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선생은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부지런히, 얇은 스웨터를 걸친 뒤 주방에 있는 아내한테 갔다.
“여보. 오늘 내가 차를 쓸 일이 있어.”
“당신도 참, 오늘 수요일은 내가 성당 교우 분들을 차로 모시고 봉사활동 가는 날이잖아요.”
“차가 있는 다른 신자 분을 찾든지 아니면 택시 타고 다니든지 그래.”
김 선생이 교직을 퇴직한 지 3년여, ‘웬만하면 걸어 다니며 노년의 건강을 지키기’로 하면서 그동안 차는 성당 다니는 아내의 독차지였다. 다시 반격에 나선 아내.
“당신이야말로 택시를 타면 되잖아요.”
“몇 백 리, 장거리를 가야 하는데?”
“그럼, 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요?”
“아니야. 이번에는 반드시 자가용차를 몰고 가야 해. 자세한 것은 저녁 때 돌아와서 말해줄게.”
“대체, 어디를 가는 거에요?”
“갔다 와서 말한다니까!”
김 선생은 부리나케 현관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섰다. 솔직히, 중요하거나 시급한 일로 자가용차를 몰고 가는 게 아니라서 계속 대화를 이었다가는 책잡힐 우려가 컸다.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차를 몰고 아파트 구내를 벗어나면서 김 선생은 잊지 못할 그 주소를 뇌까려 보았다. 그날 밤 사건이 벌어진 외갓집 동네의 주소다.
교통 정체가 심한 춘천 시가지를 벗어나자 바로 널찍한 중앙고속도로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만 하다.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지금과 달리, 40여 년 전 외갓집 가는 길은 힘겨운 고생길이었다. 시외버스니, 완행버스니 하는 대중교통수단을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데다가 하루 종일 걸렸다. 시가지 같은 경우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면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비포장 ‘신작로’일 뿐이었다. 신작로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좁을 뿐만 아니라 굽이마저 잦아서 어린 학생이던 그는 차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 안 바닥에 토할 위기를 모면한 것은, 그나마 버스가 자주 정차한 덕분이었다. ‘공용 터미널’이나 ‘종합교통 영업소’란 데에 정차할 때마다 급히 구내 화장실을 찾아 ‘와아악!’ 토해 버리던 추억, 아니 기억이 그에게 있다.
지금은 얼마나 좋은 찻길인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로 가다가 제천쯤에서부터 국도로 가는 건데 이제는 왕복 2차선 국도조차 굽이도 거의 없을뿐더러 아스팔트로 다 포장돼 있을 게다. 혹 멀미라도 나면 도로 변 휴게소를 찾으면 되고, 걸리는 시간도 하루 종일이 아니라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듯싶다. 자가용차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다. 이런 맛을 보려고 오늘 자가용을 고집한 것이다. 아무렴, 40여 년 간 발길을 끊었던 그날 밤 사건 현장을 찾아가는데 최소한 자가용차는 몰고 가야 되지 않겠나.
40여 년, 정확히는 45년이다. 오래도 발길을 끊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한 숙제 하나를 남겨놓고 눈 감게 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지도가 선하게 떠올랐다. 45 년 전의 공간이 확인된 셈인데 그렇다면 ‘그 날 밤 사건의 공간은 그대로 남고 시간만 엄청 흐른 거’라 말할 수 있을까?
그 해 1968년은, 나중에 알았지만, 거국적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2년 전이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혼자’ 충청북도 외갓집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부모님은 여름방학만 되면 오남매의 장남인 그와 장녀인 누나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충청북도 외갓집에 보냈다. 방학 중 시골 외갓집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며 무언가 배우고 오라는, 고상한 교육 차원의 배려가 아니었다. 두 달 터울인 그와 누나가 툭하면 비좁은 방구석에서 말다툼을 벌이니 그게 지겨워 ‘하나라도 딴 데로 보내자’는 격리 차원이었다.
그 시절 춘천 지방은 겨울에는 춥기로, 여름에는 무덥기로 전국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집에서 일곱 식구가 그 무더운 여름을 조금이라도 덜 짜증나게 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게다. 방이 둘 뿐인 그 집조차 독채 전세로 얻은 남의 집이었으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힌다.
