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어머니는 친구 분들과 놀러가셨고, 난 할머니와 영화를 보러갔다. 할머니는 코미디가 좋다고 하셨지만 <가문의 위기>가 매진이라 내가 보고 싶었던 <외출>을 봤다. 내가 멜러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으로 안 건 어떤 남자애랑 같이 <폴링 인 러브>를 보면서부터였다 (이 얘기, 전에도 했지만). 메릴 스트립과 드 니로의 농염한 연기에 매료된 난 시종 “재밌다!”를 연발했는데, 그 이후부터 시시때때로 이거다 싶은 멜러는 꼭 본다. 가을산님이 좋아하는 배용준이 나온다는 것도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지만.
손예진
요즘 시대의 아이콘은 전지현이다. <엽기적인 그녀>에 나온대로 자기 주장이 강한 당찬 여성이 각광받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청순가련을 찾아헤매는 남정네들이 있게 마련, 손예진의 존재는 그래서 빛이 난다. <클래식> <연애소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 늘 그런 이미지로만 나왔던 손예진은 여기서도 자신의 끼를 십분 발휘한다. 윤리적으로 금지된 사랑을 향해 다가가는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 그리고 질투심에서 비롯된 밀고 당기기, 이런 것들을 손예진은 아주 아름답게 구현해 냈다. 카페에 앉아 자신의 숙소를 찾은 배용준의 실루엣을 보면서 눈물짓는 장면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야함
노출의 수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음에도 영화는 무지하게 야했단 느낌이다. 불륜이 주는 상상력 때문인지, 아니면 두 배우의 몸매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인지.
처음 하는 장면. 바닷가 카페에서 손예진이 묻는다. “우리 뭐 할래요?”
곧바로 호텔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둘은 한다. 그러니까 손예진이 물어본 ‘뭐’는 바로 그거다.
나중에 하는 장면. 배용준이 말한다. “밥 먹으러 가요...기다릴께요”
예진, “아니요”
곧바로 둘이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배용준이 말한 ‘밥 먹는 것’도 바로 그거?
사랑
배: 어느 계절 좋아해요?
손: 봄이요
배: 전 겨울.
손: 저도 눈은 좋아해요
배: 봄에 눈이 오면 되겠네요.
고수부지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거라든지, 이렇듯 유치한 대사에도 그저 좋아 죽겠는 게 바로 사랑이다. 그러고보니 사랑을 안한 지도 벌써 아홉달이 다 되어간다. 근데 난 왜 혼자 유치한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난 시종 재미있게 이 영화를 봤지만, <외출>의 맥스무비 별점평균은 5.5였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의 반응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이게 뭐냐, 허무해 죽겠다 뭐 이런 반응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들이 바라는 건 뭐였을까? 둘이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 이런 식으로 감독이 결론을 지어줘야 속이 시원한 걸까? 그냥 집에 가서 나였으면 어땠을까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참고로 내가 감명깊게 본 <폴링 인 러브>의 결말도 <외출>과 비슷하다. 바람을 피우던 두 배우는 배우자에게 고백을 하고 착하게 살기로 하는데, 그러고나서 둘은 지하철에서 만난다. 미소를 띄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 그 광경은 내게 무진장 많은 여운을 남겨줬었다. 그땐 아무도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둘이 하러 갔다는 거야?”라고 불평하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물론 외출이 그 영화와 비슷한 수준이란 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건, 영화의 여백은 관객이 채우는 거라는 게 내 소신이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 주제라면)
허진호
이 영화는 김희선과 장동건이 나온 <패자부활전>의 재판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어떤 배우가 나오느냐, 또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영화 수준은 많이 달라진다. 영화가 끝나고 허진호라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난 “역시!”라고 중얼거렸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감독은 실제 모습과 가까운 사랑 얘기를 잘도 그려냈다. 멜러 전문 감독의 탄생이랄까.
집으로 가면서
택시 안에서 할머니에게 노트를 꺼내놓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하고 이 사람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다 사고를 당했는데, 간병을 하다 이 둘이 바람이 난 거야”
내 설명을 들은 우리 할머니, “아, 그렇다냐. 망할 것들이네...”
아니 그걸 이제야 깨달으셨단 말입니까. 영화에 다 나오고, 영화 중간중간에 내가 그렇게 설명을 드렸는데. 옛날에 내가 쓸 행거(옷걸이)를 조립하시면서 내 감탄을 자아냈던-할머니는 어쩜 그리 못하는 게 없어요?-할머니가 간단한 불륜영화도 이해 못하시게 되었다니. 할머니, 흑 너무 슬퍼요!