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필로그
사람은 어떨 때 공포를 느낄까? 혼자 있는데 부스럭 소리가 날 때? 조폭처럼 보이는 사람이 쫓아올 때? 자이로드롭을 타고 낙하할 때? 앞의 두 개가 자신의 신변이 위협당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기인한 것이라면, 세 번째 공포는 자신의 안전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다른 말로 하면 짜릿함을 주는 공포다. 영화의 공포도 이와 비슷한데,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는 것도 바로 그 공포 속의 짜릿함을 느끼고자 함이 아니겠는가(영화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면 아무도 그 영화를 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2. 본문
프랑스에서 만든 공포영화 9편을 용산CGV에서 봤다. 그걸 보면서 공포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제부터는 몽땅 스포일러다.
1편: 공포의 한가지 방법은 아이들이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거다. <나비효과>에서 칼을 든 아이가 무서운 것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이미지에 살인의 도구인 칼이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강력히 내기 때문이다. 1편의 줄거리는 이렇다. 차 타고 부부가 가는데, 차 한 대가 고장나서 서있는 걸 발견한다. 운전자와 그 옆의 여자는 죽어 있고, 뒷좌석에는 아이 하나가 떨고 있다. 부부는 아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길을 가는데, 아이가 입에 칼을 물고 씨익 웃는다. 그 살인은 그러니까 밤새 계속될 듯. 공포 평점 5.0(10점 만점)을 줬다. 무서울 수도 있지만, <식스센스>나 <아이덴터티>까지 본 마당에 아이가 범인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80년대라면 통했을 공포였다.
2편. 뭔지 모를 상황이 계속된다. 남자와 여자는 계속 셀프 비디오를 찍고, 여러 번 자세를 바꾼다. “대체 뭐하지?”라는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올 무렵, 남자는 여자를 쏴 죽인다. 다리와 팔을 자르고, 일부 장기를 먹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기도 자살. 한마디로 역겹다. 왜 죽였는지 스토리의 일관성도 없다. 내가 노트로 얼굴을 가린 것은 역겨움 때문이지 무서워서가 아니다. 공포평점 2.5
3편. 남자가 다른 곳에 있는 자작나무를 베어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 그런데 그 트리가 살아움직이며 남자를 공격한다는 얘기. <슬픈연가>란 드라마가 주인공만 슬프고 시청자는 헛웃음만 나오게 한 것처럼, 이 단편 역시 주인공만 공포에 떨며 도망다닐 뿐 난 하나도 안무서웠다. 주인공이 아닌, 관객을 무섭게 하는 게 공포영화다. 공포 평점 0.5
4편. 이가 아픈 남자가 있다. 면도날을 입에 넣어---그다음 장면은 노트로 얼굴을 가리느라 못봤다--치료를 하는 등 갖은 쇼를 다 하다가 총으로 자살한다. 이것 역시 징그러울 뿐, 무섭지는 않다. 도대체 왜 치과에 안가는 건지 궁금할 뿐. 공포평점 1.0
5편. 연인이 차를 타고 가는데 기름이 떨어진다. 여자에게 차에 있으라고 하고 기름통을 들고 나가는 남자. 여자가 차에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쿵 쿵 소리가 난다. 무서워서 문을 잠구고 공포에 떠는 여자. 한참 뒤에 경찰이 나타난다.
“아가씨, 차에서 내려 이리로 걸어오세요”
거듭된 경찰의 조언에 여자는 차에서 나오는데, 쿵 쿵 소리는 계속된다.
“뒤 돌아보면 절대 안되요 똑바로 이리로 오세요”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아내를 잃었듯이, 이 여자는 결국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봐 버렸다. 머리를 빡빡 깎은 미친 남자가 기름을 구하러 간다던 자기 애인의 머리통을 차에다 찧고 있는 장면을. 꺄악 비명 소리가 나고, 잠시 뒤 여자는 구급차 안에 있다. 멍한 눈빛으로. 공포평점 8.8, 내가 유일하게 건진 공포영화였다. 관객들로 하여금 그게 뭘까 궁금하게 하고, 그 반전이 의외의 것일 때 관객들은 공포를 느낀다.
6편. 아들과 아버지가 노인을 죽이러 왔다. 아버지는 킬러고, 아들은 그날이 킬러로서의 첫날이다. 아들은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노인의 입에 총알을 박는다.
“거봐 별거 아니지”라는 아버지의 말, 이게 무서운가? 공포평점 0.5. 공포영화 모음이 아니라 ‘첫 경험의 어려움’이란 영화모음에 포함되었어야 할 영화.
7편. 집을 공짜로 준다기에 보러 온 남자, 할머니는 복도로 남자를 내몰더니 문을 잠궈 버린다. 이럴 수가. 그곳은 서바이벌 게임장이다. 번호와 함께 온갖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게 도끼, 못, 전기감전 등 생명을 위협할 도구들이다. 귀가 잘리고 온갖 상처를 입은 채 할머니에게 다시 간 남자, 하지만 함정이 하나 더 있었고 남자는 결국 거기 빠져 죽는다. 공포라기보다 액션에 가까운 영화로 공포평점은 4.1.
8번째. 샴쌍둥이를 낳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부모, 하나의 머리를 잘라 다른 아이를 죽이고 얻는 몸에 이식을 한다. 그 다음엔? 벽장 속에 가둔 채 학대를 한다. 이런 잔인한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일, 이건 다 애니메이션이고, 잔인하긴 해도 무섭진 않다. 공포평점은 0.7.
9번째. 까먹었다. 하여간 별로 안무서웠는지 공포 평점이 2.4다.
3. 결론
공포 속의 짜릿함, 이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대개의 공포영화는 유치하다. 당시에는 대단한 공포영화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져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85년 당시엔 날 얼어붙게 만들었던 <터미네이터1편>이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기대치가 높아가는 것과 비례해서 공포영화는 진화한다. 이중인격자를 그린 히치콕의 <사이코>가 있었고, 사람 몸 안에 스며든 귀신을 다룬 <엑소시스트>, 불사의 몸을 가진 제이슨을 모델로 한 <13일의 금요일>이 뒤를 이었다. 그러다 소년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을 내세운 <식스센스>가 등장했다. 그 영화는 공포영화에 한 획을 그었는데, 그 이후 나온 <디 아더스> 등의 공포영화는 별반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이전 것들의 재탕에 그치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가장 무섭게 본 영화는 단연 <기묘한 이야기>고, 두 번째는 <식스센스>, 세 번째는 <데블스 에드버킷>이다. 그 이상의 공포를 주는 영화를 올 여름에는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