비만 오면 진창바닥인 춘천 교통 여객 영업소에서 우선, 원주로 가는 시외버스표를 끊으며 그의 외갓집 여행은 시작되었다. 짐이라고 해야 책가방에 챙긴 ‘AW메들리 영어 참고서’ , 영어사전, 그리고 양치도구 정도였다. 갈아입을 속옷 같은 것은 외삼촌 것을 입으면 되니 별 걱정이 없었다.
방학 한 달을 외갓집에서 보낸다 해도 달라질 게 없는 그의 생활이었다. 집에서 하던 영어 공부를 외갓집에서도 변함없이 잇는 것이다. 특히 ‘당수 수련’도 계속했다. 태권도를 그 시절에는 ‘당수’라 했다. 그가 당수를 독학하게 되면서 결국 그날 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그는 당수를 독학 하던 45 년 전 추억에 잠기며 운전한다.
그 시절 그가 사는 집은 춘천 봉의산 바로 아래 달동네였다.
어느 날 달동네에 당수 도장이 문을 열었다. 방치된 폐건물을 활용한 도장에서 30대 중반 나이로 보이는 사범이 저녁마다 당수를 가르쳤다. 수련생은 열 명이 채 안 됐는데 홍보 효과를 노렸는지 도장 창문을 모두 열어놓아, 외부 사람들이 당수 수련 모습을 밖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 외부 사람들 틈에 그가 있었다. 사범이 하늘을 날 것처럼 ‘공중으로 겅중 뜀과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려 발차기하는’ 2단 옆차기라든가, 정권 치기라 하여 주먹을 단단히 쥐고서 온 힘을 다하여 두꺼운 송판을 격파하는 동작은 언제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그는 당수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입회비를 마련해야 했다.
간판도 달지 못한 데다가, 벽의 흙이 드러나도 회칠 하나 못한 당수 도장이니 입회비가 비쌀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입회비 얘기를 부모님한테 꺼낼 수가 없었다. 실직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시내의 식당 두 군데를 다니면서 가족들 생계를 해결하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당수를 독학하기로 했다. 도장 창 밖에서 눈여겨본 당수 동작들을 집에 와 복습하는 형태다. 늦은 밤 시간에 집 뒤란으로 혼자 나와 30여 분씩 당수 동작들을 재연하는 것이다. 어두운 데에서 남몰래 하는 짓이었지만 식구들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시내 다방에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사업을 구상하다가 귀가한 아버지 눈에 뜨인 게 그 첫 번째였다.
“너 지금 뭐하냐?”
어둠 속에서 겅중겅중 뛰는 웬 사람에 기겁했다가, 조심스레 살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아들이라는 게 확인되자 안심하면서 던지는 첫 질문이다.
사실, 아버지보다 더 놀란 그였다. 2단 옆차기를 하려다가 아버지의 등장에 놀라 발목을 접질리고 만 것이다. 그는 몹시 아픈 발목을 참고서,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학교 오갈 때, 깡패새끼들이 많아서, 그래서 혼자, 당수 연습하고 있어요.”
그러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헛 참, 녀석도!’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버지. 돌이켜보면 참 가난한 부자지간이었다.
그는 지금 운전 중인데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액셀러레이터 밟는 것을 잠시 잊었다. 차가 제 속도를 잃고 느려지자 뒤따르던 차들이 빠바방! 경적을 요란하게 내며 추월해 간다.
‘참, 내가 운전하고 있었지’
그는 기겁해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으며 제 속도를 찾았다.
얼결에 한 대답이지만 그 무렵의 춘천에는 정말 ‘깡패새끼들’이 많았다. 시내 지역을 반 가까이 점한 거대한 넓이의 미군부대를 위시해 공병부대니 군단사령부니, 한국군의 여러 부대들까지 포진한 ‘군사도시’라서 그럴까? 미군들을 상대하는 양공주 촌에다가 일반인들 상대의 사창가까지 시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가운데 그에 빌붙어 먹고 사는 기둥서방이라 할, 눈매 사나운 깡패들이 많았다.
그런 시내 분위기에 편승해, 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애들이 잭나이프 같은 흉기를 갖고 다니며 골목 같은 후미진 장소에서 또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품 갈취하는 일도 잦았다.
