‘내가 어떤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은 경황이 없어서다.’ ‘올해 옥수수 농사를 반타작한 것은 경황이 없어서다.’ ‘종중산의 조상 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은 경황이 없어서다.’ 등등

 

경황이 없다란 말은 외견상으로는 납득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납득이 안 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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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우려가 들어맞았다. 아내가 살인진드기에 물린 것이다.

 

뭐에 집착하면 끝을 보는 아내의 성질머리가 자초한 일이다. K는 진작부터 아내한테살인진드기를 경고했다. TV에서살인진드기에 물려 사망한 농부뉴스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보. 이제 그만 풀 뽑아. 밭에 난 풀도 아니고 밭 가장자리에 난 풀을 뭐하러 뽑는 거야. 그러다가, 풀에 있는 살인진드기에 물리면 큰일 난다고!”

당신도 참. 이 풀들이 기승을 부려 밭의 작물들까지 넘보려하는데 어떻게 내버려 두냐고? 그리고 내가 긴소매남방 차림에 장화 신고 면장갑까지 꼈는데 무슨 진드기 걱정이야?”

아내는 그러면서 쉬지도 않고 밭 가장자리의 풀들을 뽑았다. 하는 수 없이, 그런 아내를 따라 함께 풀을 뽑아야 하지만 K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혈압 환자라 땡볕에 혈압이 오를까 겁나는 데다가, 아무래도 무성한 풀숲에 살인진드기가 틀림없이 있을 거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어정거리고 서 있는 남편의 처지를 아내가 파악하고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당신은 그냥 나무 그늘에서 쉬어요.”

얼마나 고마운 아내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한 마디가 K를 분노케 했다.

겁은 많아서.”

, 어쩌고 저째?!’K는 빽 소리 지르려다가 참았다. 노후로 접어들면서 아내 부아를 돋우었다가는 후유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우선 밥상에 오르는 반찬들부터 한심한 상태가 된다. ‘참자.’마음먹으며 K는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풀 뽑는 아내를 다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랬는데 사흘 후 아내는 결국 살인진드기에 물리고 만 거다.

 

그 놈이 아내의 등 한복판에서 발견되기는, 밭에서 집으로 돌아온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K보다 먼저 땀에 젖은 몸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얼마 안 돼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와, 화장지로 잡은 무언가를 내보이며 이랬다.

여보, 이거 아무래도 진드기 같아. 당신이 확인해 줘.”

K는 떨리는 가슴으로 돋보기안경을 찾아 쓴 뒤, 아내가 건넨 화장지로 잡은 무엇을 살폈다. 둥글고 납작한 몸체에 좌우 네 개씩 도합 여덟 개의 작은 발들. 진드기가 맞았다. 좁쌀 두 배쯤 되는 크기로 납작하게 죽어 있었다. 아내가 샤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으로 서서 말했다.

몸을 물에 씻는데 등 한가운데에 뭔가 붙어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손을 뒤로 해서 화장지로 그것을 훔쳤더니만

당신 등 좀 봐야겠다.”

과연 아내 등허리에 좁쌀만 한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그 놈이 피를 빨다가 만 자국이었다.

어때? 여기가 아프거나 가렵거나 해?”

잘 모르겠어.”

K는 즉시 스마트폰으로 살인진드기를 검색했다. 그 결과 몇 가지를 알았다.

첫째, ‘살인진드기란 중증 열성 혈소판 증후군(SFTS)이란 바이러스를 보유한 진드기다. 이런 진드기는 0.4%, 1000 마리 당 4 마리 정도이다.

둘째, 살인진드기에 피가 빨리는 과정에서 SFTS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1주에서 2주의 잠복기를 거쳐 발열이나, 구토, 설사, 복통, 피로감, 림프샘 부기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주로 노약자가 당한다.

셋째, 치료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K는 인터넷 검색 결과를 요약해서 아내한테 전하며 말했다.

살인진드기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데다가 주로 노약자가 당한다니까 큰 걱정은 안 되는데어떡할까?”

그 뜻은 이제라도 병원에 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일과시간이 지났으므로 개인병원은 안 될 것 같고 종합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치료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응급실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응급실 담당은 경험이 일천한 인턴의사가 대부분이라는데 괜히 엉뚱한 응급조치를 할지도 모른다. 2차 의료사고라는 게 나는 거다. K는 짧은 순간이지만 머릿속으로 길고 복잡한 생각들에 휘말렸다. 그런데 아내가 다행히도 남편의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한 마디로 처리해주었다.

괜찮을 것 같아.”

하긴 환갑 나이가 된 아내이지만 건강에 관한 한 문제가 없는 탄탄한 신체의 소유자다. 소화불량이 잦은 데다 고혈압 환자인 남편보다 훨씬 건강하다. K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치료제도 아직 없다니 일단 지켜보자고. 물론 별일이야 없겠지만 말이야.”

무더운 날씨라 부부는 각방을 쓴다. 아내 혼자 안방에서 자고 K는 거실에서 잔다. 그 날 밤 K는 거실 이부자리에 누워만일 아내가 잘못되면이란 불길한 가정 아래 이 생각 저 생각에 엎치락뒤치락거렸다. ‘며느리가 손주를 낳으면 밭농사는 나한테 맡기고 자기는 손주 보는 일로 노후를 보내겠다 했는데’‘아들은 장가가 살지만,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딸애는 아직 시집가지 못했는데’‘그나저나 당장 빨래며 밥상 차리는 일은 어떡하지?’

그러다가 K는 황당해졌다. 아내가 자는 안방 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드르렁 드르르렁, 드렁드렁 드르렁!”

 

한 달이 지났다.

뭔가에 집착하면 끝을 보는 아내의 성질머리라니. 500평 밭 가의 그 무성한 풀들을 모조리 뽑아놓고야 만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풀을 뽑아서 맨흙이 드러난 자리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화초들을 심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시사철 꽃들이 피는 아름다운 농장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실천이다.

여보!”

아내가 화초를 심다 말고 K를 불렀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K는 응답 대신 아내를 바라보았다. 따가운 땡볕 아래 아내가 오른손에는 호미를, 왼손에는 화초를 든 채 이어서 말했다. 정확히는 명령했다.

당신도 같이 화초를 심어야겠어. 오늘 중으로 심어야 화초가 살거든.”

K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혈압 환자인 거 잊었어? 땡볕이라 안 돼!”

차 트렁크에 내 양산 하나 있어. 그거 쓰고 일해!”

K는 순간 속으로살인진드기들이 저런 악녀를 놔두고 뭐하는 거야?’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아니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아암 그렇고말고.’반성하며 주차돼 있는 밭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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