그는 그런 범죄의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등하교를 할 때 항상 주의해서 큰 길로 다녔기 때문이다. 막 되먹은 깡패들이라 해도 큰 길에서까지 못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치안은 최소한 유지되던 춘천이라 할까.
여하튼 그 날 밤 얼결에 아버지한테 그런 대답을 한 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깡패새끼들을 만나면 멋지게 해치우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난데없이 생겨나 더욱 열심히 매일 밤 당수를 독학했다. 그러던 중에 1968년 여름방학을 맞아,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사는 충청도 외갓집으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그의 차는 홍천 외곽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쌀쌀한 바깥 날씨임에도 차 안은 덥다. 늦가을, 따가운 햇살 때문이다. 그는 버튼을 눌러 조수석 쪽 창을 반쯤 내렸다. 싸늘한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면서 덥던 실내가 얼마 안 가 완화되었다.
춘천 집의 좁은 뒤란에서 당수를 수련하기는 편치 않았다. 특히 2단 옆차기처럼 일정 거리를 날아야 할 때는 담벼락과 집채 사이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동작해야 했다.
외갓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뒷동산에, 큰 나무들 사이로 제법 널찍한 풀밭이 있어서 그곳을 도장 삼아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자란 굵은 소나무를 하나 택해 새끼줄로 둘둘 감아놓으니 정권 치기나 손바닥을 날 세운 수도 치기를 연습하기도 제격이었다. 물론 싸움 상대의 머리 부분쯤이라 여기고서 발차기 하기도 좋았다.
시간을 늘려, 하루에 한 시간씩 뒷동산에서 당수 수련도 하고, ‘이번 방학 동안에 나머지 반을 다 떼자’는 결심으로 챙겨온 두꺼운 ‘AW메들리’영어 참고서도 다섯 페이지씩 진도를 나가고, 정말, 오랜만에 알차게 보내는 여름방학 같았다.
만일 춘천 집에 있었더라면 5남매가 함께 쓰던 그 좁은 방에서 누나나 동생들에 부대껴 영어 공부는커녕 뒤란에서 하는 당수 수련도 여의치 않았을 게다. 바로 밑에 동생 녀석이 형을 따라 자기도 당수 하겠다며 한참 성가시게 굴던 참이었으니까. 춘천 집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방학 한 달간이라도 외가로 놀러오기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작은 동산이지만 제법 많은 나무들에다가, 수풀도 우거져 그의 당수 독학 광경은 웬만해서는 사람들 눈에 뜨일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동네 아이 눈에 뜨이고 말았는데 결국 ‘그날 밤 사건’의 태동(胎動)이라 할 만하다.
그 아이는 소 먹일 꼴 베러 산에 올랐다가 난데없는 당수 수련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같은 또래라 동네 길에서 마주치면 눈짓인사는 나누던 사이였다.
“야아, 대단하구나야!”
그 아이는 감탄하며 서 있었다. 앞발차기 동작을 하던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계속했는데, 언젠가는 동네 사람들 눈에 띌 거라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서너 번 더, 소나무에 새끼줄을 감아놓은 눈높이 위치를 겨냥해 앞발차기를 연습한 뒤 그는 비로소 그 아이를 제대로 보며 말했다.
“왔어?”
그런 뒤 다시 몸을 움직여 2단 옆차기를 실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당수 동작 중 가장 멋진 동작에, 그 아이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같은 동작을 네 번이나 하자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가 소맷자락으로 목덜미의 땀부터 닦을 때 그 아이가 감탄의 표정이 여전한 채 물었다.
“니가 지금 한 게, 그 뭐야, 당수? 그런 기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구까지 술술 지어내고 말았다.
“내가 도장에서 당수 배운 지 1년이 넘었어. 1단이지. 뭐, 여기 시골에서는 잘 모를 테지만 춘천 바닥에는 깡패새끼들이 득실거리거든. 그래서 그 새끼들이 돈을 달라고 까불면, 까짓 거, 내가 당수로 콱 조지는 거지. 몇 놈 잘 조졌지, 지금까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방학 때도 늘 당수를 연마해 두어야 해.”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에 이미 소설가 기질을 보였던 게 아닐까? 환갑 가까운 나이에 모 문학지에 소설 두 편을 발표하는 둥, 뒤늦게 소설가의 면모를 갖춰 가고 있다.
아내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구한다는 전도차원에서 성당에 데려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당신, 내가 그리도 한가해 보여? 나, 요즈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머릿속이 여간 바쁜 게 아냐!’하는 말로써 사절한다. 그런 뒤 속으로 ‘정말,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지 않았더라면 애먹을 뻔했다.’고 안심한다. 성당이 싫은 게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게,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는 거다. 교직에 재직할 때에도 그는 강습이라든지 교장의 특별 훈화같이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을 아주 못 견뎌했다. 그 때문일까, 승진과는 거리가 먼 평교사로 퇴직하고 말았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한창 자랄 때 그 좁은 방 한 칸에서 누나나 형제들과 함께 지내느라 몹시 힘들었던 경험이 역력하게 남아서 빚어진 일들이 아닐까?
지금 차는 홍천과 횡성 사이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삼마치재 터널이다.
산에서 당수를 연습하다가 동네 아이한테 목격된 다음 날 밤이다.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운 그 밤에 동네의 또래 애들 대여섯이 그를 찾아 왔다. 늘 열려 있는 사립문이니 그냥 마당 한복판으로 들어와, 방안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를 부른 것이다.
“보옹길아! 보옹길아!”
봉길(鳳吉)이란 다소 촌스런 이름은 그의 아명인데 춘천 집과 여기 충청도 외가에서 쓰이고 있다. 물론 친척 어른들도 그리 부른다. 족보의 항렬을 따라 점잖게 지은 ‘준연(俊淵)’이란 호적상의 이름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공간에서 쓰인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보던 만화책을 놓고 일어나려는데 외할머니가 먼저 방문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우리 봉길이는 왜 찾냐?”
집단으로 위해하려는가 싶어 카랑카랑하게 묻는 말이다. 그러자 동네 애들 중 어제 낮의 그 아이가 방에서 새나오는 백열등 불빛에 제 모습을 드러내며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물고기 잡으러 같이 가려구야.”
“우리 봉길이는…… 공부해야 되는데?”
그런 할머니가 민망스럽게도 그가 실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할머니. 공부는 낮에 다 했어. 쟤네들을 따라가서 물고기 잡는 것 좀 구경하다가 올게.”
그러잖아도 그는 외삼촌의 헌 만화책이나 들척이며 밤 시간을 보내느라 따분했다.
개구리들이 사방에서 와글와글 시끄런 논두렁길.
한 아이가 ‘막대 끝에 낡은 천을 감아 만든 횃불’을 쳐들어 앞길을 밝히는 가운데 동네 애들과 그는 행렬을 이루어 강으로 향했다. 어제 낮의 그 아이가 ‘이제 강가에 가면 봉길이가 당수를 보여줄 테니까 잘들 보라구야!’ 연실 떠들었다.
몇 년째 여름방학 때마다 보는 얼굴들이지만 함께 어울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 날 밤은 ‘신고식’이 치러지는 순간이었다. ‘당수 한 번 제대로 보여주자’는 생각에 그의 손아귀에 땀이 배었다.
강물이 강바닥의 자갈들에 부딪히며 흐르는 ‘절절절’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강가에 도착했다.
횃불이 짙은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며 만들어낸 일정 부분의 모래밭 공간. 한복판에 그가 대련 자세로 서고, 동네 애들은 넉넉한 거리로 삥 둘러앉았다. 그는 마침내 ‘야압!’ 기합소리를 내며 2단 옆차기를 시연했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이라 동작하기가 불편했지만 혼신을 다 해 멋지게 해냈다.
“와하!”
동네 애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쭐해진 그는 한 번 더 2단 옆차기를 해 보이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다른 동작들도 있지만, 이쯤 할게. 다음에 기회가, 다시 있을 때, 그 때 보여줄게.”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한테 당수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
생각지도 못한 부담스런 요청이다. 그의 당수라는 게 너덧 가지 동작에 불과할 뿐더러 그조차도 창 너머로 익힌 독학이다.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다른 아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이런 새끼 같으니라고. 당수 같은 무술은 훤한 낮에 배워야 할 텐데 우리가 낮에 언제 그럴 시간이 있냐? 밭의 김도 매고 논의 피도 뽑고 소 먹일 꼴도 베고 돼지거름도 치고…… 종일 일하다 보면 금방 어두운데 언제 당수를 배워?”
또 다른 아이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 강에 와서 뭐하는 기야? 빨리 물고기나 잡자고야.”
강이라고는 하나 깊어야 무릎까지 물이 닿는 정도다. 춘천의 소양강에 비하면 강이 아니라 하천이라 불러야 했다. 어쨌든 그는 동네 아이들을 따라 무릎 위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물로 들어갔다. 물고기 잡기가 시작된 거다. 횃불을 든 아이가 천천히 나아가는 뒤로 따라들 가면서, 눈에 뜨이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방식이다. 미꾸라지 꺽지 퉁가리가 느닷없이 어둠 속에 등장한 환한 불빛에 놀라, 마치 강바닥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있었다. 흐르는 물살 아래 그러고 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조용히 접근해 움켜쥐면 되었다. 잡는 대로, 한 아이가 든 주전자에 담으며 강바닥을 누볐다.
횃불이 사그라질 즈음에 물고기 잡기를 마치고 강가로 나왔다. 모닥불에 삥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노는 일이 이어졌다. 주전자에 든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꺼내 밸을 따 날로 먹고는 소주를 마시는 거다. 그는, 불에 구운 것도 아니고 날로 먹는 물고기라 망설였지만 결국은 입안에 넣어 억지로 ‘으직으직’ 씹어 먹고 말았다. 혼자 예외가 되기 어려운, 전체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고소한 물고기 맛이라니! 그 다음, 옆의 아이가 건네는 술병을 받아 ‘병나발’을 한 모금 정도 불었더니 이내 취기가 올랐다. 애들이 준비해 온 소주가 댓병으로 다섯 개나 되었다. 취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부르는 유행가.
‘사아나이 가아슴에도 눈무울은 있다아. 이이렇게 정을 주우우고 떠어나……’ ‘다앙신과 나아 사이에에 즈어 바다가 읎었다아면 쓰으라린 이벼얼은……’ ‘삼각찌이 로오타리에 궂은비는 오오느은데……’
나중에는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내놓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씩 꺼내 피워 물자 밤하늘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허연 담배연기들.
사실, 그는 지난 봄 학교 소풍 때 반 친구가 가방에 숨겨 갖고 온 미제 캔 맥주를 하나 마셔 본 게 음주 경험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놓고 독한 소주를 연실 마시고 취하기까지 하다니. 어디 그뿐인가, 담배를 피워 보기도 처음이었다. 들이켜 본 담배연기가 매캐해서 눈물 콧물이 다 났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담배 한 대씩 피워 물고 노는 질펀한 자리에서 혼자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스스로 ‘깡패들 많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딴 무술 유단자’로 포장해 놓았으니, 시골 아이들이 다 하는 술 담배 따위에 쩔쩔 매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터.
술자리가 파할 즈음에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게 만취했다. 전 날 산에서 만난 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외갓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변명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 씨발, 몇 달 만에 술 좀 마셨더니 감당이 안 되네. 씨발.”
춘천이라면 통금 사이렌이 늑대처럼 으허어헝 하고 울었을 늦은 밤인데 충청도 시골에서는 그저 논 개구리들 울음소리만 성할 뿐이었다.
“아이고, 이 놈이 꼭 용석이가 방학 때마다 하던 짓을 고대로 하네!”
집 마당까지 부축해 준 아이는 슬그머니 달아났고 그가 혼자 비틀비틀 토단에 올라설 때, 방문 열고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속상해 내뱉은 말씀이다.
‘용석’이란 그의 하나뿐인 외삼촌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닌다는데, 학창 시절에 방학만 되면 집에 내려와서 외할머니 속깨나 썩혔다던가 했다. 100여 리 떨어진 충주 시내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니, 용석이 외삼촌도 고향 마을의 또래들 중에서는 유일한 고등학생이 아니었을까? 춘천에서 온 봉길이 조카처럼 말이다. 그가 희망리 마을 애들의 두목처럼 행세하게 된 것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땄다’는 위세도 한몫했겠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고등학생 신분이었다는 게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시골 애들은 집에서 일꾼처럼 지내는 자신과 다르게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신분의 또래를 선망했다.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이래저래 그는 ‘그 날 밤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었다.
새삼 놀라운 사실은 시골 동네 애들이 술 담배에 아주 능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하는 경험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사실상 어른 세계에 진입한 애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옆 동네의 여자애와 가끔씩 ‘그 짓’을 한다고도 했다. 동네의 담뱃잎건조장이 그런 장소로 쓰인다나. 손으로 하는 수음이 고작인 그로서는, 그 얘기를 듣던 순간 열패감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춘천에 있는 양공주 촌에 가면 말이야’ 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사실은 자기도 주워들었던 음담을 질펀하게 늘어놓으며 괜한 허풍을 떨었다. 그러면서 가슴 한 편으로는 영 편치 않은 양심이었다.
시골 애들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인물처럼 이중성을 가졌던 게 아닐까도 싶지만, 그건 아니었다.
술 담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종일 고된 농사일을 하다가 밤이 되어야 가까스로 쉬는 그 애들한테 딱히 무슨 낙이 있었을까. 동네에서 외진 데로 나가 술 담배로 낙을 삼을 수밖에. 텔레비전도 없고 기껏해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배우는 게 유행의 첨단을 따라가는 거라 여기며 살았을 그 시절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에서야. 하긴, 춘천 같은 도시에서도 텔레비전은 잘 사는 집에나 있는 고가품이었다.
옆 동네의 여자애와 가끔씩 몰래 그 짓을 한다는 애의 경우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질서에 용인되지 않을 뿐이지, 딱히 나쁜 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강간이나 간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혹 여자 애가 임신하는 일이 발생하면 얼마 후에는 마을회관에서 결혼식이 치러지고 한 쌍의 농사꾼 부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담뱃잎건조장 같은 은밀한 곳에서 그 아이가 ‘남몰래’ 그러면서 지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의 시골 애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해 보지만, 솔직히, 평온한 시골 풍경 속의 애들은 뜻밖에도 까부라진 애들이었고 반대로 ‘깡패들도 널려 있는 대단한 도시 춘천’에서 내려온 그 자신은 실상은 순박한 고등학생이었을 거라는 기묘한 의구심을 어쩔 수 없다. 수음하는 게 고작인 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소주니 담배니 모두 그 시골동네에서 처음 경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춘천 시내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고등학교와 봉의산 바로 아래 달동네에 있는 그의 집 사이의 거리가 십 리 가까이 되었다. 십 리 되는 거리를 매일같이 걸어서 등하교를 하느라 경황이 없는데 언제 술 담배를 배우고 유행가까지 배울 텐가.
아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조합이었다. ‘충청도 시골의 까부라진 애들과 춘천에서 온 순박한 봉길이’가 함께 어울리는 1968년 한여름의 조합 말이다.
‘남원주 휴게소’ 간판이 보인다. 그는 차의 속도를 바짝 낮추어 휴게소 내 광장으로 진입했다. 주차돼 있는 차들이 많지 않다. 평일이기도 하지만 재작년, 원주에 사는 처남 집에 가다가 잠깐 들렀을 때에도 주차된 차들이 별로 없었다. 편히 쉬고 갈 만하다.
화장실에 들른 뒤 휴게실 앞 빈 벤치에 앉았다. 춘천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 시간 남짓해 음성군 운포면에 닿지 않을까?
한창 젊었을 때에 여행길에 나섰다면, 보통 서너 시간은 운전대를 잡고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쉬었다. 이제는 그러기 힘들다. 오줌을 참기도 어렵거니와 몸도 힘들어서 한 시간 정도 운전하면 피로하다. 여기서 10여 분 쉬고 가자. 인근 산의 빛깔도 이미 단풍 빛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초겨울로 들어서려는 늦가을이다. 용석이 삼촌도 세상을 떴다. 3년 전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는 20년 가까이 된다.
동네 애들과 밤에 강가에서 어울린 날을 계기로 순식간에 친해졌다. 이제는 이틀에 하루 꼴로 밤에 만나 늦도록 어울리는 것이다.
‘어울리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다. 우선은, 반드시 저녁밥을 먹고 난 밤 시간에 한했다. ‘AW메들리 참고서를 다섯 페이지 떼고, 당수 수련을 한 시간쯤 하고나면 닭장 청소 같은 소소한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와 달리, 동네 애들은 해만 뜨면 잠시도 쉴 새 없이 집안농사일을 돕다가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자식을 낳으면 초등학교까지만 가르치고 그 후로는 ‘집안농사일을 거들게 하다가 장가나 보내면 된다’는 게 당시 농촌 부모들의 생각 같았다.
두 번째 룰은, 모여서 놀 때는 반드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동네 어르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달동네도 있고 깡패들도 널려 있는 도시 춘천과 달리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는 전형적인, 조용한 농촌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서너 채의 기와집 외에는 초가집들이 대부분인 고즈넉한 풍경으로서 전통적인 유교적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젊은 놈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떠들썩하게 노는 모습’을 동네 어르신들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는 단순히 ‘춘천에서 내려온 봉길이’가 아니라 ‘남다른 당수 실력까지 갖추고서 춘천에서 내려온 고등학생 봉길이’로서, 이틀에 하루 꼴로 밤마다 동네 애들과 무리지어 강가로, 먼 동네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게 된 것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동네 애들이 시오 리 떨어진 먼 동네까지 원정 다녀오는 일은, 그와 어울리면서부터였다. 전에는 동네에 있는 강가에서 놀다 오는 게 고작이었는데 ‘대단한 봉길이’와 어울리게 되자 그 후로는 원정도 다니며 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원정지는 운포면의 면소재지 동네였다. 희망리에서 신작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시오 리 걸어가면 나타나는 면 소재지 동네. 작은 규모이지만 우체국도 있고 약방이니 철물점이니 줄지어 있어서, 나름대로 시가지였다. 그래서일까, 희망리 애들보다 확실히 눈매 사나운 또래 애들이 어슬렁거리며 텃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희망리 애들은 어쩌다, 닷새에 한 번 면소재지 장거리에서 열리는 장날에 가도 눈을 아래로 깔고 조심스레 다녔단다.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깡패들이 널린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따고 온 고등학생 봉길이’가 자기들과 함께 있으니!
밤이 되면 봉길이를 앞세워 ‘흙먼지 날리고 자갈들도 많은 신작로’를 시오 리나 걸어가 면소재지 동네를 괜히 한 바퀴 돈 뒤,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담배도 사고는 다시 희망리로 귀가하는 것이다. 귀가할 때도 조용하지 않았다. 신작로를 독차지한 듯 무리지어 걸어오면서 소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유행가도 고래고래 불렀다.
그러다가 한 작은 사건이 있었다. 이 작은 사건이 ‘그날 밤 사건’의 도화선이다. 취해서들 희망리로 돌아오다가 나지막한 고개에 다다랐을 때, 한 아이가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봉길아. 우리는 길가 숲에 숨어 있을 테니까, 니가 당수로 한 번, 고개를 넘어오는 놈을 아무나 한 놈 잡아 솜씨 좀 보여주라야.”
그런 부탁이 나올 만했다. 그 날 밤까지 몇 번이나 면소재지 동네를 휘젓다가 왔으나 특별한 사건도 없었던 데다가, 오랜만에 봉길이의 당수 실력을 다시 보고도 싶었다. 모처럼의 부탁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작로 변에 폼 잡고 서서 고개 너머에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물론 동네 애들은 근처 숲속에 숨었다. 달빛이 제법 훤하게 살아난 밤이다.
처음 강가에서 신고식을 치르던 날 밤은 달빛 하나 없던 그믐밤이었지만 이 날 밤은 열흘 정도 지나 달빛이 어지간히 살아난 상현달 밤이었다. 팔자걸음으로 고개 너머에서 나타난 사내가, 그가 난데없이 앞길을 가로막으며 멱살을 쥐자 ‘헉!’ 하며 기겁한 표정이 달빛에 역력하게 드러난 건 그 때문이다.
“야, 이 새끼야! 너, 춘천에서 온 봉길이 알아?”
“아, 아뇨!.”
“이런 씨발 놈이!”
사실 말도 안 되는 시비 걸기다. 그는 놀라 와들와들 떠는 사내의 멱살을 풀어주는가 싶다가 순간 오른발로 후려차기를 강행했다. 세찬 발길에 상체를 맞고는 그대로 나갔다떨어지는 사내.
“아이구야, 사람 살려라!”
엉금엉금 기다 일어나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얼마나 다급한지, 신었던 흰 고무신들까지 벗겨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10분 넘게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빛은 화창하지만 그늘진 곳은 한기가 역력하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차로 갔다.
그 새 뜨겁게 달궈진 차 안의 공기. 다시 조수석 옆 창을 열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이런, 창이 내려오다가 멈췄다.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버튼을 눌러도 별 변화가 없다.
‘젠장!’
천생, 나중에 춘천 가서 아는 카센터에 맡겨야 할 듯싶다. 이런 잔 고장이 처음은 아니다. 이 차를 구입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는 하는 수 없이 조수석 쪽 창이 반쯤 내려진 채로 주차장을 떠났다. 여기 남원주 휴게소에서 제천까지는 30분 정도 걸릴 듯싶다.
고개 너머에서 한 사내를 보기 좋게 후려차기로 해 치운 사건 후로 그는 마치, 몇 십 년 뒤 TV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처럼 되고 말았다. 괜히 사나운 눈매로,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무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우두머리 모습이랄까.
희망리 애들과 그는 무리지어 신작로 시오 리를 걸어 면소재지 동네에 일단, 도착한다. 어깨에 힘들 주고서 짧은 시가지를 두어 번 돌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구멍가게에 들러 소주와 담배를 산 뒤 다시 희망리를 향해 신작로 길을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다. 물론 모두 소주에 취해 유행가도 부르고 담배도 피우면서 나름대로 향락을 즐긴다.
춘천이었다면 통금에 걸려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을 밤늦은 시간대였다. 하지만 다행히 충청북도에는 통금이 없었다. 정부에서 제주도와 함께 통금이 없는 지역으로 공포한 덕분이었다. 섬나라인 제주도처럼 충청북도도 치안유지가 잘 되는 순박한 사람들의 지역이라고 정부에서 판단한 걸까.
그가 춘천에 있었더라면 늑대처럼 ‘으허허어엉!’ 음산하게 우는 통금 사이렌 소리에 쫓겼을 텐데 그럴 일 없는 충청북도라니, 얼마나 여유로운 밤 시간인가. 그를 우두머리로 한 희망리 애들의 밤 시간 즐기기가 날로 성해진 건 그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 ‘춘천에서 당수 배운 봉길이란 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일대에 확 퍼진 듯싶다. 워낙 좁고 평온한 시골바닥이기에 소문이 도는 건 순식간이다. 그 결과 그에게 업보처럼 위기가 다가왔다.
그가 어언 45년 간 충청북도 외가 쪽 동네와 인연이라도 끊듯이 발길을 끊게 된 직접적 원인으로서 ‘그날 밤 사건’이 다가왔다. 면소재지 동네에서 청주의 모 고등학교로 유학 간 녀석이 있는데 방학이라 집에 왔다가 ‘춘천에서 온, 당수 배운 봉길이’ 소문을 듣게 된 게 ‘그날 밤 사건’의 시발점이다. 공교롭게도 녀석은 청주 시내에 있는 당수 도장에서 2단을 딴, 제대로 된 당수 유단자였다.
“뭐, 춘천에서 당수를 배운 봉길이란 놈이 툭하면 밤에 여기까지 와 설치다가 간다고? 어디 그럼, 내가 한 번 손봐줄까?”
그런 말을 녀석이 면소재지 친구들한테 내뱉더니 다음 날에는 조금 말이 달라졌단다.
“이런 기회에 춘천 당수와 청주 당수가 어느 쪽인 더 센지, 대련 한 번 정식으로 붙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청주 녀석의 두 번째 발언을 그는 분석해 봤다. 녀석도 마음 한 편으로는 불안한 구석이 있다는 게 아닐까? 뒤늦게, ‘춘천이 깡패들 많은 군사도시라는데 거기서 온 봉길이라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했다. 더구나 부근 신작로 고개에서 ‘춘천에서 온 봉길이한테 봉변을 당했다’는 사람의 소문까지 들었을 테니. 녀석이 고심 끝에, 부담스런 막싸움 형태보다 무술인들의 반듯한 대결 형태로 승부 짓는 게 낫겠다며 신중한 도전장을 보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